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당 재건운동의 배경
(1) 1920년대 말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위기
(2)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재건결정
3. 초기 당 재건운동 (1929 ~ 1931)
(1) 혁명정세
(2) 당재건준비위원회의 결성
4. 이재유 그룹의 당재건운동
(1)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된 계기
(2) 경성트로이카
ㄱ. 노동운동
ㄴ. 학생운동
ㄷ. 출판물 간행 활동
(3) 경성재건그룹시기 (2기)
ㄱ. 경성재건그룹의 형성
ㄴ. 출판활동
ㄷ. 제 2기 운동내용 평가
(4) 경성준비그룹시기(3기)
ㄱ. 경성준비그룹 형성과 운동지침
ㄴ. 출판활동
ㄷ. 제 3기 운동내용 평가
(5)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와 한계
5. 최후의 재건운동 조직 : 경성콤그룹
(1) 경성콤그룹의 형성
(2) 경성콤그룹의 지도부
(3) 경성지방
(4) 경상남북도
(5) 함경도지방
6. 당 재건운동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
7. 맺는말
참고문헌
2. 당 재건운동의 배경
(1) 1920년대 말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위기
(2)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재건결정
3. 초기 당 재건운동 (1929 ~ 1931)
(1) 혁명정세
(2) 당재건준비위원회의 결성
4. 이재유 그룹의 당재건운동
(1)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된 계기
(2) 경성트로이카
ㄱ. 노동운동
ㄴ. 학생운동
ㄷ. 출판물 간행 활동
(3) 경성재건그룹시기 (2기)
ㄱ. 경성재건그룹의 형성
ㄴ. 출판활동
ㄷ. 제 2기 운동내용 평가
(4) 경성준비그룹시기(3기)
ㄱ. 경성준비그룹 형성과 운동지침
ㄴ. 출판활동
ㄷ. 제 3기 운동내용 평가
(5)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와 한계
5. 최후의 재건운동 조직 : 경성콤그룹
(1) 경성콤그룹의 형성
(2) 경성콤그룹의 지도부
(3) 경성지방
(4) 경상남북도
(5) 함경도지방
6. 당 재건운동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
7. 맺는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동가들은 없었다고 본다. 이렇나 점에서 그가 공산주의자로서 일정하게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활동한 지역이 서울로 매우 한정적이었다는 점과 그가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지나친 애착으로 인해 운동이 다소 느려질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또, 부르주아 계급의 내부적인 편차를 무시한 민족부르주아지의 ‘반일적인 부분’을 혁명의 동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점, 좌파만의 결집에만 주력한 점, 비합법적 영역에 치중한 활동 전개를 그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5. 최후의 재건운동 조직 : 경성콤그룹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위하여 1939년 조직된 공산주의 비밀조직.
경성콤그룹은 경성콤무니스트그룹의 약칭이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경성콤그룹은 1939~1941년 경성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경상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등지에 조직선을 확장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나 1940년 겨울부터 1941년 12월까지 3차례에 걸쳐 대량 검거되었다. 검거망을 피했거나 체포되었다 출감한 조직원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소그룹활동을 지속하였다. 이애숙, 「일제 말기 반파시즘 인민전선론-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2004, 205~206쪽.
(1) 경성콤그룹의 형성
‘이재유그룹’ 사건으로 일제의 수배를 받아오던 이관술은 이순금과 연락을 취하며 재기를 모색해 오다가 1938년 12월 말경 그녀의 소개로 강경자를 만났다. 그리고 1939년 3월 말경 이순금의 소개로 김단야를 만나 소련의 정세에 대해 교양을 받았다.
한편, 이관술과 같은 사건으로 징역 2년의 형기를 마치고 고향에 있던 김삼룡은, 1938년 12월 중순부터 1939년 1월 하순 사이에 수원에 거주하는 ‘김석X’라는 남자의 내방을 받고 재차 실천운동에 투신할 것을 제안받았다. 이후 김삼룡은 본격적인 실천활동을 위해 경성에 상경하여, 1939년 4월 3일경 효창공원에서 ‘김석X\'로부터 어떤 지도자(이주하일 가능성이 높은)를 소개받는다. 김삼룡과 이 지도자는 1939년 7월 중순경까지 1~2주에 1회씩 정기적인 가두연락을 하면서 다양한 문제를 협의했다. 이로써 경성콤그룹의 초기 지도부가 일정하게 형성되었다.
(2) 경성콤그룹의 지도부 신주백,『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선인, 2005, 129~132쪽.
지도부는 1940년 2월경 박헌영이 경성콤그룹의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지도부의 편제가 세분화되었다. 지도부의 활동은 출판활동과 동지 획득과 교양문제 및 배치로 나뉜다고 할 수 있는데, 출판과 조직원 교양을 담당하고 있던 이관술이 코민테른과 연락로를 개척하고 함경도지방 활동가들과도 연락하는 임무를 담당하였고, 박헌영이 이관술을 대신하여 출판을 담당하면서 조직의 책임자가 되었다.
