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 선정 이유 및 조사 목적 (2p)
Ⅱ. 본론
1) 백년 전쟁 전의 시대적 상황
2) 백년 전쟁의 전개 과정
3) 백년 전쟁 후의 시대적 상황
4) 장미 전쟁의 전개 과정
5) 장미전쟁 후의 영국의 상황
6) 백년 전쟁과 장미전쟁의 연관성
Ⅲ . 결론 및 시사점 (13p)
☆ 부록 :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는 누구인가?
☆ 참고사항 : 프랑스와 영국의 왕조 변천사
※ 참고문헌
☞ 선정 이유 및 조사 목적 (2p)
Ⅱ. 본론
1) 백년 전쟁 전의 시대적 상황
2) 백년 전쟁의 전개 과정
3) 백년 전쟁 후의 시대적 상황
4) 장미 전쟁의 전개 과정
5) 장미전쟁 후의 영국의 상황
6) 백년 전쟁과 장미전쟁의 연관성
Ⅲ . 결론 및 시사점 (13p)
☆ 부록 :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는 누구인가?
☆ 참고사항 : 프랑스와 영국의 왕조 변천사
※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 어떤 이가 있었지만 한 나라의 국가 원수를 지냈다는 이유로 그가 했던 온갖 행포와 만행들을 눈감아 주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그 사면을 저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왕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누구 하나 터치할 수 없는 강력한 권한인 것이다!
왕권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더라면 수많은 피를 보게 하는 전쟁도 없었을 것이고 독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왕권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것은 왕족의 욕구일 것이다
인간의 욕구가 끝이 없듯이 그들도 인간이기에 그러했으리라 짐작 한다
우리가 앞에서 정리한 100년 전쟁과 장미전쟁도 그러한 인간 욕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에 역사는 흐른다 지금 현재의 모습도 다가올 미래에는 역사가 된다 우리가 모든 역사를 배우고 알아가면서 그 시대의 상황과 배경을 그 때의 심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적인 비판만을 내세운다면 우리는 역사를 배울 자격이 없을 것이다 비록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러한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질렀지만 그것은 한 역사로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렇듯 여러 의견속에서 역사는 그 시절의 매력이기에 역사에 대한 다툼보다는 이해가 오히려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피 말리는 전쟁은 하나의 한 줄기 흐르는 냇물처럼 역사속으로 흘러 잊혀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본조의 시사점이다
☆ 부록 :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는 누구인가?
(잔 다르크의 상)
15세기 전반에 영국의 랭커스터 왕조가 일으킨 백년전쟁 후기에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적인 소녀.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종교, 군사
출생지 : 프랑스 동레미라퓌셀
▷ 잔다르크 이야기
그녀는 1412년 프랑스의 동레미라 마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활달하고 신앙심이 깊은 그녀에게 천사장 미카엘의 모습이 머리 위에 나타나서 \" 프랑스를 지켜라 잔아\" \"오를레앙을 구하라\" 엄숙한 목소리에 잔은 샤를르황태자를 만나기로 결심 황태자의 부하인 보르리쿠르라는 기사를 찾아갔다 이에 보르리쿠르 기사는 정신이 나간 처녀로 밖에는 취급하지 않았으나 계속되는 잔 다르크의 집념에 마침내 황태자에게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도착한 궁에서 귀족들 및 학자들로부터 잔 다르크는 시험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과 결심은 황태자를 비롯한 지휘관들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하여 잔 다르크는 샤를 태자가 하사한 말을 타고 오를레앙 구출을 위한 출진에 앞장섰다 오를레앙은 영국군의 보급로 차단으로 고립상태에 있었으며 함락 직전이었다 드디어 잔 다르크의 일행이 도착하자 오를레앙 시민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즉시 영국군을 공격, 영국은 패퇴하고 드디어 오를레앙의 포위망이 뚫렸다 이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는 역전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영국의 헨리 6세보다 먼저 샤를 7세에게 대관식을 올리게 하여 프랑스의 왕으로 정통성을 인정받게 하였다 대관식후 샤를 7세는 안이한 성격으로 잔 다르크의 파리탈환의 권유를 1년여 동안 따르지 않고 있다가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군의 재공격을 받게 된다 이에 잔 다르크는 위기에 처한 퐁피에뉴로 달려갔고 선두에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싸우다 적군의 본대 깊숙이 침투하지만 부르고뉴 군에 의해 영국군에 팔아넘겨졌다 샤를 7세는 영국이 요구한 몸값을 지불하지 않아 풀려나지 못했고 결국 7번의 재판 끝에 화형의 판결이 내려지고 말았다
