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序論)
Ⅱ. 본론(本論)
1. 근대역사학의 성립과 민족주의적 역사의식
2. 식민사관
1) 식민사관의 성립과 확대
2) 식민사관의 내용
3. 민족주의사학
1) 1910ㆍ20년대 민족주의사학의 형성
2) 1930ㆍ40년대 민족주의사학의 발달
4. 사회경제사학
1) 한국사상의 비판과 극복
2) 사적 유물론의 적용과 한계
5. 실증주의사학
6. 신민족주의사관
1) 신민족주의론
2) 신민족주의사학
Ⅲ. 결론(結論)
◐ 참 고 서 적 ◑
Ⅱ. 본론(本論)
1. 근대역사학의 성립과 민족주의적 역사의식
2. 식민사관
1) 식민사관의 성립과 확대
2) 식민사관의 내용
3. 민족주의사학
1) 1910ㆍ20년대 민족주의사학의 형성
2) 1930ㆍ40년대 민족주의사학의 발달
4. 사회경제사학
1) 한국사상의 비판과 극복
2) 사적 유물론의 적용과 한계
5. 실증주의사학
6. 신민족주의사관
1) 신민족주의론
2) 신민족주의사학
Ⅲ. 결론(結論)
◐ 참 고 서 적 ◑
본문내용
이른바 아카데미즘 식민사학의 본산으로 이 대학 법학회는 사회,경제관련 교수와 학자를 총동원하여『조선경제의 연구』,『조선사회경제사연구』,『조선사회법제사연구』등을 간행하였고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대의 상호보완적인 기능의 청구학회(靑丘學會)가 1930~39년 사이에 학회지인『청구학총』(靑丘學叢)을 간행하고 연구여행과 강연회를 주최하는 등 1930년대 식민사관에 의한 한국사연구의 학문적 중심체 역활을 수행하였다.
2) 식민사관의 내용
한국사의 내재적인 발전 가능성을 부인하고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을 지닌 식민사관은 식민지배 정책의 변화에 맞추어 보다 확대 적용되고 있었다. 한국사의 각 부문에 적용된 식민사관의 내용은 크게 일선동조론과 타율성이론, 그리고 정체성이론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일선동조론은 단순하게는 한국과 일본이 같은 선조로부터 피를 나눈 근친관계에 있음을 말하지만 사실은 태도 이래 한국이 일본의 지배아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1890념대 국학의 전통을 이은 『국사안』(國史眼)에서 강하게 주장되었으며, 합방이래 식민정책의 변황에 발맞추어 내용을 계속 확대, 전개시켰다. 1910년 『역사지리』의 임시증간호인「조선호」(朝鮮號)에서 『국사안』의 저자 호시노(ほしの)는 일본의 조선 강점을 일한동역(日韓同域)의 복고로 보아 그들의 침략행위를 찬양하였다. 이후 일선동조론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국신민화운동의 이념적 기초가 되어 한민족 말살정책에 교묘히 이용되었다. 말하자면 일선동조론은 계속적인 굴종을 강요하는 논리였다.
타율성이론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이루어졌기보다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즉 한국의 수천 년 역사는 북쪽의 중국, 만주, 몽고와 남쪽의 일본 등 이웃하고 있는 외세의 침략과 압제속에 서 비자주적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인의 자주성 고양에 크게 기여한 다군은 부정되었고, 한국은 태고적부터 외세의 지배 아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논리가 전개되었다.
