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장승
2. 장승의 기원 및 어원
3. 장승의 기능
1) 부락수호
2) 방위수호
3) 산천비보
4) 읍락비보
5) 불법수호
6) 경계표, 금표
7) 노표
8) 성문수호
9) 기자
4. 장승의 종류
1) 나무장승(목장승)
2) 돌장승(석장승)
5. 장승의 제조
1) 소재 구하기(나무)
2) 나무껍질 벗기기
3) 밑그림 그리기
4) 조각하기
5) 장승 이름 쓰기
6) 방부 처리
7) 장승 세우기
6. 장승의 특징
1) 지역별
2) 지역별명칭
3) 부위별
4) 생김새별
7. 장승의 쇠퇴
8. 장승의 복원
9. 맺음말
참고문헌
2. 장승의 기원 및 어원
3. 장승의 기능
1) 부락수호
2) 방위수호
3) 산천비보
4) 읍락비보
5) 불법수호
6) 경계표, 금표
7) 노표
8) 성문수호
9) 기자
4. 장승의 종류
1) 나무장승(목장승)
2) 돌장승(석장승)
5. 장승의 제조
1) 소재 구하기(나무)
2) 나무껍질 벗기기
3) 밑그림 그리기
4) 조각하기
5) 장승 이름 쓰기
6) 방부 처리
7) 장승 세우기
6. 장승의 특징
1) 지역별
2) 지역별명칭
3) 부위별
4) 생김새별
7. 장승의 쇠퇴
8. 장승의 복원
9.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우리는 고조선시대부터 이미 모셔왔고, 지금까지 무속이나 민속에서 중요한 신격을 차지하고 있다.
오방신장(五方神將)을 보면 동쪽은 청제장군(靑帝將軍), 서쪽은 백제장군(白帝將軍), 남쪽은 적제장군(赤帝將軍), 북쪽은 흑제장군(黑帝將軍), 중앙은 황제장군(黃帝將軍)이다. 이러한 오방신이 풍수지리에서의 비보적 역할 곧 지맥이 허한 곳을 보호하는 주력으로 마을이나 읍락을 수호하는 역할을 가진 법수, 장승에 원용되면서 ‘오방오제축귀장군(五方五帝逐鬼將軍)’ 류의 명문이 생겨났다.
3) 산천비보
산천비보란 신라 말과 고려 초에 국가 왕업의 흥망을 지덕의 성쇠가 좌우한다고 하여 산천에 절이나 불상, 탑 또는 장생표를 세워 지맥을 보허(補虛) 하는 기능을 말한다. 현존하는 산천비보의 장생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양산 통도사의 국장생 2기와 영암 도갑사의 국장생 2기 및 황장생 1기 등을 꼽을 수 있다.
4) 읍락비보
읍락이나 부락이 자리한 위치를 볼 때 3방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쪽은 물이 흘러가는 수구로 되어 있는 것이 흔히 있는 지형의 형국이다. 그런데 마을에서 들판이나 큰길이 바로 터져 보이거나, 물이 곧게 흘러 수구를 통하여 마을이 보이는 경우는 지맥이 허하다고 하였다. 이런 경우 수구가 터져 보여 허한 곳은 나무를 심어 수구를 막고, 밖에서 마을이 들여다보이는 곳은 인위적으로 산을 만들어 마을을 보호하였다. 냇가를 따라 밖으로 통하는 길 양쪽에는 수고 막이로서 법수나 장승을 세웠다. 이런 것들이 바로 읍락비보의 하나이다. 음락 비보의 명문은 대체로 ‘이진지맥(以鎭地脈)’ 곧 허한 곳을 보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5) 불법수호
호법이란 불법을 보호하는 일 곧 염불 기도에 의하여 요괴나 질역을 조복하는 일 또는 그 법력을 말하는 것이다. 호법장생이라 하면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뿐만 아니라 벽사 진경이나 유행병에 대한 방역의 임무도 갖추어야 했다. 대상도 사찰은 물론 인근 마을까지도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장군명이나 축귀방역의 성격을 띤 직함영의 장생이 세워졌으며, 순수하게 불법만을 수호하는 장생들은 오히려 그 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호법장생이라고 하여 산천비보장생과 분리하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승유억불 정책으로 탄압받은 사찰이 아예 장생(長生)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찰에서 장생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민간과 친숙해진 동기로 사찰과 인근 부락의 수호를 위하여 사찰 어귀에 신상을 세웠다. 그것이 장생(長生)에서 명칭만을 빌린 호법장생이 되었다는 추론이 있다. 부락에서 부락수호를 법수를 세우듯 조선시대 사찰에서는 경내의 수호를 위하여 호법 장생을 세우는, 새로운 장승류가 생긴 것이다.
