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농구의 역사
1) 농구의 탄생
2) 농구의 규칙
3) 농구의 보급
1) 농구의 탄생
2) 농구의 규칙
3) 농구의 보급
본문내용
수 있다. 최초의 경기규칙은 전문 13개 조항에 불과했으나 현행 규칙은 본문 93개 조항과 부칙 및 심판에 관한 규정 등 100여 개 조항으로 세분화 되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더욱 기술의 고도화로 인한 규칙 변경이 계속되리라 예상된다.
이처럼 농구는 미국에서 나온 구기 종목 가운데 가장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현재도 러시아나 세르비아나 리투아니아 같은 옛 공산권 나라들은 농구가 축구 못지않게 인기를 얻고 있는 강국이다. 또한 스페인이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축구강호들은 농구로도 강호이다. 스페인 같은 경우는 농구리그가 NBA 다음으로 세계 리그 랭킹 2위이다. 그리스는 NBA 현역 유명선수를 그리스 리그로 불러온 적까지 있다. 이렇듯 다른 나라 농구리그들이 NBA까진 아니라도 꽤 시장성이 있고 리그 수준도 상당한 편이다. 더불어 아랍 산유국이라든지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같은 자원강국들도 축구 다음으로 밀어주는 인기 스포츠이다.
3) 한국 농구의 도입
한국 농구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YMCA를 통해 도입되었다. 우리나라 농구는 1907년 황성 기독교 청년회(皇城 基督敎 靑年會) 회관이 건립될 때 당시 총무였던 미국인 길레트(P. Gillet)가 회관 후원에 백보드(back board)를 세움으로써 최초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소개에 그쳤을 뿐 지도 단계에 까지는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 후 청년회관에 실내 체육관이 준공되던 1916년에 초대 체육 간사로 부임한 반 하드(Ban Hard)가 비로소 회원들에게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일반에게 보급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각 중등학교 농구가 싹트기 시작할 때부터 이다.
이같이 우리 농구는 다른 나라에 비해 늦게 보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초창기부터 일제의 제약으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가며 성장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민족이 처해있는 환경에 영향을 받아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성장하게 된 우리 농구는 급진적으로 향상 발전하게 되어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벌써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오르게 되었다. 1936년에는 연희전문
(延禧專門, 연세대학교 전신) 농구가 드디어 일본을 제압하였으며 이로 인해 농구가 최초로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베를린 올림픽에 우리나라 선수 3명을 출전시킬 수 있었고, 뒤이어 보성전문
(普成專門, 고려대학교 전신)의 농구가 전 일본 선수권을 3연패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1940년에는 우리 선수들이 일본 대표팀의 주축이 되어 동양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한국 농구가 명실공히 동양 최강임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렇듯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던 우리 농구는 그 후 2차 대전에 패색이 농후해진 일제의 구기 폐지정책에 깔려 암흑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8.15 광복과 더불어 재기한 우리 농구는 일제 말기의 공백과 6.25 동란의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발전하여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게 되었다. 그 후 우리 한국이 A.B.C의 창설을 주도할 수 있었고 여자농구를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는 다녀간 남녀공히 아시아 정상권을 유지해 왔다. 이러한 우리농구의 발자취를 보급발전사적(普及罰錢史的)측면에서 본다면 지극히 정상적 단계를 거쳐 발전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YMCA회원농구로 출발한 우리나라 농구가 첫 단계에는 학원농구로 보급 되었으며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프로농구가 출발하였다. 그러나 프로농구 출범당시에는 시기상조가 아닌가 하는 부정적 견해도 만만치 않았다. 그 당시 우리 농구계는 대학농구가 전례 없는 활기를 띄고 있어서 그 여파로 머지않아 실업농구도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 때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기존실업팀은 창단부터 팀을 유지하기까지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신생팀이 창단할 때 각 실업단은 극심했던 선수선발 경쟁도 중지했고, 각 대학팀에서는 졸업 후 진출할 평생직장을 포기하는 등 희생적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실업농구팀이 프로농구 창설로 인해 앞으로 재기할 수 없이 하루아침에 전멸하는데 동의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반면 농구의 프로화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농구의 추세로 보아 한국 농구의 프로화를 당연시 하면서 아마 농구 발전이 곧 프로 농구의 발전이라는 견지에서 아마농구발전을 위한 재정지원 안까지 제시하고 국내선수들의 기술향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외국인을 용병으로 하는 프로 농구가 드디어 출범하게 되었다.
