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본론
(1) 복지의 이름으로 억압
- 엘리자베스 빈민법 (Elizabethan Poor Law, 1601)
(2) 억압의 전개
- 거주지 제한법 (The Act of Settlement and Removal, 1662)
- 작업장법 (The Workhouse Act, 1696)
(3) 억압의 완화
- 스핀햄랜드 법 (The speenhamland Act, 1795)
(4) 억압의 재탄생
- 신빈민법 (New Poor Law, 1834)
(5) 복지국가의 태동
- 대전환
- 사회보험 (Social Insurance)
(6) 권리의 인정
- 베버리지 보고서 (Beveridge report, 1942)
3. 결론
2. 본론
(1) 복지의 이름으로 억압
- 엘리자베스 빈민법 (Elizabethan Poor Law, 1601)
(2) 억압의 전개
- 거주지 제한법 (The Act of Settlement and Removal, 1662)
- 작업장법 (The Workhouse Act, 1696)
(3) 억압의 완화
- 스핀햄랜드 법 (The speenhamland Act, 1795)
(4) 억압의 재탄생
- 신빈민법 (New Poor Law, 1834)
(5) 복지국가의 태동
- 대전환
- 사회보험 (Social Insurance)
(6) 권리의 인정
- 베버리지 보고서 (Beveridge report, 1942)
3. 결론
본문내용
an Poor Law, 1601)
(2) 억압의 전개
- 거주지 제한법 (The Act of Settlement and Removal, 1662)
- 작업장법 (The Workhouse Act, 1696)
(3) 억압의 완화
- 스핀햄랜드 법 (The speenhamland Act, 1795)
(4) 억압의 재탄생
- 신빈민법 (New Poor Law, 1834)
(5) 복지국가의 태동
- 대전환
- 사회보험 (Social Insurance)
(6) 권리의 인정
- 베버리지 보고서 (Beveridge report, 1942)
3. 결론
서론
사회복지는 오랜 세월동안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왔다. 16세기까지 빈민에 대한 정부의 대응 방식을 보면 매우 억압적이고 형벌적인 대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시대에는 제도적인 빈민구제라는 인식도 부족했고 경제적 궁핍에 대처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구걸은 지금 생각하는 것과 같이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중세시대 사람들의 당연한 삶의 일부였다. 또 구걸 이외에도 조직화된 원조수단들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좀 더 뒤로 가서 중세 영국에서의 빈민구제라 함은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된 구호활동이었다. 자선을 제공하면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빈민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이 많아 당시의 자선활동은 체계적이지 못해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이후 붕괴된 봉건제로 인해 전통적인 사회 안전망이 사라지고 이에 영주 밑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농노계급들이 자본주의 사회로 내몰리게 된다. 거주이동의 자유와 사유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고 봉건제도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상당수는 떠돌아다니는 임시 노동자들이 되었다. 이들이 사회의 불안세력으로 여겨지던 시기에 흑사병이 유행함에 따라 노동인구가 격감하여 임금이 폭등하자 지주들의 요청에 의해 노동자의 임금 상한선을 규정한 노동자 조례를 발표하게 된다.
그 후에 일어난 인클로져 현상과, 산업화와 함께 제조업이 등장하면서 15세기말과 16세기 초반 빈민이 큰 사회문제로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헨리 8세의 수장령으로 빈민 구호활동의 원천이었던 수도원이 더 이상 구호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자 정부가 빈곤문제에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많은 법령들이 나왔지만 이 모든 것은 빈민에 대한 근본적인 구제책이 되지는 못하고 오히려 빈민을 비인도적으로 통제하는 억압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이후에 여러 법령들을 성문화 한 것이 엘리자베스 빈민법이다.