6) 경계표, 금표
고려시대에 비보 사찰의 승려들은 국가가 부여한 사찰 영토의 면세혜택으로 그 토지를 경작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하였다. 이 때 장생은 산천비보뿐만 아니라 토지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 생긴 호법 장생도 법역, 성역이라고 하여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금표로서의 경계표기능을 맡기도 하였다. 부락 수호 법수도 부족과 부족 사이에 채집경계의 경계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7) 노표
노표 장생은 조선시대에 관로에 세워 길손에게 이정을 아리는 것이 주 임무이던 제도적 시설물이라는 점에서 법수나 장생과 차이가 있다. 읍치의 관문과 역, 참을 기점으로 10마다에 서 있었으며 명문 또한 다른 장승류와 달랐다.
노표 장생은 이정표 역학을 하였으며 도로의 수호와 여행의 안전을 보살피는 노신(路神)의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사귀나 두창신이 찾아올 것을 염려하여 무서운 신장상을 새겨서 호귀마마를 물리치기 위하여 법수의 주력을 빌리는 축귀(逐鬼)의 역할도 맡았다.
그러나 이 노표장생은 1895년에 역과 발참을 폐지하고 현대식 교통, 체신 수단이 도입됨에 따라 사라지게 되어 현재는 전혀 남아있지 않다.
8) 성문수호
옛날 부, 목, 군, 현 등의 행정기관이 있던 고을이나 군사상 중요거점인 진, 영에는 도성, 읍성 또는 진성을 쌓아 구역을 보호하였고, 성의 여러 방향에는 성문을 두어 그곳으로 사람이나 거마가 드나들게 하였다. 성문에는 수문장이 군졸을 거느리고 출입을 감시, 통제하였다. 그러나 수문장의 감시 능력이 액을 가져오는 악귀나 전염병을 퍼뜨리는 역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결국 인간 수문장의 감시 능력을 초월하는 장승, 법수, 수문장을 성문에 배치하기에 이르렀다. 제주도의 돌하르방도 성문을 지키던 장승이었다.
9) 기자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동안 가부장적 부계사회를 계승하여 왔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하기 이전 질병이나 기근에 의하여 아이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사망하여 절손의 위기에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수(壽), 부(富), 귀(貴), 와 더불어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그 신앙의 대상도 산천, 거목, 신암, 동신, 삼신당, 불상, 미륵, 장승류 등 매우 다양하다.
복합적 민간 신앙 형태를 이룬 조선시대에 와서는 부락수호나 호법의 기능을 가진 법수, 장승에게 득남을 기원하기도 했으나 기자를 주목적으로 하는 신상을 따로 세우기도 하였다. 이럴 땐 법수, 장승의 몸체를 남근형으로 만들고 머리는 관모대신 귀두로 표현하였으며, 아기를 배에 새기거나 쌍상투의 동자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하였다.
4. 장승의 종류
1) 나무장승(목장승)
주로 소나무를 사용하지만 부패로 6,7년이 한도이고 이후에는 교체해줘야 한다. 그런데 밤나무 장승은 수십년을 견딘다. 실제로 승주 선암사 입구의 밤나무로 된 장승은 80년이 넘게 노천에 서 있다. 때로는 부패 방지를 위해 표면을 태우거나 황토를 바르는 경우도 있으며 돌무더기에 꽂아 세우는 방법은 배수를 도와주고 거꾸로 제작하면 보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으로, 나란히 서 있거나 길을 마주하고 서 있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방위(方位)를 표시하는 남방적제축귀대장군(南方赤帝逐鬼大將軍)이나 북방흑제축귀대장군이라고 복판(腹板)에 묵서(墨書)를 하며, 또는 얼굴 부분을 붉은색으로 칠을 해서 사귀(邪鬼)를
오방신장(五方神將)을 보면 동쪽은 청제장군(靑帝將軍), 서쪽은 백제장군(白帝將軍), 남쪽은 적제장군(赤帝將軍), 북쪽은 흑제장군(黑帝將軍), 중앙은 황제장군(黃帝將軍)이다. 이러한 오방신이 풍수지리에서의 비보적 역할 곧 지맥이 허한 곳을 보호하는 주력으로 마을이나 읍락을 수호하는 역할을 가진 법수, 장승에 원용되면서 ‘오방오제축귀장군(五方五帝逐鬼將軍)’ 류의 명문이 생겨났다.
3) 산천비보
산천비보란 신라 말과 고려 초에 국가 왕업의 흥망을 지덕의 성쇠가 좌우한다고 하여 산천에 절이나 불상, 탑 또는 장생표를 세워 지맥을 보허(補虛) 하는 기능을 말한다. 현존하는 산천비보의 장생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양산 통도사의 국장생 2기와 영암 도갑사의 국장생 2기 및 황장생 1기 등을 꼽을 수 있다.
