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기생이란?
2. 기생의 기원
3. 기생의 역사
1)삼국시대
2)고려시대
3)조선시대 4)일제 강점기 5)해방 후 현재까지
4.기생의 종류와 역활
1)여악(女樂)
2)의녀(醫女)․침비(針婢)
3)방직기녀(房直妓女)
4)사신 접대
5.기생의생활
6.신윤복 풍속화의 기생
7.이름을 남긴 기생
2. 기생의 기원
3. 기생의 역사
1)삼국시대
2)고려시대
3)조선시대 4)일제 강점기 5)해방 후 현재까지
4.기생의 종류와 역활
1)여악(女樂)
2)의녀(醫女)․침비(針婢)
3)방직기녀(房直妓女)
4)사신 접대
5.기생의생활
6.신윤복 풍속화의 기생
7.이름을 남긴 기생
본문내용
었다. 삼남(三南)지방의 관비(官婢) 중 나이 어리고 영리한 자를 뽑아 올려 처음에는 제생원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혜민서(惠民署)에서 침구술을 가르쳤다. 침과 뜸술이 필수였기 때문에 그녀들은 늘 침통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의녀는 내의원에 소속되어서 기업(妓業)을 겸행했기 때문에 약방기생(藥房妓生)이라 칭했다.
침선비(針線婢)는 어느 때에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하나 선발한 다음 궁사(宮司)에 이름을 올린 후 침선비라고 이름하였다. 침비(針婢)는 상의사(尙依司) 소속이나 기업(妓業)도 하였다. 그 때문에 세속에서 상방기생(尙房妓生)이라고 불렀는데, 기녀 가운데는 약방기생과 상방기생이 일류였다.
3) 방직기녀(房直妓女)
국경지방을 지키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배치된 기생들을 말한다. 군관들의 방직기녀는 주로 기생이나 개인 여종 중에서 충당되었다. 기생일 경우 방직기라 했고, 여종일 경우는 방직비 또는 방비라 불렀다. 방직기들은 한시적인 첩과 같아서 객지생활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났으며, 외방 기녀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세종 15년(1433)에 김종서를 함길도절제사로 삼아 1천 여리를 개척하여 두만강 주위 여섯 곳에 국경 초소를 두고(6진) 네 고을을 두어(4군) 여진족의 소굴인 백두산 동남쪽을 거의 다 우리나라 판도에 다시 편입시켰다. 6진을 개척한 김종서는 남부 백성(삼남 및 관동민)들을 이주시키고, 날마다 주연을 베풀고 장사들을 위한했는데 이때 기생을 두어 장사들을 위로케 하였다고 한다.
변방에 배치된 기생들은 장병들의 의복을 꿰매어 주고 술과 음식으로 상대해 주기도 하면서 밤시중을 들게 했다. 또한 이들은 소속된 곳을 떠나지 못하게 국법으로 금하기도 했으며, 그 수가 부족하여 이를 메우기 위해 사비나 관비를 활용하였다고 한다.
커다란 ‘진’에는 60여 명이 넘는 기생들을 두어 늘 위험과 불안 속에서 언제 퇴각할지 모르는 진지의 장병들을 위한 위안부로서 봉사하도록 했다. 군인들의 불만을 해소함으로써 조선국토의 기운을 고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기녀 폐지론이 대두될 때에도 변방의 기녀들만을 그대로 두고자 하였다.
4) 사신 접대
기생은 외교에도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여악으로 외국 사신을 연대(宴待)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이미 행하여졌다. 중국 송나라 사신에게 예쁘게 꾸민 기생을 붙여주고 접대하도록 했다. 외국의 사신이 오면 산대희(山臺戱)라고 하는 거대한 가설무대를 만들어 사신들이 보고 즐길 수 있도록 공연을 제공했다. 산대라고 하는 호화찬란한 장식을 세운 무대 위에서 백희(百戱)나 여악을 실제로 연기하게 하여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이를 답습하였다. 사신에게 음식과 술과 여자로 접대해서 상호간의 우호적인 외교를 이어가고자 한 것이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외교사절에 대해서도 ‘기생외교’는 계속되었다. 혹시라도 청나라 사신이 경성에 온다고 하면, 연회석에서 여악을 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신이 경성에 머무는 동안, 의녀와 사창을 아예 사신과 함께 지내게 해주었다고 한다. 사신이 이곳저곳을 여행할 때도 그곳까지 관기를 보내는 등 대단히 융숭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왜인이라고 불렀던 일본인에게도 기생이 시중드는 연회석을 마련해 주어 정중하게 대접했다. 거듭 출몰하는 왜구와 임진정유왜란을 일으킨 동쪽의 야만인들이 언제 난폭한 행동으로 습격해올지 모르기 때문에 사신들을 기분 좋게 해서 돌려보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5.기생의생활
기생이 되는 것은 어머니의 신분을 이어 받아 명단에 올라 대물림하거나 아니면 가난으 로 인해 집안을 살리고자 뛰어든 경우였다. 관기들이 기안(妓案)에 이름이 오르는 나이는 대략 15세쯤이다. 기안에 오르면 기녀 교육을 담당하는 교방(敎坊)이란 곳에 들어가 기녀로서 자질을 갖추기 위한 언어동작음률무도서화 등을 익힌다.