2. 본론
<복지의 이름으로 시작 된 억압>
(1) 엘리자베스 빈민법
1601년의 엘리자베스 빈민법은 통상적으로 사회복지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갑자기 1601년에 나타난 법이 아니라 전 시대부터 내려오던 빈민구제에 대한 여러 법을 체계화하여 성문화 시킨 것이다. 엘리자베스 빈민법이 입법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혼란스러웠던 17세기 상황을 종합해 봐야 한다. 그 당시 영국에는 인클로져 운동,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또 헨리 8세의 수장령 등 복합적인 상황으로 인해 대량의 빈곤이 발생했다. 그러자 정부는 실업의 원인이 빈민들의 게으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국가적인 안전망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빈민들 중 일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진짜 실업자와 나태하여 일을 하지 않는 자를 구분해 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엘리자베스 정부는 이전에 빈민들에게 행했던 억압만으로는 빈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다 더 합리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빈민을 속성별로 분류하여 각기 다른 시설로 보내는 방법인데, 먼저 빈민을 노동능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크게 분류하고, 노동능력이 있는 자는 다시 일할 의지가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누었다. 노동 능력이 있고 일할 의지도 갖고 있는 빈민은 작업장으로 보내졌고, 노동 능력이 있지만 일할 의지가 없는 나태한 빈민들은 교정원으로 보내져 죄인 취급을 받았다. 노동 능력이 없는 빈민은 빈민원으로 보내 생활하게 하였다. 빈곤아동은 도제가 되어 24살까지 성장하였고 여자아이는 21세나 결혼 할 때까지 도제로 살았다. 이 엘리자베스 빈민법은 정부가 빈민에 대한 책임을 최초로 인식하고, 조세에 의한 빈민대책을 강구했다는 점에서 최초의 사회복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법은 제대로 시행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구빈세는 잘 과세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재정이 부족했던 지방정부는 빈민원과 작업장을 별도로 설립하기 힘들었다. 결국 빈민원과 작업장은 하나로 통합되어 갔고, 노동 능력이 있는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기 위해 만들어졌던 작업장은 점점 고아나 노인, 노약자 등 노동력이 없는 빈민으로 채워졌다. 그들 중에는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도 많았는데, 작업장 관리자들은 수용자들의 건강이나 도덕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그들을 생존시키기에만 급급했다. 작업장 내 불결한 환경과 고된 일 때문에 작업장 내 빈민들의 생활은 상당히 열악했다. 그리고 감독관들이 무급의 국가관리였기 때문에 나태함과 부패가 성황했다.
1601년의 엘리자베스 빈민법은 국가가 복지에 관여하였다는 큰 의의가 있지만 그에 비해 빈민에 대한 처우는 그 전의 빈민 구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구제에 목적을 두기보다는 여전히 억압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억압의 전개>
(1) 거주지 제한법
17세기 당시 영국에서는 모든 사람은 거주 지역 교구에 소속되면서 여러 가지 의무를 지는 대신에 빈곤해지면 교구로부터 구제를 받았다. 각 교구마다 재정의 상태가 달랐기 때문에 재정이 빈약한 교구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빈민의 수를 줄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따라서 빈민은 보다 나은 생활환경이나 일자리를 찾아 교구를 돌아다녔으나, 세금을 내는 계급은 자신의 교구에 들어온 빈민에게 관대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1660년대부터 농촌의 빈민들이 대규모 도시이동을 하자 도시 교구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각 교구가 자체적으로 빈민을 책임지기
(2) 억압의 전개
- 거주지 제한법 (The Act of Settlement and Removal, 1662)
- 작업장법 (The Workhouse Act, 1696)
(3) 억압의 완화
- 스핀햄랜드 법 (The speenhamland Act, 1795)
(4) 억압의 재탄생
- 신빈민법 (New Poor Law, 1834)
(5) 복지국가의 태동
- 대전환
- 사회보험 (Social Insurance)
(6) 권리의 인정
- 베버리지 보고서 (Beveridge report, 1942)
3. 결론
서론
사회복지는 오랜 세월동안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왔다. 16세기까지 빈민에 대한 정부의 대응 방식을 보면 매우 억압적이고 형벌적인 대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시대에는 제도적인 빈민구제라는 인식도 부족했고 경제적 궁핍에 대처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구걸은 지금 생각하는 것과 같이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중세시대 사람들의 당연한 삶의 일부였다. 또 구걸 이외에도 조직화된 원조수단들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좀 더 뒤로 가서 중세 영국에서의 빈민구제라 함은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된 구호활동이었다. 자선을 제공하면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빈민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이 많아 당시의 자선활동은 체계적이지 못해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이후 붕괴된 봉건제로 인해 전통적인 사회 안전망이 사라지고 이에 영주 밑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농노계급들이 자본주의 사회로 내몰리게 된다. 거주이동의 자유와 사유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고 봉건제도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상당수는 떠돌아다니는 임시 노동자들이 되었다. 이들이 사회의 불안세력으로 여겨지던 시기에 흑사병이 유행함에 따라 노동인구가 격감하여 임금이 폭등하자 지주들의 요청에 의해 노동자의 임금 상한선을 규정한 노동자 조례를 발표하게 된다.
