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옷의 기원
1) 신체보호설
2) 정숙설(=수치설)
3) 유인설(=이성흡인설, 비정숙설)
4) 신체장식설
2. 조선시대 여성의 옷
1) 저고리
2) 치마
3) 장옷
4) 쓰개치마
5) 개짐
6) 속옷
3. 조선시대 남성의 옷
1) 바지
2) 두루마기
3) 철릭
참고문헌
1) 신체보호설
2) 정숙설(=수치설)
3) 유인설(=이성흡인설, 비정숙설)
4) 신체장식설
2. 조선시대 여성의 옷
1) 저고리
2) 치마
3) 장옷
4) 쓰개치마
5) 개짐
6) 속옷
3. 조선시대 남성의 옷
1) 바지
2) 두루마기
3) 철릭
참고문헌
본문내용
것이 수구(소맷부리)를 약간 좁힌 곡선이 되었다.
2) 치마
치마는 저고리의 아래에 입는 여성의 하의로 유동적인 곡선미가 뛰어난 옷으로 형태는 치마의 몸체와 허리띠, 끈으로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고 그 모습은 허리에서 부터 치마끝단에 이르기까지 잔주름이 있고 밑에는 선이 물러제 있었다. 치마의 폭은 평면의 천을 이용하여 그대로 쓰지만 상부에 주름을 잘게 잡아 허리띠의 속으로 집어넣는다.
입을 때는 앞에서 둘러 입고 뒤에서 한 쪽으로 여며지게 하여 끈으로 묶으며 치마의 폭은 그대로 풍성하게 둥근 분위기를 나타낸다. 특히 치마의 형태는 잘게 잡혀진 주름이 아래로 수직적인 분위기를 주며 허리띠의 색을 흰 것으로 하여 치마색을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만드는 방법에 따라 홑치마, 겹치마, 누비치마가 있다. 그리고 모양에 따라 뒤를 여미고 입는 풀치마와 뒤가 막힌 통치마가 있다. 그 밖에 예복용인 스란치마와 대란치마, 일할 때 입는 앞치마가 있으며, 겉치마 밑에 받쳐입는 속치마와 무기치마가 있다. 또한 치마는 폭이 넓어 우리나라의 온돌생활에 적합한 기능성이 있는 반면 뒷 중심 여밈이 열리게 돼 있어 활동하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기품있고 우아한 멋을 더해준다.
저고리에 비해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저고리 길이에 따라 허리나 가슴으로 올라오게 착용하였다. 한편 우리 선조의 미감이 세계 어디보다 더 뛰어났음을 알려 주는 상류층 여인 예복 치마들이 발견되었다. 19세기에 서양에서 유행한 밧슬 스타일의 치마가 우리 나라에서는 16세기에 이미 착용되었던 것이다.
3) 장옷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던 쓰개의 하나로 초기에는 서민 부녀자들만 사용했고, 후기로 오면서 양반집 부녀자들도 착용했으나 개화기를 맞아 여성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전체적으로는 두루마기의 형태와 같으나 옷깃, 옷고름, 겨드랑이의 삼각무 등이 다른 색으로 되어 있다. 유물로 남아 있는 장옷은 초록색 길에 깃과 고름은 자주색이고 소매 끝에 흰색의 거들지가 있다. 외출할 때는 앞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마 위에서 턱 아래로 둘러 고름 부분을 잡을 뿐 소매를 팔에 끼우지 않는다. 조선 후기 장옷의 모습은 신윤복이나 김홍도의 풍속화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능화는 〈조선여속고 朝鮮女俗考〉에서 \"평민의 처는 장옷을 썼다. 장옷은 초록색 명주로 지은 긴 옷으로 머리와 낯을 가리며 종아리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이 장옷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기록에 없으니 알 수 없다\"고 했으나, 두루마기가 후기에 여자의 쓰개장옷으로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부녀자들의 장옷 착용 풍습은 나이에 관계없이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 듯하며, 한말에 우라나라를 방문했던 제임스 게일은 〈코리언 스케치〉에서 \"아줌마는 지금 예순 살이지만 아직도 거리를 다닐 때는 처녀와 마찬가지로 장옷을 입는다\"고 적고 있다. 엄격한 내외법(內外法)의 전통사회에서 비롯된 장옷 풍습이 개화기 직전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에서는 1960년대까지 혼례 때 장옷을 원삼·활옷 대신 입었고, 상례 때 수의로도 입었다. 더러움을 방지하기 위해서 동정 대신 넓은 흰 헝겊을 대어 이마 위 정수리에 닿도록 하였다. 앞에는 여미는 단추를 달았고 이중고름을 양쪽에 달았다.
- 덕온공주의 장옷(중요민속자료 제211-3호)
조선 23대왕인 순조의 3째딸 덕온 공주(1822∼1844)의 옷으로 그녀의 손녀인 윤백영 여사가 보관해 오던 것이다. 그 중에서 장옷은 여인들이 나들이 할 때 머리에 써서 몸을 가리던 옷으로 녹색 비단에 흰모시를 넣은 겹옷이다. 자주색의 깃 위에 흰 명주로 동정을 달았으며 겉깃 쪽에는 고름을 크게 달았다. 겨드랑이 부분에는 자주색비단으로 작은 삼각의 무가 있고 소매끝에는 흰색 한삼이 있다. 착용시에는 아래 부분이 벌어지지 않게 넉넉하게 품을 두었다. 이 옷은 공주의 것으로 조선말 왕실 의생활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 쓰개치마
한국의 옛날 양반계급 여성들이 바깥 출입을 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쓰개. 조선시대부터 너울(羅兀) 대신 간편하게 착용한 것으로 1930년대까지 흔히 볼 수 있었다. 형태는 치마와 같으나 길이가 치마보다 30cm정도 짧고 폭도 좁다. 개성지방에서는 \'쓸치마\'라고 하여, 특별히 옥양목이나 명주로 만들었고, 계절에 따라 겹이나 솜을 두기도 하였다.