타율성이론과 함께 식민사관의 2대 지중에 속하는 것이 정체성이론 혹은 정체후진성이론이다. 이것은 한국이 왕조의 교체 등 사회적 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로의 이행, 발전에 필요한 자생적, 근대적 요인을 찾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정체성이론은 경제사학자 후쿠타(ふくた)의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1904)에서 1923년 『경제사논고』(經齊史論考)를 펴낸 고쿠쇼(こくしょ)에게로 이어졌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한국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한편, 일본의 한국침략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요컨데 식민사관은 근대역사학의 방법론을 취하면서도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정책에 부응하려는 현실적 목적을 지닌 한국사 인식체계였다. 이러한 식민사관의 허구성과 침략적 의도는 바로 그 당대부터 비판받았다. 대한제국이래 충군액국주의를 극복하고 맞서 민족의 독립과 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요구에 부응하는 역사학을 수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3. 민족주의사학
민족주의사학을 사학사적 입장에서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 성격과 시기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의 개념은 시기마다 그 내용을 다양하게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지시기 역사학의 일각을 이루는 민족주의사학은 먼저 근대역사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 하며, 다음으로는 역사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민족주의사학은 실학자의 역사학적 전통과 개항기 역사학의 전통을 비판, 계승하면서 1920년대에는 근대역사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민족주의사학은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사를 연구함으로서 식민사과에 강력히 대응하는 반식민사학(反植民史學)의 성격을 띠었다. 민족주의사학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1910,20년대의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와 1930ㆍ40년대의 정인보(鄭寅普), 안재홍(安在鴻), 문일평(文一平)등을 들 수 있다.
1) 1910ㆍ20년대 민족주의사학의 형성
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의 성립은 대부분 신채호의 역사학으로부터 그 기원을 잡고 있다. 그러나 애국계몽주의 역사학으로부터 근대역사학으로 전환하는 데서 빼놀 수 없는 것이 박은식의 역사의식과 역사서술이다. 박은식은 언론인, 교육가, 독립운동가, 역사가로서 구한말에는 경성에서, 식민지 시기에는 만주, 상해 등지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그가 개항기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우리나라 역사학으로 한걸음 성장시킨 것은 1910년대의 일이다. 1915년에 간행된『한국통사』(韓國桶史)는 근세 신사의 체제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이에 대한 그의 비평이나 논평을 가하였다. 3ㆍ1운동이후 박은식은『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내놓았다. 이 책은 문자 그대로 독립쟁취를 위한 혈투의 역사였다. 한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한국통사]에 비해 발전적인 역사인식을 보여주었다. 즉 [한국통사]에서는 난(亂)으로 평가되던 운동들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혁명으로 높이 평가되어 서술되었다. 요컨데 박은식은 서술체계에서는 근세 신사의 방식을 취하여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히려 하엿으며, 통계와 확고한 자료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서술하면서 비판적 안목을 유지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국혼개념에 의해 [한국통사]와[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서술함으로서, 1864~1920년까지의 우리 근대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식민사학에 맞서 독립운동을 크게 고취하였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사학의 범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신채호는 1910년 후반부터 독특한 사론을 형성하였고 1920년대에는 민족주의사학의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신채호의 생애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의 언론활동기, 1910년부터 1925년까지의 해외망명과 독립운동 및 고대사 연구기, 그리고 1925년 이후의 무정부주의사상 섭취 및 활동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채호의 주요저서로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독사신론』(讀史薪論)은 이시기의 신채호의 역상
2) 식민사관의 내용
한국사의 내재적인 발전 가능성을 부인하고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을 지닌 식민사관은 식민지배 정책의 변화에 맞추어 보다 확대 적용되고 있었다. 한국사의 각 부문에 적용된 식민사관의 내용은 크게 일선동조론과 타율성이론, 그리고 정체성이론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일선동조론은 단순하게는 한국과 일본이 같은 선조로부터 피를 나눈 근친관계에 있음을 말하지만 사실은 태도 이래 한국이 일본의 지배아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1890념대 국학의 전통을 이은 『국사안』(國史眼)에서 강하게 주장되었으며, 합방이래 식민정책의 변황에 발맞추어 내용을 계속 확대, 전개시켰다. 1910년 『역사지리』의 임시증간호인「조선호」(朝鮮號)에서 『국사안』의 저자 호시노(ほしの)는 일본의 조선 강점을 일한동역(日韓同域)의 복고로 보아 그들의 침략행위를 찬양하였다. 이후 일선동조론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국신민화운동의 이념적 기초가 되어 한민족 말살정책에 교묘히 이용되었다. 말하자면 일선동조론은 계속적인 굴종을 강요하는 논리였다.