그 후에 일어난 인클로져 현상과, 산업화와 함께 제조업이 등장하면서 15세기말과 16세기 초반 빈민이 큰 사회문제로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헨리 8세의 수장령으로 빈민 구호활동의 원천이었던 수도원이 더 이상 구호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자 정부가 빈곤문제에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많은 법령들이 나왔지만 이 모든 것은 빈민에 대한 근본적인 구제책이 되지는 못하고 오히려 빈민을 비인도적으로 통제하는 억압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이후에 여러 법령들을 성문화 한 것이 엘리자베스 빈민법이다.
2. 본론
<복지의 이름으로 시작 된 억압>
(1) 엘리자베스 빈민법
1601년의 엘리자베스 빈민법은 통상적으로 사회복지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갑자기 1601년에 나타난 법이 아니라 전 시대부터 내려오던 빈민구제에 대한 여러 법을 체계화하여 성문화 시킨 것이다. 엘리자베스 빈민법이 입법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혼란스러웠던 17세기 상황을 종합해 봐야 한다. 그 당시 영국에는 인클로져 운동,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또 헨리 8세의 수장령 등 복합적인 상황으로 인해 대량의 빈곤이 발생했다. 그러자 정부는 실업의 원인이 빈민들의 게으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국가적인 안전망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빈민들 중 일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진짜 실업자와 나태하여 일을 하지 않는 자를 구분해 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엘리자베스 정부는 이전에 빈민들에게 행했던 억압만으로는 빈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다 더 합리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빈민을 속성별로 분류하여 각기 다른 시설로 보내는 방법인데, 먼저 빈민을 노동능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크게 분류하고, 노동능력이 있는 자는 다시 일할 의지가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누었다. 노동 능력이 있고 일할 의지도 갖고 있는 빈민은 작업장으로 보내졌고, 노동 능력이 있지만 일할 의지가 없는 나태한 빈민들은 교정원으로 보내져 죄인 취급을 받았다. 노동 능력이 없는 빈민은 빈민원으로 보내 생활하게 하였다. 빈곤아동은 도제가 되어 24살까지 성장하였고 여자아이는 21세나 결혼 할 때까지 도제로 살았다. 이 엘리자베스 빈민법은 정부가 빈민에 대한 책임을 최초로 인식하고, 조세에 의한 빈민대책을 강구했다는 점에서 최초의 사회복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법은 제대로 시행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구빈세는 잘 과세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재정이 부족했던 지방정부는 빈민원과 작업장을 별도로 설립하기 힘들었다. 결국 빈민원과 작업장은 하나로 통합되어 갔고, 노동 능력이 있는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기 위해 만들어졌던 작업장은 점점 고아나 노인, 노약자 등 노동력이 없는 빈민으로 채워졌다. 그들 중에는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도 많았는데, 작업장 관리자들은 수용자들의 건강이나 도덕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그들을 생존시키기에만 급급했다. 작업장 내 불결한 환경과 고된 일 때문에 작업장 내 빈민들의 생활은 상당히 열악했다. 그리고 감독관들이 무급의 국가관리였기 때문에 나태함과 부패가 성황했다.
1601년의 엘리자베스 빈민법은 국가가 복지에 관여하였다는 큰 의의가 있지만 그에 비해 빈민에 대한 처우는 그 전의 빈민 구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구제에 목적을 두기보다는 여전히 억압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억압의 전개>
(1) 거주지 제한법
17세기 당시 영국에서는 모든 사람은 거주 지역 교구에 소속되면서 여러 가지 의무를 지는 대신에 빈곤해지면 교구로부터 구제를 받았다. 각 교구마다 재정의 상태가 달랐기 때문에 재정이 빈약한 교구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빈민의 수를 줄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따라서 빈민은 보다 나은 생활환경이나 일자리를 찾아 교구를 돌아다녔으나, 세금을 내는 계급은 자신의 교구에 들어온 빈민에게 관대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1660년대부터 농촌의 빈민들이 대규모 도시이동을 하자 도시 교구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각 교구가 자체적으로 빈민을 책임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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