(잔 다르크의 처형지)
1431년 5월 30일 형장으로 루아시의 광장에서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자 등의 죄목으로 화형대에 오른 잔 다르크는 자신의 행동이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19살의 꽃다운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잔 다르크는 가공 인물(?)” 프랑스서 논란
출처 :[경향신문 2003-12-23 19:42]
“잔다르크는 프랑스 왕가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와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다
중세 프랑스 왕가의 유골을 조사하던 우크라이나 정형의학자 세르히 호르벤코가 “잔 다르크는 사실 샤를 6세의 서출 마르게리트 드 발로아”라고 주장한 것. 그는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루이 11세의 유골을 조사하던 중 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23일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서 밝혔다
증거로 그는 발로아 왕손들이 묻힌 오를레앙 인근의 한 성당에서 발견된 마르게리트의 유골을 들고 있다. 이 유골이 “갑옷 입고 말을 탔던 동시대의 전사들에게 특징적으로 발달한 근육형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잔 다르크’ 신화의 이면에는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프랑스 왕가의 계산이 숨어있다 신의 기적이 필요했던 프랑스 왕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성녀 만들기’ 작업에 돌입했고 적임자는 마르게리트였다 샤를 6세가 딸의 안전을 염려해 각종 무술 조기교육을 시킨 덕분이었다 전장에 나간 그는 예상치 못한 혁혁한 승리를 거뒀다 마르게리트의 배다른 오누이이자 훗날 샤를 7세로 등극한 도팽은 서출인 그가 왕권에 도전할 것을 우려해 평생 감옥에 가둬놓았다
호르벤코는 “훗날 영국에 의해 마녀로 몰려 사형당한 여성은 마르게리트가 아닌 다른 여성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성당에서 발견된 마르게리트의 유골은 50세가 넘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샤를 7세의 아들인 루이 11세의 유골과 마르게리트의 유골이 함께 매장된 것은 프랑스 왕조의 비밀을 아는 이들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참고 사항
◎ 프랑스의 왕조 변천사
Ⅰ. 메로빙거 왕조 : 프랑스 왕국의 전반기의 왕조 (481∼751)
▼
Ⅱ. 카롤링거왕조 : 메로빙거왕조를 이어 프랑크왕국의 후반을 지배한 왕조 (751∼987)
(샤를마뉴)
왕가의 계보가 대(大)피핀과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아르눌핑가(家)라고도 한다
마스강·모젤강 유역의 대토지 소유자였으나 메로빙거왕조 후기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宮宰)로서 세력을 펴나가 중(中)피핀, 카를 마르텔 때에는 다른 분국(分國)의 궁재도 겸임, 왕국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그의 아들 소(小)피핀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들 샤를마뉴는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여 로마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았으나 루트비히 1세의 사후 843년의 베르
왕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누구 하나 터치할 수 없는 강력한 권한인 것이다!
왕권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더라면 수많은 피를 보게 하는 전쟁도 없었을 것이고 독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왕권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것은 왕족의 욕구일 것이다
인간의 욕구가 끝이 없듯이 그들도 인간이기에 그러했으리라 짐작 한다
우리가 앞에서 정리한 100년 전쟁과 장미전쟁도 그러한 인간 욕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에 역사는 흐른다 지금 현재의 모습도 다가올 미래에는 역사가 된다 우리가 모든 역사를 배우고 알아가면서 그 시대의 상황과 배경을 그 때의 심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적인 비판만을 내세운다면 우리는 역사를 배울 자격이 없을 것이다 비록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러한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질렀지만 그것은 한 역사로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렇듯 여러 의견속에서 역사는 그 시절의 매력이기에 역사에 대한 다툼보다는 이해가 오히려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피 말리는 전쟁은 하나의 한 줄기 흐르는 냇물처럼 역사속으로 흘러 잊혀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본조의 시사점이다
☆ 부록 :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는 누구인가?
