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2. 시대적 배경
3. 사계의 생애와 학문경향
1) 사계의 생애
2) 학문태도와 저술
4. 禮의 본래적 의미
5. 朱子家禮 전래 이전의 禮
6. 朱子家禮 전래 이후의 禮
7. 沙溪의 家禮에 대한 이해
8. 正統에 대한 이해
8. 正統의 典禮上의 具現
1) 稱號問題
2) 追崇入廟의 문제
3) 服制問題
9. 맺음말
2. 시대적 배경
3. 사계의 생애와 학문경향
1) 사계의 생애
2) 학문태도와 저술
4. 禮의 본래적 의미
5. 朱子家禮 전래 이전의 禮
6. 朱子家禮 전래 이후의 禮
7. 沙溪의 家禮에 대한 이해
8. 正統에 대한 이해
8. 正統의 典禮上의 具現
1) 稱號問題
2) 追崇入廟의 문제
3) 服制問題
9. 맺음말
본문내용
세우고 四書와 五經을 배우게 하였다. 여기에서 소학과 가례를 먼저 배우도록 한 것은 修身을 하고 집을 다스리는데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全書 p.815, 卷 45, 附錄, 修身齊家 莫切於家禮小學
이것은 예를 실천하는 주체로서 개인의 수신을 중요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소학과 가례에 이어 심경과 근사록을 배우도록 한 것은 마음을 다스려 학문에 나아가게 하는 데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全書 p.815, 卷 45, 附錄, 治心進學 莫要於心經近思錄
그는 「율곡은 博文에는 공이 많으나 約禮에 있어서는 오히려 지극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全書 p.814, 卷 45, 附錄, 余所見 栗谷於博文之功最多 而於約禮 猶所未至也
이것은 그가 예를 의식적으로 중요시하여 실천하려고 하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경연에서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근본은 먼저 敬을 주로 하여야 한다. 屋漏(神)에게 부끄럽지 않은 공부가 가장 중요하다. 全書 p.791, 卷 43, 附錄 爲學之本 先主於敬 不愧屋漏工夫最緊要也
고 하여 공부를 함에 마음을 다스리는 敬공부를 중요시하였다. 敬공부는 행동 하나하나에 잘못됨이 없이 조심을 하여 남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窮理에 있어서도 철저하였다. 經書辯疑序에 보면 「경전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고 여러 선생들의 설에도 의심나는 것이 있어 그때마다 적어놓고 공부하는 자료로 삼았더니 어떤 이가 묻기를 先正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데 의론을 하는 것을 불가하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답하기를 의리를 논하는 것은 천하의 공공한 일이고 선현도 허락한 것이다. ...... 제공과 더불어 토론을 하여 시비를 바르게 하고자 할 뿐이니 무엇이 해롭겠는가 ?」『沙溪 愼獨齋 全書』,권 5, 經書辯疑序, p.78 : 其所讀經典 多所未解 且於諸先生之說 時有所疑 不敢强從 幷皆隨手箚記 以資省閱 或問之曰 先正訓解 後學所當尊信 乃敢有議論於其間 無乃不可乎 余曰議論義理 乃天下公共之事 先賢亦許之 .....欲與諸公議論商訂 以正其是非而已 又何害也
라고 하였다. 이것은 선생의 말이라도 의심이 나면 그대로 따르지 않고 오래 생각을 하여 완전하게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헌고증에 있어서는 의리를 탐구하고 제가의 설을 고증하고 師友간에 강론을 할 때에도 문인의 설이라 할지라도 그 장점을 버리지 않고 경서변의에 기록을 하였다.
張溪谷은 사계의 학문하는 태도를 말하기를
세상에 글읽는 사람이 많지만 능히 의문점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은 배우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한 후에 의심이 있고 의심이 있은 후에 문변이 있는 것이다. 문변이 있은 후에 행동으로 옮길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논어의 切問近思의 뜻이니 사계는 이같은 태도를 지녔다. 沙溪 愼獨齋 全書, 卷 50, 附錄, 經書辯疑跋, p. 898 : 世之學者誰不讀書 鮮有能知疑者 此無他 學而不思也 思而後有疑 有疑而有問辯 問辯有得而後 推之於行 此古之所謂切問近思 先生有焉
라고 하였다.