초기 출판은 이관술이 담당했는데, 그는 「메이데이 투쟁서」와 「81캄파 방침서」를 출판했다. 노동자들의 기본교양자료로서 「노동자리프린트」 제 1, 2호를 출판했다. 이후 경성콤그룹은 기관지 『공산주의자』9,10월 합병호(1939년)를 ‘신약전서정동예배당’이라는 표지를 붙여서 주로 인천의 아지트에서 20부 가량 발행했다.
그런데 박헌영은 조직 및 기관지의 편집책임자가 되자 1940년 3월호부터 『공산주의자』 『꼬뮤니스트』로 바꾸고 25~35부씩 발행했다. 꼬뮤니스트그룹의 기관지 『콤무니스트』를 계승하려는 취지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때 기관지의 출판은 이관술과 김순용이 담당했다.
경성콤그룹의 전체적인 조직운영은 박헌영의 지도 아래 김삼룡과 장규경 그는 5월경부터 조직에 가담하는데,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으로 마산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 후 그는 함흥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통제하는 형식이었다.
다음으로 경성콤그룹 지도부의 활동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동지획득과 교양문제가 있다. 인물의 현황을 조사함과 동시에 이들을 가능한 한 경성콤그룹에 끌어들이려 노력했고, 이는 당시의 정세와 경성콤그룹의 활동방침에 충실한 활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경성지방 신주백,『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선인, 2005, 132~135쪽.
경성지방의 노동운동 지도자는 김삼룡이었다. 그는 동지 획득을 위해 「노동자리프린트」를 교재로 노동자들의 초보적인 계급의식을 고취시키거나, 각 부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활동가를 포섭하여 집중적인 지도 · 교양을 실시한 후 공장에 파견하는 형식을 취했다. 경성콤그룹은 1940년 10월 중순경 서울에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고양군에서 김삼룡의 지도 아래 경성좌익노동조합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금속부는 이주상, 섬유부는 김응빈, 출판부는 이복기가 각각 책임지며, 상층과의 연계는 이주상이 담당하는 것으로 했다.
학생부문의 조직사업은 1940년 9월경 김순용의 중앙고보 동창으로서 경성법학전문학교 학생인 윤명의, 윤명의의 대학동창인 조재옥 · 조희영이 가입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김순용 · 이남래의 면밀한 조사를 거쳐 조직에 가입하여 김삼룡으로부터 집중적인 지도 · 교양을 받았다.
그런데 경성콤그룹이 학생의 조직사업을 위해 지도적인 인물들에게 집중적인 교양을 실시하고 있을 때, 경성에서는 별도의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보성전문학교 출신인 이종갑이 지도하던 독서회 활동이 그것이다. 독서회원들은 집단적으로 만나지 않고 대부분 1대 1의 정기적인 만남 속에서 사회과학연구를 심화시켜 가고 있었다. 경성콤그룹은 김한성 또는 조재옥을 통해 이종갑 조직과 결합을 시도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재건기에 이르러서야 통합을 이루었다.
(4) 경상남북도 신주백,『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선인, 2005, 135~137쪽.
경상도에서 경성콤그룹의 활동은 권우성을 정점으로 하면서, 이안호 등을 중심으로 한 창원군 상남면에서의 농민조합운동, 이기호를 중심으로 한 부산지역에서의 노동조합운동, 대구에 있던 정재철의 출판준비활동 등이 있었다.
권우성은 1940년 4월 하순경 이안호를 통해 모임의 현황을 파악하고, 5월 중순경 재차 상경하여 이현상을 만나 경성콤그룹에 가입했다. 그리고 일주일 우 박헌영을 만나 상남면에서의 농민조합 건설을 지시받았다. 이후 권우성은 이안호를 통해 성원들을
5. 최후의 재건운동 조직 : 경성콤그룹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위하여 1939년 조직된 공산주의 비밀조직.
경성콤그룹은 경성콤무니스트그룹의 약칭이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경성콤그룹은 1939~1941년 경성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경상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등지에 조직선을 확장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나 1940년 겨울부터 1941년 12월까지 3차례에 걸쳐 대량 검거되었다. 검거망을 피했거나 체포되었다 출감한 조직원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소그룹활동을 지속하였다. 이애숙, 「일제 말기 반파시즘 인민전선론-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2004, 205~206쪽.
(1) 경성콤그룹의 형성
‘이재유그룹’ 사건으로 일제의 수배를 받아오던 이관술은 이순금과 연락을 취하며 재기를 모색해 오다가 1938년 12월 말경 그녀의 소개로 강경자를 만났다. 그리고 1939년 3월 말경 이순금의 소개로 김단야를 만나 소련의 정세에 대해 교양을 받았다.
