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없음.
본문내용
으로 해산시키면서, 본격적으로 탄압에 들어갔다. 9월 들어 언론의 이념공세와, 파업 농성장 경찰력 투입으로 농성장을 해산하고 구속시키는 등 대대적인 진압공세를 펼쳤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6월민주항쟁에 영향을 받은 노동자대중이 노예적 삶을 박차고 생존권의 민주주의를 찾기 위해 일어선 해방후 최대규모의 노동자투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대중내의 연대투쟁도 활발했지만 이에 못지 않게 노학연대 투쟁도 활발하였다. 실제 파업투쟁의 현장에서 학생들의 지원투쟁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이는 노동자들의 토론속에서 노동대중은 학생운동의 정당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형제애적 연대의식을 갖게 되었다.
78월 투쟁시기의 노학연대 활동은 노동자 내부의 연대활동보다도 그리고 다른 어떤 시기의 연대활동보다도 소극적이었다. 학생운동조직 자체가 보다 통일적이고 조직적인 연합을 이뤄내지 못한 점은 629선언이후 학생운동의 전반적 침체와 더불어 반성할 점으로 남는다. 그래서 헌신적인 청년학생들의 연대활동이 개별 분산적고립적 활동을 벗어나지 못한 단위사업장 실력지원자원에 그쳤고 보다 대대적인 파업지지 및 국민선전활동으로 나가지 못했다.
9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며 민중들의 투쟁은 다시금 국제적 수준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를 중심으로 되살아났고, 이것은 학생운동 진영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97년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노동법 개악 저지/ 민주주의 사수 총파업이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99년에는 세계 자본주의를 덜컥 뒤집어 놓을 만한 뉴라운드 반대 투쟁이 10만 세계 노동자 민중들의 참여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2000년에는 한국에서도 아셈 반대 투쟁이 민주노총, 전농, 좌파 학생운동 단위들의 연대 속에서 진행된 것이다. 이것은 2001년 한국의 발전소 사유화 저지 투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반 신자유주의/ 반 세계화 투쟁이 노동자뿐만이 아닌, 전체 민중의 삶 속에 파고들어 학생운동진영의 과제로 던져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80년대와는 분명 다른 양태를 보인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학사회에서 학생운동이 대중저항주체를 재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운동의 표상―저항, 민주주의, 민중 중심성 등등―을 통해 대중과 관계 맺으면서부터였다. 즉 학생운동이라는 표상은 대학인들에게 민주주의와 시대에 대한 저항을 의미했으며, 대학인들은 운동권/비권이라는 흑백논리적인 선택 문제가 아닌 학생운동과 나의 관계를 통해 시대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나갔다.
■.맺으며
2천년대 학생운동의 새로운 부흥을 위하여
핵심투쟁과제 뿐만 아니라 무너지고 있는 과, 반 학생회 등의 단위 공동체를 어떻게 복원시켜낼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실험 그리고 그 성과를 제한 없이 교류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생운동과 대학사회의 진보적 담론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 즉 어떤 질과 내용의 운동을 펼쳐낼 것인가가 중요하다.
학생운동 내부의 다양한 의견들이 2천년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최근 113주년 메이데이 전국학생투쟁위원회가 좌파 학생들과 민족주의 진영과 절충주의 노선의 학생들이 나누어져 꾸려지고 투쟁하였다. 비타협 전선인 좌파 학생들과 코프라테즘적 성격 및 절충주의적인 민족주의 진영의 한계는 학생운동의 미래를 어둡게만 보여주고 있다.
2003년 이후 학생운동은 조금 더 서로의 운동에 대해 인정하고 투쟁해야 할 것이고, 운동 세력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원칙인 아래로부터, 청년학생의 대단결 대연대는 더 이상 말뿐이기를 그쳐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서로의 이상인 노동해방, 통일해방, 민중해방의 날이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되어진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6월민주항쟁에 영향을 받은 노동자대중이 노예적 삶을 박차고 생존권의 민주주의를 찾기 위해 일어선 해방후 최대규모의 노동자투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대중내의 연대투쟁도 활발했지만 이에 못지 않게 노학연대 투쟁도 활발하였다. 실제 파업투쟁의 현장에서 학생들의 지원투쟁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이는 노동자들의 토론속에서 노동대중은 학생운동의 정당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형제애적 연대의식을 갖게 되었다.
78월 투쟁시기의 노학연대 활동은 노동자 내부의 연대활동보다도 그리고 다른 어떤 시기의 연대활동보다도 소극적이었다. 학생운동조직 자체가 보다 통일적이고 조직적인 연합을 이뤄내지 못한 점은 629선언이후 학생운동의 전반적 침체와 더불어 반성할 점으로 남는다. 그래서 헌신적인 청년학생들의 연대활동이 개별 분산적고립적 활동을 벗어나지 못한 단위사업장 실력지원자원에 그쳤고 보다 대대적인 파업지지 및 국민선전활동으로 나가지 못했다.
9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며 민중들의 투쟁은 다시금 국제적 수준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를 중심으로 되살아났고, 이것은 학생운동 진영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97년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노동법 개악 저지/ 민주주의 사수 총파업이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99년에는 세계 자본주의를 덜컥 뒤집어 놓을 만한 뉴라운드 반대 투쟁이 10만 세계 노동자 민중들의 참여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2000년에는 한국에서도 아셈 반대 투쟁이 민주노총, 전농, 좌파 학생운동 단위들의 연대 속에서 진행된 것이다. 이것은 2001년 한국의 발전소 사유화 저지 투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반 신자유주의/ 반 세계화 투쟁이 노동자뿐만이 아닌, 전체 민중의 삶 속에 파고들어 학생운동진영의 과제로 던져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80년대와는 분명 다른 양태를 보인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학사회에서 학생운동이 대중저항주체를 재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운동의 표상―저항, 민주주의, 민중 중심성 등등―을 통해 대중과 관계 맺으면서부터였다. 즉 학생운동이라는 표상은 대학인들에게 민주주의와 시대에 대한 저항을 의미했으며, 대학인들은 운동권/비권이라는 흑백논리적인 선택 문제가 아닌 학생운동과 나의 관계를 통해 시대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나갔다.
■.맺으며
2천년대 학생운동의 새로운 부흥을 위하여
핵심투쟁과제 뿐만 아니라 무너지고 있는 과, 반 학생회 등의 단위 공동체를 어떻게 복원시켜낼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실험 그리고 그 성과를 제한 없이 교류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생운동과 대학사회의 진보적 담론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 즉 어떤 질과 내용의 운동을 펼쳐낼 것인가가 중요하다.
학생운동 내부의 다양한 의견들이 2천년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최근 113주년 메이데이 전국학생투쟁위원회가 좌파 학생들과 민족주의 진영과 절충주의 노선의 학생들이 나누어져 꾸려지고 투쟁하였다. 비타협 전선인 좌파 학생들과 코프라테즘적 성격 및 절충주의적인 민족주의 진영의 한계는 학생운동의 미래를 어둡게만 보여주고 있다.
2003년 이후 학생운동은 조금 더 서로의 운동에 대해 인정하고 투쟁해야 할 것이고, 운동 세력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원칙인 아래로부터, 청년학생의 대단결 대연대는 더 이상 말뿐이기를 그쳐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서로의 이상인 노동해방, 통일해방, 민중해방의 날이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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