행장에는 「선생은 평생 저술에 종사하지 않았으나 독서를 하다가 의심나는 것을 기록한 經書辯疑 8권, 近思錄釋疑 1권, 疑禮問解 8권 및 書疏雜錄 약간권이 있고 家禮輯覽 3권 喪禮備要 1권이 있으니 상례비요는 간행된지 오래되어 먼지방이나 시골집에서도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다. ...... 선생은 평소에 예에 가장 관심을 가졌다.」 沙溪 愼獨齋 全書, 卷 48, 附錄, 行狀, p. 867 : 先生平生不事著述 每讀書輒記所疑 有經書辯疑八卷 近思錄釋疑一卷 儀禮問解八卷 書疏雜錄若干卷 藏于家 又有刪定申義慶所編家禮輯覽三卷 喪禮備要一卷 備要則刊行已久 雖遐方委巷無不遵用焉...先生平生用力 最多於禮學也
라고 하니 그가 예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저술목록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현존하는 沙溪全書는 1687년 숙종 13년에 간행된 예각구본과 1792년 정조 16년 사계의 후손인 金熹가 목각본으로 간행한 壬子 개각본이 있다. 그후 1922년 全書로 개칭을 하고 사계 신독재 양선생에 관련된 저술을 망라하여 목판본으로 출간하였으니 총 51권 24책이다.
사계는 51세에 近思錄釋疑를 완성하였다. 근사록은 그가 13세에 송구봉을 만나 배우기 시작하여 82세 鄭時晦著 近思錄釋疑의 서문을 지을 때까지 평생을 두고 연구한 책으로 그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알 수 있는 책이다. 경서변의는 사계가 71세에 완성을 한 것으로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서경, 주역, 예기등 유가경전 전반에 걸쳐 제가의 설을 취사하여 해설한 책이다. 예에 관한 책으로는 家禮輯覽, 疑禮問解, 喪禮備要, 典禮問答등이 있는데 이 책들에서는 사계의 예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다. 그밖에 書疏雜錄, 筵席問對에서는 그의 국가경륜과 성리철학과 예학에 대한 논변을 볼 수가 있다.
4. 禮의 본래적 의미
유학에 있어서 仁과 義는 도덕적인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라면 예는 올바른 행위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예는 仁하고 義로운 것이어야 하지만 인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라고 하는 바른 방법을 통하여 표현이 되어지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사회가 복잡하여지고 다양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게되면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객관적인 행위의 기준이 더욱 요청이 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예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인 배경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던 삶의 지혜가 담겨있기도 하고 한 민족이나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토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禮는 示와 豊을 합하여 만든 會意文字인대 說文解字에서는 이것을 해석하여 “示는 天文을 살펴서 신의 계시를 받는 것이고, 豊은 예를 행하는 祭器”라고 하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예의 원의는 上天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신을 섬기는 종교적인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인 의례가 시대에 따라서 합리화한 것이 사회적 관습과 규범으로서 예가 되었고 이것은 종교적 의례로부터 그 사회적 합리성이 점차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예기에서는 “도덕과 인의는 예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이것은 예를 실천하는 주체로서 개인의 수신을 중요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소학과 가례에 이어 심경과 근사록을 배우도록 한 것은 마음을 다스려 학문에 나아가게 하는 데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全書 p.815, 卷 45, 附錄, 治心進學 莫要於心經近思錄
그는 「율곡은 博文에는 공이 많으나 約禮에 있어서는 오히려 지극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全書 p.814, 卷 45, 附錄, 余所見 栗谷於博文之功最多 而於約禮 猶所未至也
이것은 그가 예를 의식적으로 중요시하여 실천하려고 하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경연에서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근본은 먼저 敬을 주로 하여야 한다. 屋漏(神)에게 부끄럽지 않은 공부가 가장 중요하다. 全書 p.791, 卷 43, 附錄 爲學之本 先主於敬 不愧屋漏工夫最緊要也
고 하여 공부를 함에 마음을 다스리는 敬공부를 중요시하였다. 敬공부는 행동 하나하나에 잘못됨이 없이 조심을 하여 남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窮理에 있어서도 철저하였다. 經書辯疑序에 보면 「경전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고 여러 선생들의 설에도 의심나는 것이 있어 그때마다 적어놓고 공부하는 자료로 삼았더니 어떤 이가 묻기를 先正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데 의론을 하는 것을 불가하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답하기를 의리를 논하는 것은 천하의 공공한 일이고 선현도 허락한 것이다. ...... 제공과 더불어 토론을 하여 시비를 바르게 하고자 할 뿐이니 무엇이 해롭겠는가 ?」『沙溪 愼獨齋 全書』,권 5, 經書辯疑序, p.78 : 其所讀經典 多所未解 且於諸先生之說 時有所疑 不敢强從 幷皆隨手箚記 以資省閱 或問之曰 先正訓解 後學所當尊信 乃敢有議論於其間 無乃不可乎 余曰議論義理 乃天下公共之事 先賢亦許之 .....欲與諸公議論商訂 以正其是非而已 又何害也
라고 하였다. 이것은 선생의 말이라도 의심이 나면 그대로 따르지 않고 오래 생각을 하여 완전하게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헌고증에 있어서는 의리를 탐구하고 제가의 설을 고증하고 師友간에 강론을 할 때에도 문인의 설이라 할지라도 그 장점을 버리지 않고 경서변의에 기록을 하였다.