한편, 이관술과 같은 사건으로 징역 2년의 형기를 마치고 고향에 있던 김삼룡은, 1938년 12월 중순부터 1939년 1월 하순 사이에 수원에 거주하는 ‘김석X’라는 남자의 내방을 받고 재차 실천운동에 투신할 것을 제안받았다. 이후 김삼룡은 본격적인 실천활동을 위해 경성에 상경하여, 1939년 4월 3일경 효창공원에서 ‘김석X\'로부터 어떤 지도자(이주하일 가능성이 높은)를 소개받는다. 김삼룡과 이 지도자는 1939년 7월 중순경까지 1~2주에 1회씩 정기적인 가두연락을 하면서 다양한 문제를 협의했다. 이로써 경성콤그룹의 초기 지도부가 일정하게 형성되었다.
(2) 경성콤그룹의 지도부 신주백,『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선인, 2005, 129~132쪽.
지도부는 1940년 2월경 박헌영이 경성콤그룹의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지도부의 편제가 세분화되었다. 지도부의 활동은 출판활동과 동지 획득과 교양문제 및 배치로 나뉜다고 할 수 있는데, 출판과 조직원 교양을 담당하고 있던 이관술이 코민테른과 연락로를 개척하고 함경도지방 활동가들과도 연락하는 임무를 담당하였고, 박헌영이 이관술을 대신하여 출판을 담당하면서 조직의 책임자가 되었다.
초기 출판은 이관술이 담당했는데, 그는 「메이데이 투쟁서」와 「81캄파 방침서」를 출판했다. 노동자들의 기본교양자료로서 「노동자리프린트」 제 1, 2호를 출판했다. 이후 경성콤그룹은 기관지 『공산주의자』9,10월 합병호(1939년)를 ‘신약전서정동예배당’이라는 표지를 붙여서 주로 인천의 아지트에서 20부 가량 발행했다.
그런데 박헌영은 조직 및 기관지의 편집책임자가 되자 1940년 3월호부터 『공산주의자』 『꼬뮤니스트』로 바꾸고 25~35부씩 발행했다. 꼬뮤니스트그룹의 기관지 『콤무니스트』를 계승하려는 취지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때 기관지의 출판은 이관술과 김순용이 담당했다.
경성콤그룹의 전체적인 조직운영은 박헌영의 지도 아래 김삼룡과 장규경 그는 5월경부터 조직에 가담하는데,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으로 마산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 후 그는 함흥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통제하는 형식이었다.
다음으로 경성콤그룹 지도부의 활동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동지획득과 교양문제가 있다. 인물의 현황을 조사함과 동시에 이들을 가능한 한 경성콤그룹에 끌어들이려 노력했고, 이는 당시의 정세와 경성콤그룹의 활동방침에 충실한 활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경성지방 신주백,『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선인, 2005, 132~135쪽.
경성지방의 노동운동 지도자는 김삼룡이었다. 그는 동지 획득을 위해 「노동자리프린트」를 교재로 노동자들의 초보적인 계급의식을 고취시키거나, 각 부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활동가를 포섭하여 집중적인 지도 · 교양을 실시한 후 공장에 파견하는 형식을 취했다. 경성콤그룹은 1940년 10월 중순경 서울에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고양군에서 김삼룡의 지도 아래 경성좌익노동조합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금속부는 이주상, 섬유부는 김응빈, 출판부는 이복기가 각각 책임지며, 상층과의 연계는 이주상이 담당하는 것으로 했다.
학생부문의 조직사업은 1940년 9월경 김순용의 중앙고보 동창으로서 경성법학전문학교 학생인 윤명의, 윤명의의 대학동창인 조재옥 · 조희영이 가입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김순용 · 이남래의 면밀한 조사를 거쳐 조직에 가입하여 김삼룡으로부터 집중적인 지도 · 교양을 받았다.
그런데 경성콤그룹이 학생의 조직사업을 위해 지도적인 인물들에게 집중적인 교양을 실시하고 있을 때, 경성에서는 별도의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보성전문학교 출신인 이종갑이 지도하던 독서회 활동이 그것이다. 독서회원들은 집단적으로 만나지 않고 대부분 1대 1의 정기적인 만남 속에서 사회과학연구를 심화시켜 가고 있었다. 경성콤그룹은 김한성 또는 조재옥을 통해 이종갑 조직과 결합을 시도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재건기에 이르러서야 통합을 이루었다.
(4) 경상남북도 신주백,『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선인, 2005, 135~137쪽.
경상도에서 경성콤그룹의 활동은 권우성을 정점으로 하면서, 이안호 등을 중심으로 한 창원군 상남면에서의 농민조합운동, 이기호를 중심으로 한 부산지역에서의 노동조합운동, 대구에 있던 정재철의 출판준비활동 등이 있었다.
권우성은 1940년 4월 하순경 이안호를 통해 모임의 현황을 파악하고, 5월 중순경 재차 상경하여 이현상을 만나 경성콤그룹에 가입했다. 그리고 일주일 우 박헌영을 만나 상남면에서의 농민조합 건설을 지시받았다. 이후 권우성은 이안호를 통해 성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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