중종 21년 2월, 사족부녀의 장옷 착용이 문제가 되자 상류층에서 사용하던 너울 대신 간편함을
2) 치마
치마는 저고리의 아래에 입는 여성의 하의로 유동적인 곡선미가 뛰어난 옷으로 형태는 치마의 몸체와 허리띠, 끈으로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고 그 모습은 허리에서 부터 치마끝단에 이르기까지 잔주름이 있고 밑에는 선이 물러제 있었다. 치마의 폭은 평면의 천을 이용하여 그대로 쓰지만 상부에 주름을 잘게 잡아 허리띠의 속으로 집어넣는다.
입을 때는 앞에서 둘러 입고 뒤에서 한 쪽으로 여며지게 하여 끈으로 묶으며 치마의 폭은 그대로 풍성하게 둥근 분위기를 나타낸다. 특히 치마의 형태는 잘게 잡혀진 주름이 아래로 수직적인 분위기를 주며 허리띠의 색을 흰 것으로 하여 치마색을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만드는 방법에 따라 홑치마, 겹치마, 누비치마가 있다. 그리고 모양에 따라 뒤를 여미고 입는 풀치마와 뒤가 막힌 통치마가 있다. 그 밖에 예복용인 스란치마와 대란치마, 일할 때 입는 앞치마가 있으며, 겉치마 밑에 받쳐입는 속치마와 무기치마가 있다. 또한 치마는 폭이 넓어 우리나라의 온돌생활에 적합한 기능성이 있는 반면 뒷 중심 여밈이 열리게 돼 있어 활동하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기품있고 우아한 멋을 더해준다.
저고리에 비해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저고리 길이에 따라 허리나 가슴으로 올라오게 착용하였다. 한편 우리 선조의 미감이 세계 어디보다 더 뛰어났음을 알려 주는 상류층 여인 예복 치마들이 발견되었다. 19세기에 서양에서 유행한 밧슬 스타일의 치마가 우리 나라에서는 16세기에 이미 착용되었던 것이다.
3) 장옷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던 쓰개의 하나로 초기에는 서민 부녀자들만 사용했고, 후기로 오면서 양반집 부녀자들도 착용했으나 개화기를 맞아 여성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전체적으로는 두루마기의 형태와 같으나 옷깃, 옷고름, 겨드랑이의 삼각무 등이 다른 색으로 되어 있다. 유물로 남아 있는 장옷은 초록색 길에 깃과 고름은 자주색이고 소매 끝에 흰색의 거들지가 있다. 외출할 때는 앞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마 위에서 턱 아래로 둘러 고름 부분을 잡을 뿐 소매를 팔에 끼우지 않는다. 조선 후기 장옷의 모습은 신윤복이나 김홍도의 풍속화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능화는 〈조선여속고 朝鮮女俗考〉에서 \"평민의 처는 장옷을 썼다. 장옷은 초록색 명주로 지은 긴 옷으로 머리와 낯을 가리며 종아리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이 장옷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기록에 없으니 알 수 없다\"고 했으나, 두루마기가 후기에 여자의 쓰개장옷으로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부녀자들의 장옷 착용 풍습은 나이에 관계없이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 듯하며, 한말에 우라나라를 방문했던 제임스 게일은 〈코리언 스케치〉에서 \"아줌마는 지금 예순 살이지만 아직도 거리를 다닐 때는 처녀와 마찬가지로 장옷을 입는다\"고 적고 있다. 엄격한 내외법(內外法)의 전통사회에서 비롯된 장옷 풍습이 개화기 직전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에서는 1960년대까지 혼례 때 장옷을 원삼·활옷 대신 입었고, 상례 때 수의로도 입었다. 더러움을 방지하기 위해서 동정 대신 넓은 흰 헝겊을 대어 이마 위 정수리에 닿도록 하였다. 앞에는 여미는 단추를 달았고 이중고름을 양쪽에 달았다.
- 덕온공주의 장옷(중요민속자료 제211-3호)
조선 23대왕인 순조의 3째딸 덕온 공주(1822∼1844)의 옷으로 그녀의 손녀인 윤백영 여사가 보관해 오던 것이다. 그 중에서 장옷은 여인들이 나들이 할 때 머리에 써서 몸을 가리던 옷으로 녹색 비단에 흰모시를 넣은 겹옷이다. 자주색의 깃 위에 흰 명주로 동정을 달았으며 겉깃 쪽에는 고름을 크게 달았다. 겨드랑이 부분에는 자주색비단으로 작은 삼각의 무가 있고 소매끝에는 흰색 한삼이 있다. 착용시에는 아래 부분이 벌어지지 않게 넉넉하게 품을 두었다. 이 옷은 공주의 것으로 조선말 왕실 의생활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 쓰개치마
한국의 옛날 양반계급 여성들이 바깥 출입을 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쓰개. 조선시대부터 너울(羅兀) 대신 간편하게 착용한 것으로 1930년대까지 흔히 볼 수 있었다. 형태는 치마와 같으나 길이가 치마보다 30cm정도 짧고 폭도 좁다. 개성지방에서는 \'쓸치마\'라고 하여, 특별히 옥양목이나 명주로 만들었고, 계절에 따라 겹이나 솜을 두기도 하였다.
중종 21년 2월, 사족부녀의 장옷 착용이 문제가 되자 상류층에서 사용하던 너울 대신 간편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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