타율성이론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이루어졌기보다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즉 한국의 수천 년 역사는 북쪽의 중국, 만주, 몽고와 남쪽의 일본 등 이웃하고 있는 외세의 침략과 압제속에 서 비자주적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인의 자주성 고양에 크게 기여한 다군은 부정되었고, 한국은 태고적부터 외세의 지배 아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논리가 전개되었다.
타율성이론과 함께 식민사관의 2대 지중에 속하는 것이 정체성이론 혹은 정체후진성이론이다. 이것은 한국이 왕조의 교체 등 사회적 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로의 이행, 발전에 필요한 자생적, 근대적 요인을 찾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정체성이론은 경제사학자 후쿠타(ふくた)의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1904)에서 1923년 『경제사논고』(經齊史論考)를 펴낸 고쿠쇼(こくしょ)에게로 이어졌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한국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한편, 일본의 한국침략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요컨데 식민사관은 근대역사학의 방법론을 취하면서도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정책에 부응하려는 현실적 목적을 지닌 한국사 인식체계였다. 이러한 식민사관의 허구성과 침략적 의도는 바로 그 당대부터 비판받았다. 대한제국이래 충군액국주의를 극복하고 맞서 민족의 독립과 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요구에 부응하는 역사학을 수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3. 민족주의사학
민족주의사학을 사학사적 입장에서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 성격과 시기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의 개념은 시기마다 그 내용을 다양하게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지시기 역사학의 일각을 이루는 민족주의사학은 먼저 근대역사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 하며, 다음으로는 역사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민족주의사학은 실학자의 역사학적 전통과 개항기 역사학의 전통을 비판, 계승하면서 1920년대에는 근대역사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민족주의사학은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사를 연구함으로서 식민사과에 강력히 대응하는 반식민사학(反植民史學)의 성격을 띠었다. 민족주의사학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1910,20년대의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와 1930ㆍ40년대의 정인보(鄭寅普), 안재홍(安在鴻), 문일평(文一平)등을 들 수 있다.
1) 1910ㆍ20년대 민족주의사학의 형성
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의 성립은 대부분 신채호의 역사학으로부터 그 기원을 잡고 있다. 그러나 애국계몽주의 역사학으로부터 근대역사학으로 전환하는 데서 빼놀 수 없는 것이 박은식의 역사의식과 역사서술이다. 박은식은 언론인, 교육가, 독립운동가, 역사가로서 구한말에는 경성에서, 식민지 시기에는 만주, 상해 등지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그가 개항기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우리나라 역사학으로 한걸음 성장시킨 것은 1910년대의 일이다. 1915년에 간행된『한국통사』(韓國桶史)는 근세 신사의 체제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이에 대한 그의 비평이나 논평을 가하였다. 3ㆍ1운동이후 박은식은『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내놓았다. 이 책은 문자 그대로 독립쟁취를 위한 혈투의 역사였다. 한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한국통사]에 비해 발전적인 역사인식을 보여주었다. 즉 [한국통사]에서는 난(亂)으로 평가되던 운동들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혁명으로 높이 평가되어 서술되었다. 요컨데 박은식은 서술체계에서는 근세 신사의 방식을 취하여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히려 하엿으며, 통계와 확고한 자료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서술하면서 비판적 안목을 유지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국혼개념에 의해 [한국통사]와[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서술함으로서, 1864~1920년까지의 우리 근대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식민사학에 맞서 독립운동을 크게 고취하였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사학의 범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신채호는 1910년 후반부터 독특한 사론을 형성하였고 1920년대에는 민족주의사학의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신채호의 생애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의 언론활동기, 1910년부터 1925년까지의 해외망명과 독립운동 및 고대사 연구기, 그리고 1925년 이후의 무정부주의사상 섭취 및 활동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채호의 주요저서로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독사신론』(讀史薪論)은 이시기의 신채호의 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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