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쌀> 쌀과 우리생활 - 벼의 기원과 전래, 농기구 발전과 소사용, 이앙법, 일제강점기의 수탈, 박정희 대통령 중 쌀의 입지, 우르과이라운드, 한미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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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사] <쌀> 쌀과 우리생활 - 벼의 기원과 전래, 농기구 발전과 소사용, 이앙법, 일제강점기의 수탈, 박정희 대통령 중 쌀의 입지, 우르과이라운드, 한미FTA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벼의 기원과 그 전래
 1) 벼의 기원
 2) 우리나라로 전파 된 벼

2. 농기구 발전과 소사용
 1) 농기구의 발전과 소사용
 2) 농기구의 종류
 3) 영향

3. 이앙법
 1) 이앙법의 정의
 2) 이앙법의 장점
 3) 이앙법의 영향

4. 일제강점기의 수탈
 1) 토지조사사업
 2) 산미증식계획
 3) 공출

5.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간 중 쌀의 입지
 1) 혼․분식 장려
 2) 통일벼

6. 우르과이라운드, 한·미 FTA
 1) 우르과이라운드
 2) 한·미 FTA

참고문헌

본문내용

경우보다도 많은 농산물은 수출산업 상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농산물 수출은 미국 농민의 소득과 국제수지에 크게 기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미국은 시장의 판로 개척을 위해 처음에는 원조로 우리 나라에 농산물을 수출했던 것이다. 저곡가 정책과 함께 미국의 원조라는 이해가 맞물리면서 양곡을 수입하게 되었다. 보다 싸게 음식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단지 밀가루만 수입한다고 해서 밥맛에 길들여져 온 우리국민들의 입맛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정책적으로 밀 소비를 촉진시키는 이른바 분식 장려 운동을 벌려나가기 시작했다.
2) 통일벼
1971년에 키가 작고 줄기가 단단하여 잘 쓰러지지 않는 벼를 만들어 냈다. 이 벼는 이삭이 크고 이삭 당 벼 알이 많이 달려 소출이 많이 나면서 우리나라 일반 벼의 취약점인 목도열병과 멸구에 매우 강했다. 그러나 쌀이 푸석푸석해 밥맛이 없고 찰기가 적어 우리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또 볏짚의 길이가 짧고 억세 사료와 연료용 밖에 쓸 수가 없었다. 이러한 단점은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농민들에게 퍼졌다.
일반미 속칭 ‘아끼바리’라 불린 일반 벼는 밥맛이 좋고 매우 찰졌다. 또 볏짚의 길이가 길어 소의 사료로부터 초가지붕, 가마니, 멍석, 새끼, 등으로 다양하게 이용하는 농촌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재료였다. 이러다 보니 농민들은 통일벼보다는 자연히 일반 벼를 선호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통일벼를 심으라고 홍보를 해봤자 소용이 없자 강제성을 띄게 되었다. 군마다 면마다 집집마다 할당된 목표치가 정해지고 공무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농가를 돌며 다그쳤다. 온통 통일벼 행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들판에는 공무원들과 농민들이 통일벼 재배를 놓고 고성이 오고가고 심하면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통일벼를 뿌리지 않는다고 일반볍씨를 빼앗으려는 공무원과 빼앗기지 않으려고 벌이는 설전은 한마디로 보기 드문 진풍경이었다.
이런 공무원들의 등쌀에 못 이겨 통일벼가 전국적으로 심어졌다. 마을 회관에는 증산목표량이 큼지 막하게 붙었다. 붉은 펜으로 목표달성 그래프를 그렸다. 푸짐한 상금을 걸고 군마다 면마다 증산왕을 뽑았다. 가을이 되면 공무원들이 일일이 들판을 누비며 벼 알을 세고 단위 면적당 소출량을 파악했다. 한마디로 피나는 식량증산 운동이었다.
그때 당시 우리나라 농촌의 집들은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통일벼를 반강제적으로 심다보니 지붕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렇다 보니 곳곳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농림장관 이었던 김보현이 벼 짚이 짧아 지붕 이엉을 엮을 수 없다고 농민들의 애로사항을 박대통령에 보고했다가 심한 타박만 당했다. 박대통령은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 지붕이 중요하다 말이요, 지붕을 개량하면 되지 무슨 소리냐 한마디로 일축했다. 권력자의 말 한마디는 농촌 지붕도 초가집에서 슬레이트나 기와집으로 바뀌면서 신속하게 변해갔다.
우여곡절 끝에 통일벼는 우리농가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그 후 이 품종이 지닌 단점을 보완시킨 유신·밀양 23호·금강 벼·밀양 30호 품종 등 많은 통일형우량 품종들이 연이어 개발 보급됨으로써 1976년에 오랜 숙원이었던 주곡의 자급달성을 이루게 되었다.
쌀 생산량은 1966년 392만t에서 1976년 521만t(3621만석)으로 대폭 증가하였고 1977년에는 쌀 생산량 4천만석을 돌파해 세계 최고 다수확국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1978년에도 이들 통일형 품종들이 전체 벼 재배면적의 76% 이상을 점유하게 되면서 연이어 쌀 생산량 4천만석을 돌파했다. 그야말로 "녹색혁명"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수확량도 1966년 287kg에서 1988년 481kg 거의 배 가까이 늘었다.
6. 우르과이라운드, 한·미 FTA
1) 우르과이라운드
우르과이에서 개최된 다자간 무역협상으로 각 국가의 입장에 따라 대상국을 정하여 개방을 요구하는 합의 하는 자리였다. 이때 우리나라는 쌀 시장을 개방하게 된다.
2) 한·미 FTA
국가간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모든 무역장벽을 제거 시키는 협정. 당장의 경제성장을 쫓다가 농산물 시장을 전면 개방하게 되면 우리나라의 농업시장이 붕괴하게 되어 식량을 전적으로 미국에 의지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식량을 무기로 하는 식량의 무기화가 진행 될 수도 있다.
참고문헌
공준원 저, 우리 쌀 오천년, 우인북스 2014
백명식 저, 위대한 쌀과 밥, 씽크스마트 2011
최해춘 저, 쌀을 알자, 신구문화사 1997
이춘녕 저, 쌀과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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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7.01
  • 저작시기2014.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27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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