張溪谷은 사계의 학문하는 태도를 말하기를
세상에 글읽는 사람이 많지만 능히 의문점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은 배우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한 후에 의심이 있고 의심이 있은 후에 문변이 있는 것이다. 문변이 있은 후에 행동으로 옮길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논어의 切問近思의 뜻이니 사계는 이같은 태도를 지녔다. 沙溪 愼獨齋 全書, 卷 50, 附錄, 經書辯疑跋, p. 898 : 世之學者誰不讀書 鮮有能知疑者 此無他 學而不思也 思而後有疑 有疑而有問辯 問辯有得而後 推之於行 此古之所謂切問近思 先生有焉
라고 하였다.
행장에는 「선생은 평생 저술에 종사하지 않았으나 독서를 하다가 의심나는 것을 기록한 經書辯疑 8권, 近思錄釋疑 1권, 疑禮問解 8권 및 書疏雜錄 약간권이 있고 家禮輯覽 3권 喪禮備要 1권이 있으니 상례비요는 간행된지 오래되어 먼지방이나 시골집에서도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다. ...... 선생은 평소에 예에 가장 관심을 가졌다.」 沙溪 愼獨齋 全書, 卷 48, 附錄, 行狀, p. 867 : 先生平生不事著述 每讀書輒記所疑 有經書辯疑八卷 近思錄釋疑一卷 儀禮問解八卷 書疏雜錄若干卷 藏于家 又有刪定申義慶所編家禮輯覽三卷 喪禮備要一卷 備要則刊行已久 雖遐方委巷無不遵用焉...先生平生用力 最多於禮學也
라고 하니 그가 예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저술목록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현존하는 沙溪全書는 1687년 숙종 13년에 간행된 예각구본과 1792년 정조 16년 사계의 후손인 金熹가 목각본으로 간행한 壬子 개각본이 있다. 그후 1922년 全書로 개칭을 하고 사계 신독재 양선생에 관련된 저술을 망라하여 목판본으로 출간하였으니 총 51권 24책이다.
사계는 51세에 近思錄釋疑를 완성하였다. 근사록은 그가 13세에 송구봉을 만나 배우기 시작하여 82세 鄭時晦著 近思錄釋疑의 서문을 지을 때까지 평생을 두고 연구한 책으로 그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알 수 있는 책이다. 경서변의는 사계가 71세에 완성을 한 것으로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서경, 주역, 예기등 유가경전 전반에 걸쳐 제가의 설을 취사하여 해설한 책이다. 예에 관한 책으로는 家禮輯覽, 疑禮問解, 喪禮備要, 典禮問答등이 있는데 이 책들에서는 사계의 예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다. 그밖에 書疏雜錄, 筵席問對에서는 그의 국가경륜과 성리철학과 예학에 대한 논변을 볼 수가 있다.
4. 禮의 본래적 의미
유학에 있어서 仁과 義는 도덕적인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라면 예는 올바른 행위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예는 仁하고 義로운 것이어야 하지만 인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라고 하는 바른 방법을 통하여 표현이 되어지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사회가 복잡하여지고 다양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게되면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객관적인 행위의 기준이 더욱 요청이 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예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인 배경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던 삶의 지혜가 담겨있기도 하고 한 민족이나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토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禮는 示와 豊을 합하여 만든 會意文字인대 說文解字에서는 이것을 해석하여 “示는 天文을 살펴서 신의 계시를 받는 것이고, 豊은 예를 행하는 祭器”라고 하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예의 원의는 上天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신을 섬기는 종교적인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인 의례가 시대에 따라서 합리화한 것이 사회적 관습과 규범으로서 예가 되었고 이것은 종교적 의례로부터 그 사회적 합리성이 점차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예기에서는 “도덕과 인의는 예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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