이처럼 농구는 미국에서 나온 구기 종목 가운데 가장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현재도 러시아나 세르비아나 리투아니아 같은 옛 공산권 나라들은 농구가 축구 못지않게 인기를 얻고 있는 강국이다. 또한 스페인이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축구강호들은 농구로도 강호이다. 스페인 같은 경우는 농구리그가 NBA 다음으로 세계 리그 랭킹 2위이다. 그리스는 NBA 현역 유명선수를 그리스 리그로 불러온 적까지 있다. 이렇듯 다른 나라 농구리그들이 NBA까진 아니라도 꽤 시장성이 있고 리그 수준도 상당한 편이다. 더불어 아랍 산유국이라든지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같은 자원강국들도 축구 다음으로 밀어주는 인기 스포츠이다.
3) 한국 농구의 도입
한국 농구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YMCA를 통해 도입되었다. 우리나라 농구는 1907년 황성 기독교 청년회(皇城 基督敎 靑年會) 회관이 건립될 때 당시 총무였던 미국인 길레트(P. Gillet)가 회관 후원에 백보드(back board)를 세움으로써 최초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소개에 그쳤을 뿐 지도 단계에 까지는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 후 청년회관에 실내 체육관이 준공되던 1916년에 초대 체육 간사로 부임한 반 하드(Ban Hard)가 비로소 회원들에게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일반에게 보급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각 중등학교 농구가 싹트기 시작할 때부터 이다.
이같이 우리 농구는 다른 나라에 비해 늦게 보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초창기부터 일제의 제약으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가며 성장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민족이 처해있는 환경에 영향을 받아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성장하게 된 우리 농구는 급진적으로 향상 발전하게 되어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벌써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오르게 되었다. 1936년에는 연희전문
(延禧專門, 연세대학교 전신) 농구가 드디어 일본을 제압하였으며 이로 인해 농구가 최초로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베를린 올림픽에 우리나라 선수 3명을 출전시킬 수 있었고, 뒤이어 보성전문
(普成專門, 고려대학교 전신)의 농구가 전 일본 선수권을 3연패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1940년에는 우리 선수들이 일본 대표팀의 주축이 되어 동양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한국 농구가 명실공히 동양 최강임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렇듯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던 우리 농구는 그 후 2차 대전에 패색이 농후해진 일제의 구기 폐지정책에 깔려 암흑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8.15 광복과 더불어 재기한 우리 농구는 일제 말기의 공백과 6.25 동란의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발전하여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게 되었다. 그 후 우리 한국이 A.B.C의 창설을 주도할 수 있었고 여자농구를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는 다녀간 남녀공히 아시아 정상권을 유지해 왔다. 이러한 우리농구의 발자취를 보급발전사적(普及罰錢史的)측면에서 본다면 지극히 정상적 단계를 거쳐 발전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YMCA회원농구로 출발한 우리나라 농구가 첫 단계에는 학원농구로 보급 되었으며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프로농구가 출발하였다. 그러나 프로농구 출범당시에는 시기상조가 아닌가 하는 부정적 견해도 만만치 않았다. 그 당시 우리 농구계는 대학농구가 전례 없는 활기를 띄고 있어서 그 여파로 머지않아 실업농구도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 때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기존실업팀은 창단부터 팀을 유지하기까지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신생팀이 창단할 때 각 실업단은 극심했던 선수선발 경쟁도 중지했고, 각 대학팀에서는 졸업 후 진출할 평생직장을 포기하는 등 희생적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실업농구팀이 프로농구 창설로 인해 앞으로 재기할 수 없이 하루아침에 전멸하는데 동의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반면 농구의 프로화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농구의 추세로 보아 한국 농구의 프로화를 당연시 하면서 아마 농구 발전이 곧 프로 농구의 발전이라는 견지에서 아마농구발전을 위한 재정지원 안까지 제시하고 국내선수들의 기술향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외국인을 용병으로 하는 프로 농구가 드디어 출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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