관리와의 동침보다 궁중 연회의 가무가 주업이었던 경기(京妓)는 장악원에 소속되어 15세 정도부터 음률을 익히고 춤을 배웠는데 재능이 있으면 글씨와 그림도 공부하였다. 교육기간은 날씨가 가장 춥고 더운 때를 피해서 매년 2월부터 4월, 8월부터 10월 동안에 하였다. 교육내용은 가곡과 당비파를 필수과목으로 하였는데 한 사람마다 선생을 지정하여 책임지고 가르치도록 하였다. 또한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장고, 아쟁, 해금, 대금, 소금, 필률 등의 악기 중에서 전공 악기를 정하여 학습하게 하였다. 능숙하게 잘하는 사람은 여러 악기를 배웠고 그렇지 못한 경우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연습하였다. 교육은 엄격하게 시행되었는데, 수시로 실력을 점검하여 연주를 잘 못하는 자는 종아리를 맞는 등의 벌을 받았고 심한 경우는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러한 철저한 교육을 통해 그들은 특기를 가졌고, 그 결과 우리나라의 전통음악과 춤을 오늘날까지 전할 수 있었다. 경기들이 각종 기예를 닦았던 반면, 지방 기녀들은 대체로 수청을 맡았다. 지방기녀들은 행수기녀에게 잘 보여야 좋은 관원을 접대할 수 있었다.
6.신윤복 풍속화의 기생
쌍검대무-신윤복
국보 135호
한가운데서 긴칼을 들고 춤을추는무녀를 중심으로 악단과 양반 기녀들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주변의 푸른빛들과는 대조적으로 무녀의치마는 붉은색이네요 덕분에 시선이 무녀들에게 집중되고있습니다 역동적으로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보니 얼마나 현란하 게 춤을 추는지알것같네요
기방무사-신윤복
방안에서 남녀가 무슨일을 하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당황한듯하다
아마도 방안의 연인은 기생의 몸종이고 방 안의 남자는 기생을 찾아왔다가 그녀의 몸 종과 사랑을 나누던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갑자기 기생이 들어오니사내는 이불로 자신 의 벗은 몸을 가린듯하다혜원에 춘화중에도 이와같은내용에 이불을 덥지안은춘화가있다
주유청강-신윤복
특별히 하는 일없이 유희나 즐기며 세월을 죽이고있는 선비들을 한량이라하죠 그한 량들이 기녀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나왔습 니다 조선시대 흔이볼수있는풍경입니다 면위쪽에는 피리소리는 바람을 타서 아니 들리는 데 횐 갈매기가 물결 앞에 날아든 다 라고 적혀있다
야금모행 - 신윤복
늦은 겨울밤 기생이 동침을 원하는 양 반을 따라 어디론가 가는 모습
침선비(針線婢)는 어느 때에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하나 선발한 다음 궁사(宮司)에 이름을 올린 후 침선비라고 이름하였다. 침비(針婢)는 상의사(尙依司) 소속이나 기업(妓業)도 하였다. 그 때문에 세속에서 상방기생(尙房妓生)이라고 불렀는데, 기녀 가운데는 약방기생과 상방기생이 일류였다.
3) 방직기녀(房直妓女)
국경지방을 지키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배치된 기생들을 말한다. 군관들의 방직기녀는 주로 기생이나 개인 여종 중에서 충당되었다. 기생일 경우 방직기라 했고, 여종일 경우는 방직비 또는 방비라 불렀다. 방직기들은 한시적인 첩과 같아서 객지생활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났으며, 외방 기녀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세종 15년(1433)에 김종서를 함길도절제사로 삼아 1천 여리를 개척하여 두만강 주위 여섯 곳에 국경 초소를 두고(6진) 네 고을을 두어(4군) 여진족의 소굴인 백두산 동남쪽을 거의 다 우리나라 판도에 다시 편입시켰다. 6진을 개척한 김종서는 남부 백성(삼남 및 관동민)들을 이주시키고, 날마다 주연을 베풀고 장사들을 위한했는데 이때 기생을 두어 장사들을 위로케 하였다고 한다.
변방에 배치된 기생들은 장병들의 의복을 꿰매어 주고 술과 음식으로 상대해 주기도 하면서 밤시중을 들게 했다. 또한 이들은 소속된 곳을 떠나지 못하게 국법으로 금하기도 했으며, 그 수가 부족하여 이를 메우기 위해 사비나 관비를 활용하였다고 한다.
