[관광자원론] 지리산 국립공원의 자연적 관광자원에 관한 연구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 53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관광자원론] 지리산 국립공원의 자연적 관광자원에 관한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지리산 국립공원의 정의 및 소개
2. 지리산의 역사 및 어원
3. 지리산의 문화적 배경
4. 지리산 이야기
5. 지리산의 자원
6. 지리산 찾아가는 길
7. 지리산 탐방코스
8. 지리산이 가진 문제점

본문내용

가 범패를 가르쳤던 팔영우가 지금도 쌍계사 경내에 보존돼 있다. 그리하여 진감선사에 의해 이룩된 불교음악은 이후 발전을 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가곡, 판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의 3대 성악곡이 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으므로 해서 오늘날 남원지방이 동편제의 고향이 돼 있고, 남원에는 남원국립예술고등학교와 남원국립민속국악원이 있어 판소리와 국악의 보급기지가 돼 있다.
여섯째, 지리산 자락은 우리나라 다문화의 발상지이다. 신라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단 김대렴은 흥덕왕3년에 차 씨앗을 가져와서 쌍계사 부근의 화개동천에 시배했다고 하며, 그 이후 쌍계사의 진감선사가 그 일대에 차 밭을 조성하여 널리 퍼지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칠불사도 차 문화 보급에 힘을 써서 지리산 발효차의 산실이 돼 선승들이 차를 만들어 마셨으며, 현재에도 칠불사 부근에 차밭이 조성돼 있다. 조선 후기에는 다승으로 유명한 초의 선사가 칠불사에 머물며 차를 만들었고, 1828년 아자방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차 문화에 대한 다신전을 초록했다. 그리하여 그 10여년 후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서 이를 토대로 동다송을 저술했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 현재 칠불사 일주문 전방 50여미터 지점에 초의선사 다신탑비가 조성돼 있다. 이런 배경이 있어서 이 지방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차와 다기 등 차문화가 발전하게 됐고, 지리산 자락엔 오늘날에도 야생 차 나무가 흔하게 퍼져 있으며, 차 시배지 부근에는 천년이 넘는 야생 차나무가 있어서 아직도 차 잎 새순을 딴다고 한다. 이리하여 하동에서는 해마다 ‘하동 야생차 문화축제’ 가 개최되고 있으며, 이때를 기하여 쌍계사에서는 <진감 초의선사 다맥 전수 및 108헌다례 법회>가 열리고 있다. 이처럼 지리산 자락은 우리나라 차 문화의 발상지인 것이다.
일곱 째, 지리산 동쪽 자락은 목화의 시배지이다. 고려 말 문익점이 원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통에 숨겨운 목화씨를 처음 시배한 곳이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이다.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더불어 3년도안 고생 끝에 목화 재배에 성공을 하여 이를 전국에 퍼뜨리는 한편 목화에서 실을 빼는 데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구를 제작 보급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지리산 자락에서 시작된 목화 재배가 우리나라 복식문화에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게 됐으며, 지금의 ‘면화 시비 사적비’ 는 문익점 선생의 면화 시배를 기리기 위하여 1965년 제막했다.
여덟째, 지리산 주변에서 우리나라 한의학이 정립됐다. 산청 땅에서 의성 허준이 나타나서 동의보감을 저술함으로써 우리나라 한의악이 정립됐고, 그 이후 명의 유의태 등이 나와 한의학을 더욱 발전시켜 지리산이 한의학 발전의 모태가 됐다. 이것 역시 지리산이라는 넓은 품속에 많은 약초가 채취되거나 재배됨으로써 한의학 발전을 뒷받침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허준에 관한 TV연속극에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으로 나왔었는데, 이것은 이름이 비슷한 한의사 유이태가 유의태로 잘못 등장한 것이거나 가공의 인물로 보인다. 산청 출신의 명의 유의태는 분명 허준 이후에 나타난 인물이다.
아홉째 지리산 주변은 군사전략 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삼한시대에는 마한과 진한,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가야, 혹은 백제와 신라 사이에 국경 싸움의 대상지가 됐기에 지리산 주변에는 삼국시대의 성터가 산재해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퇴치하는 데에 중요한 요충이 됐기에 운봉에는 ‘황산대첩비’ 가 남아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도 지리산은 이들을 퇴치하는 데에 중요한 거점이 됐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있어서 지금도 남원의 고룡산성, 함양의 사근산성, 하동 악양의 고소산성 등 여러 유적이 남아있다.
열째, 지리산은 민중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이 여러 분야에 걸쳐 생산적 기여를 하여 산국의 문화 발전의 모태가 됐지만 다른 일면에는 쫓기거나 상처 입은 민초들이 숨어드는 마지막 은신처이기도 했고, 민중의 마지막 저항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골이 깊은 산이기에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해 무서운 박해와 학살이 은밀히 자행된 곳이기도 하다. 즉 한말 진주농민운동이나 동학혁명을 일으킨 민중의 마지막 항전지가 지리산이었고, 일제 때는 일제의 징병이나 만행을 피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리산에 숨어들었으며, 해방 후 빨치산의 마지막 거점 역시 지리산이었다. 이러한 은신이나 저항의 가능했던 것도 지리산에 의지하여 삶을 지탱하고, 전략적 이점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원통하게도 지리산 깊숙한 골짜기에서 군경에 의해 죄 없는 양민이 학상당하는 만행이 저질러지기도 했다. 1951년 2월 산청군 시천면 외공마을에 군용 트럭을 앞세운 버스 11대에 가등 양민을 싣고 와서 외공마을 뒤 소정골에서 모두 학살했다. 정원 40명만 잡아도 400명, 최대 700-800명을 추산할수 있는 인원이다.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이유로 살해 됐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국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라는 것만 전할 뿐이다. 그런데 위의 사건은 외지인을 지리산 자락에 데리고 와서 학살한 사건이지만 같은 시기 함양, 산청, 거창 지역에서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공비들과 내통한 통비분자라고 덮어씌워 수많은 현지 주민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소위 ‘거창 산청 함양 양민학살사건’ 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어린이, 노약자, 부녀자를 불문하고 주민을 몰살시킨 만행이 우리 국군에 의해 저질러졌다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통탄스런 사건이었다.
열한째, 지리산을 중심으로 지리산 문학이라는 영역이 있게 됐다.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소재가 되고 테마가 돼, 우리 현대문학사에 시, 소설 등 ‘지리산 문학’ 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형성됐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혹은 지리산을 주제로 한 명작들이 생산됐다. 예를 들면, 우리 현대문학사에 불후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박경리의 ‘토지’ 를 비롯하여,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병주의 ‘지리산’, 김주영의 ‘천둥소리’, 최명희의 ‘혼불’, 문순태의 ‘피아골,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창작물이 쏟아졌는가 하면, 지리산을 주제로 한 많은 시들이 쓰여
  • 가격3,500
  • 페이지수53페이지
  • 등록일2013.12.19
  • 저작시기201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9837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