(잔 다르크의 상)
15세기 전반에 영국의 랭커스터 왕조가 일으킨 백년전쟁 후기에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적인 소녀.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종교, 군사
출생지 : 프랑스 동레미라퓌셀
▷ 잔다르크 이야기
그녀는 1412년 프랑스의 동레미라 마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활달하고 신앙심이 깊은 그녀에게 천사장 미카엘의 모습이 머리 위에 나타나서 \" 프랑스를 지켜라 잔아\" \"오를레앙을 구하라\" 엄숙한 목소리에 잔은 샤를르황태자를 만나기로 결심 황태자의 부하인 보르리쿠르라는 기사를 찾아갔다 이에 보르리쿠르 기사는 정신이 나간 처녀로 밖에는 취급하지 않았으나 계속되는 잔 다르크의 집념에 마침내 황태자에게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도착한 궁에서 귀족들 및 학자들로부터 잔 다르크는 시험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과 결심은 황태자를 비롯한 지휘관들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하여 잔 다르크는 샤를 태자가 하사한 말을 타고 오를레앙 구출을 위한 출진에 앞장섰다 오를레앙은 영국군의 보급로 차단으로 고립상태에 있었으며 함락 직전이었다 드디어 잔 다르크의 일행이 도착하자 오를레앙 시민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즉시 영국군을 공격, 영국은 패퇴하고 드디어 오를레앙의 포위망이 뚫렸다 이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는 역전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영국의 헨리 6세보다 먼저 샤를 7세에게 대관식을 올리게 하여 프랑스의 왕으로 정통성을 인정받게 하였다 대관식후 샤를 7세는 안이한 성격으로 잔 다르크의 파리탈환의 권유를 1년여 동안 따르지 않고 있다가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군의 재공격을 받게 된다 이에 잔 다르크는 위기에 처한 퐁피에뉴로 달려갔고 선두에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싸우다 적군의 본대 깊숙이 침투하지만 부르고뉴 군에 의해 영국군에 팔아넘겨졌다 샤를 7세는 영국이 요구한 몸값을 지불하지 않아 풀려나지 못했고 결국 7번의 재판 끝에 화형의 판결이 내려지고 말았다
(잔 다르크의 처형지)
1431년 5월 30일 형장으로 루아시의 광장에서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자 등의 죄목으로 화형대에 오른 잔 다르크는 자신의 행동이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19살의 꽃다운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잔 다르크는 가공 인물(?)” 프랑스서 논란
출처 :[경향신문 2003-12-23 19:42]
“잔다르크는 프랑스 왕가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와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다
중세 프랑스 왕가의 유골을 조사하던 우크라이나 정형의학자 세르히 호르벤코가 “잔 다르크는 사실 샤를 6세의 서출 마르게리트 드 발로아”라고 주장한 것. 그는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루이 11세의 유골을 조사하던 중 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23일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서 밝혔다
증거로 그는 발로아 왕손들이 묻힌 오를레앙 인근의 한 성당에서 발견된 마르게리트의 유골을 들고 있다. 이 유골이 “갑옷 입고 말을 탔던 동시대의 전사들에게 특징적으로 발달한 근육형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잔 다르크’ 신화의 이면에는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프랑스 왕가의 계산이 숨어있다 신의 기적이 필요했던 프랑스 왕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성녀 만들기’ 작업에 돌입했고 적임자는 마르게리트였다 샤를 6세가 딸의 안전을 염려해 각종 무술 조기교육을 시킨 덕분이었다 전장에 나간 그는 예상치 못한 혁혁한 승리를 거뒀다 마르게리트의 배다른 오누이이자 훗날 샤를 7세로 등극한 도팽은 서출인 그가 왕권에 도전할 것을 우려해 평생 감옥에 가둬놓았다
호르벤코는 “훗날 영국에 의해 마녀로 몰려 사형당한 여성은 마르게리트가 아닌 다른 여성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성당에서 발견된 마르게리트의 유골은 50세가 넘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샤를 7세의 아들인 루이 11세의 유골과 마르게리트의 유골이 함께 매장된 것은 프랑스 왕조의 비밀을 아는 이들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참고 사항
◎ 프랑스의 왕조 변천사
Ⅰ. 메로빙거 왕조 : 프랑스 왕국의 전반기의 왕조 (481∼751)
▼
Ⅱ. 카롤링거왕조 : 메로빙거왕조를 이어 프랑크왕국의 후반을 지배한 왕조 (751∼987)
(샤를마뉴)
왕가의 계보가 대(大)피핀과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아르눌핑가(家)라고도 한다
마스강·모젤강 유역의 대토지 소유자였으나 메로빙거왕조 후기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宮宰)로서 세력을 펴나가 중(中)피핀, 카를 마르텔 때에는 다른 분국(分國)의 궁재도 겸임, 왕국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그의 아들 소(小)피핀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들 샤를마뉴는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여 로마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았으나 루트비히 1세의 사후 843년의 베르
키워드
추천자료
4·19 혁명의 특징과 전개과정에 대한 평가
4/19 혁명의 전개과정과 평가
[남북문제] 남북한 분단의 전개과정 : 분단과 통일의 변증법
한국경제의 전개과정
미국 경제 전개과정
해방 공간과 전후문학의 전개과정과 특징 <한국문학>
중국의 근대화와 양무운동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여성운동][한국여성][한국여성운동 전개과정][한국여성운동 특성][한국여성운동 전망]한국여...
파시즘의 대두와 인민전선의 전개과정을 설명하시오
미국독립운동의 원인과 전개과정
[한국민족운동사] 1930년대 농민운동 - 농민운동의 배경과 성격, 농민운동의 전개과정, 소작...
[건축역사] 일제 식민지 시대 이후의 집의 역사 - 해방이후 도시의 주거상, 주택문제 발생과 ...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