커다란 ‘진’에는 60여 명이 넘는 기생들을 두어 늘 위험과 불안 속에서 언제 퇴각할지 모르는 진지의 장병들을 위한 위안부로서 봉사하도록 했다. 군인들의 불만을 해소함으로써 조선국토의 기운을 고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기녀 폐지론이 대두될 때에도 변방의 기녀들만을 그대로 두고자 하였다.
4) 사신 접대
기생은 외교에도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여악으로 외국 사신을 연대(宴待)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이미 행하여졌다. 중국 송나라 사신에게 예쁘게 꾸민 기생을 붙여주고 접대하도록 했다. 외국의 사신이 오면 산대희(山臺戱)라고 하는 거대한 가설무대를 만들어 사신들이 보고 즐길 수 있도록 공연을 제공했다. 산대라고 하는 호화찬란한 장식을 세운 무대 위에서 백희(百戱)나 여악을 실제로 연기하게 하여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이를 답습하였다. 사신에게 음식과 술과 여자로 접대해서 상호간의 우호적인 외교를 이어가고자 한 것이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외교사절에 대해서도 ‘기생외교’는 계속되었다. 혹시라도 청나라 사신이 경성에 온다고 하면, 연회석에서 여악을 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신이 경성에 머무는 동안, 의녀와 사창을 아예 사신과 함께 지내게 해주었다고 한다. 사신이 이곳저곳을 여행할 때도 그곳까지 관기를 보내는 등 대단히 융숭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왜인이라고 불렀던 일본인에게도 기생이 시중드는 연회석을 마련해 주어 정중하게 대접했다. 거듭 출몰하는 왜구와 임진정유왜란을 일으킨 동쪽의 야만인들이 언제 난폭한 행동으로 습격해올지 모르기 때문에 사신들을 기분 좋게 해서 돌려보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5.기생의생활
기생이 되는 것은 어머니의 신분을 이어 받아 명단에 올라 대물림하거나 아니면 가난으 로 인해 집안을 살리고자 뛰어든 경우였다. 관기들이 기안(妓案)에 이름이 오르는 나이는 대략 15세쯤이다. 기안에 오르면 기녀 교육을 담당하는 교방(敎坊)이란 곳에 들어가 기녀로서 자질을 갖추기 위한 언어동작음률무도서화 등을 익힌다.
관리와의 동침보다 궁중 연회의 가무가 주업이었던 경기(京妓)는 장악원에 소속되어 15세 정도부터 음률을 익히고 춤을 배웠는데 재능이 있으면 글씨와 그림도 공부하였다. 교육기간은 날씨가 가장 춥고 더운 때를 피해서 매년 2월부터 4월, 8월부터 10월 동안에 하였다. 교육내용은 가곡과 당비파를 필수과목으로 하였는데 한 사람마다 선생을 지정하여 책임지고 가르치도록 하였다. 또한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장고, 아쟁, 해금, 대금, 소금, 필률 등의 악기 중에서 전공 악기를 정하여 학습하게 하였다. 능숙하게 잘하는 사람은 여러 악기를 배웠고 그렇지 못한 경우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연습하였다. 교육은 엄격하게 시행되었는데, 수시로 실력을 점검하여 연주를 잘 못하는 자는 종아리를 맞는 등의 벌을 받았고 심한 경우는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러한 철저한 교육을 통해 그들은 특기를 가졌고, 그 결과 우리나라의 전통음악과 춤을 오늘날까지 전할 수 있었다. 경기들이 각종 기예를 닦았던 반면, 지방 기녀들은 대체로 수청을 맡았다. 지방기녀들은 행수기녀에게 잘 보여야 좋은 관원을 접대할 수 있었다.
6.신윤복 풍속화의 기생
쌍검대무-신윤복
국보 135호
한가운데서 긴칼을 들고 춤을추는무녀를 중심으로 악단과 양반 기녀들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주변의 푸른빛들과는 대조적으로 무녀의치마는 붉은색이네요 덕분에 시선이 무녀들에게 집중되고있습니다 역동적으로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보니 얼마나 현란하 게 춤을 추는지알것같네요
기방무사-신윤복
방안에서 남녀가 무슨일을 하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당황한듯하다
아마도 방안의 연인은 기생의 몸종이고 방 안의 남자는 기생을 찾아왔다가 그녀의 몸 종과 사랑을 나누던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갑자기 기생이 들어오니사내는 이불로 자신 의 벗은 몸을 가린듯하다혜원에 춘화중에도 이와같은내용에 이불을 덥지안은춘화가있다
주유청강-신윤복
특별히 하는 일없이 유희나 즐기며 세월을 죽이고있는 선비들을 한량이라하죠 그한 량들이 기녀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나왔습 니다 조선시대 흔이볼수있는풍경입니다 면위쪽에는 피리소리는 바람을 타서 아니 들리는 데 횐 갈매기가 물결 앞에 날아든 다 라고 적혀있다
야금모행 - 신윤복
늦은 겨울밤 기생이 동침을 원하는 양 반을 따라 어디론가 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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