4) 읍락비보
읍락이나 부락이 자리한 위치를 볼 때 3방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쪽은 물이 흘러가는 수구로 되어 있는 것이 흔히 있는 지형의 형국이다. 그런데 마을에서 들판이나 큰길이 바로 터져 보이거나, 물이 곧게 흘러 수구를 통하여 마을이 보이는 경우는 지맥이 허하다고 하였다. 이런 경우 수구가 터져 보여 허한 곳은 나무를 심어 수구를 막고, 밖에서 마을이 들여다보이는 곳은 인위적으로 산을 만들어 마을을 보호하였다. 냇가를 따라 밖으로 통하는 길 양쪽에는 수고 막이로서 법수나 장승을 세웠다. 이런 것들이 바로 읍락비보의 하나이다. 음락 비보의 명문은 대체로 ‘이진지맥(以鎭地脈)’ 곧 허한 곳을 보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5) 불법수호
호법이란 불법을 보호하는 일 곧 염불 기도에 의하여 요괴나 질역을 조복하는 일 또는 그 법력을 말하는 것이다. 호법장생이라 하면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뿐만 아니라 벽사 진경이나 유행병에 대한 방역의 임무도 갖추어야 했다. 대상도 사찰은 물론 인근 마을까지도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장군명이나 축귀방역의 성격을 띤 직함영의 장생이 세워졌으며, 순수하게 불법만을 수호하는 장생들은 오히려 그 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호법장생이라고 하여 산천비보장생과 분리하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승유억불 정책으로 탄압받은 사찰이 아예 장생(長生)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찰에서 장생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민간과 친숙해진 동기로 사찰과 인근 부락의 수호를 위하여 사찰 어귀에 신상을 세웠다. 그것이 장생(長生)에서 명칭만을 빌린 호법장생이 되었다는 추론이 있다. 부락에서 부락수호를 법수를 세우듯 조선시대 사찰에서는 경내의 수호를 위하여 호법 장생을 세우는, 새로운 장승류가 생긴 것이다.
6) 경계표, 금표
고려시대에 비보 사찰의 승려들은 국가가 부여한 사찰 영토의 면세혜택으로 그 토지를 경작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하였다. 이 때 장생은 산천비보뿐만 아니라 토지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 생긴 호법 장생도 법역, 성역이라고 하여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금표로서의 경계표기능을 맡기도 하였다. 부락 수호 법수도 부족과 부족 사이에 채집경계의 경계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7) 노표
노표 장생은 조선시대에 관로에 세워 길손에게 이정을 아리는 것이 주 임무이던 제도적 시설물이라는 점에서 법수나 장생과 차이가 있다. 읍치의 관문과 역, 참을 기점으로 10마다에 서 있었으며 명문 또한 다른 장승류와 달랐다.
노표 장생은 이정표 역학을 하였으며 도로의 수호와 여행의 안전을 보살피는 노신(路神)의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사귀나 두창신이 찾아올 것을 염려하여 무서운 신장상을 새겨서 호귀마마를 물리치기 위하여 법수의 주력을 빌리는 축귀(逐鬼)의 역할도 맡았다.
그러나 이 노표장생은 1895년에 역과 발참을 폐지하고 현대식 교통, 체신 수단이 도입됨에 따라 사라지게 되어 현재는 전혀 남아있지 않다.
8) 성문수호
옛날 부, 목, 군, 현 등의 행정기관이 있던 고을이나 군사상 중요거점인 진, 영에는 도성, 읍성 또는 진성을 쌓아 구역을 보호하였고, 성의 여러 방향에는 성문을 두어 그곳으로 사람이나 거마가 드나들게 하였다. 성문에는 수문장이 군졸을 거느리고 출입을 감시, 통제하였다. 그러나 수문장의 감시 능력이 액을 가져오는 악귀나 전염병을 퍼뜨리는 역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결국 인간 수문장의 감시 능력을 초월하는 장승, 법수, 수문장을 성문에 배치하기에 이르렀다. 제주도의 돌하르방도 성문을 지키던 장승이었다.
9) 기자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동안 가부장적 부계사회를 계승하여 왔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하기 이전 질병이나 기근에 의하여 아이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사망하여 절손의 위기에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수(壽), 부(富), 귀(貴), 와 더불어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그 신앙의 대상도 산천, 거목, 신암, 동신, 삼신당, 불상, 미륵, 장승류 등 매우 다양하다.
복합적 민간 신앙 형태를 이룬 조선시대에 와서는 부락수호나 호법의 기능을 가진 법수, 장승에게 득남을 기원하기도 했으나 기자를 주목적으로 하는 신상을 따로 세우기도 하였다. 이럴 땐 법수, 장승의 몸체를 남근형으로 만들고 머리는 관모대신 귀두로 표현하였으며, 아기를 배에 새기거나 쌍상투의 동자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하였다.
4. 장승의 종류
1) 나무장승(목장승)
주로 소나무를 사용하지만 부패로 6,7년이 한도이고 이후에는 교체해줘야 한다. 그런데 밤나무 장승은 수십년을 견딘다. 실제로 승주 선암사 입구의 밤나무로 된 장승은 80년이 넘게 노천에 서 있다. 때로는 부패 방지를 위해 표면을 태우거나 황토를 바르는 경우도 있으며 돌무더기에 꽂아 세우는 방법은 배수를 도와주고 거꾸로 제작하면 보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으로, 나란히 서 있거나 길을 마주하고 서 있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방위(方位)를 표시하는 남방적제축귀대장군(南方赤帝逐鬼大將軍)이나 북방흑제축귀대장군이라고 복판(腹板)에 묵서(墨書)를 하며, 또는 얼굴 부분을 붉은색으로 칠을 해서 사귀(邪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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