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로마 제국, 수도 천도와 동로마제국, 그리고 이슬람제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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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계사 -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로마 제국, 수도 천도와 동로마제국, 그리고 이슬람제국까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개요
2. 로마
 1) 로마의 역사
 2) 로마의 문화
3. 동로마제국
 1) 동로마제국의 역사
 2) 동로마제국의 문화
4. 이슬람 제국
 1)이슬람교의 시작
 2)왕조의 시작과 쉬아파, 순니파
 3)셀주크 투르크 멸망과 오스만제국
5. 정리

본문내용

막고 전 유럽의, 나아가 세계의 종교의 싹을 마련하였습니다.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면서 결국 로마는 동 서로 갈라지게 되는데, 동로마제국은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는 지리적 요건으로 상업과 문물 전반에 걸쳐 동서 교류의 중심이 됩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치아의 상인’은 이러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동로마의 도시였던 베네치아를 그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의 바람도 바로 이 동로마 제국의 쇠퇴기에 일어났던 흐름입니다
그러나 이 동로마 제국도 이슬람 문화권의 새로운 강국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당합니다.
이슬람 종교를 바탕으로 일어서는 여러 나라들에 대해서까지, 이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로마
이탈리아 반도의 라틴민족은 로마에서 나라를 세우고 왕정과 공화정의 단계를 거쳐
제국으로서 거의 전 유럽에 걸쳐 그 세력을 넓혔으나, 불안정한 통치로 인한 약화와 게르
만 민족의 침략으로 멸망한다.
1)로마의 역사
1. 이탈리아 반도
장화를 닮은 이탈리아는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쪽 아드리아 바다를 건너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반도는 그리스 역사무대의 밖에서 원주민들과 신흥 도시국가 에트루리아의 세력, 그리스의 상업도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던 지역이었다.
에트루리아는 이탈리아 서부를 다스리고 있었고, 건축술과 해양 무역이 발달하였으며, 12개 도시의 연합체 국가였다.
에트루리아 외의 이탈리아의 원주민은 삼니움 부족과 사비니 부족 등 여러 부족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먼저 삼니움 부족은 4개의 부족국가로 이루어져 있었고 군사적으로는 함께 행동했으며 초기의 로마와 세 차례에 걸쳐 큰 전쟁을 치뤘다. 사비니 인은 수차의 전쟁 후 로마의 우방이 된다.
2 로마의 개국
로물루스는 동생 레무스와 함께 팔라티누스 언덕에 정착지를 건설하고 초대 로마 왕으로서 38년간 통치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아랫사람들이 아내를 맞이할 수 있도록 사비니인 여성을 약탈해 오기도 했다고 한다. 왕정은 에트루리아 왕조의 7번째 로마 왕 타르키니우스에 대한 반란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집정관이 왕을 대신하여 그 자리를 채우게 되는데, 이로서 로마 공화정이 시작하게 된다. 공화정은 민회와 원로원, 집정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공화정 로마의 관직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집정관은 2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1년이다. 재선이 허용되며 40세 이상만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취임할 수 있다.
공화정의 거의 모든 관직이 선거로 선출되지만, 독재관 만은 집정관중 1명이 지명한다. 임기는 집정관 임기의 반인 6개월이다. 국가에 비상사태(식량 위기, 전쟁 등)가 선포되거나 두 집정관이 서로 대립하여 의사 결정이 되지 않을 때 등에 임명된다.
호민관은 평민의 대표였으며, 이는 민회가 아닌 평민회에서 선출되었다. 임기는 1년이고, 연령제한은 없었다. 집정관과 원로원이 결정한 일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2명이었으나, 점차 10명으로 증원되었다.
원로원은 귀족계급이 국가정책에 참고할 사항을 의결하고 정치에 권고하는 기구였다. 실질적으로는 임기에 한계가 있던 집정관에게 장기적 정책을 지도하는 역할이었다. 나이 제한은 호민관 등의 관직을 거쳐야 했으므로 30세 이상의 성인이었다.
여기서 민회는 계급에 관계없이 모든 로마 시민이 참여하여 의결하는 집회였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여타 나라가 그렇듯 평민과 귀족계급의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했다. 수차에 걸친 로마 퇴거로 인해 결국 평민회와 호민관이 공화정에 등장하게 된다.
3 포에니 전쟁
로마는 라틴동맹과 라틴동맹의 해체 및 전쟁, 삼니움 부족과의 전투 등을 거쳐 이탈리아 반도의 실질적 패자가 되고 주변국과 동맹의 관계를 점차 넓혀가게 되는데 북아프리카의 강국 카르타고와 충돌하게 된다.
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시칠리아의 참주는 북동쪽의 메시나를 침공하고 메시나는 로마와 카르타고 양국에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로마가 시칠리아에 먼저 상륙하여 점령하자, 카르타고가 뒤늦게 파병하여 맞서게 되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수차의 교전 끝에 결국 로마가 승리하게 된다.
패전 후 에스파냐로 거점을 옮긴 카르타고의 세력에서 한니발 장군이 거병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2차 포에니 전쟁 초기 한니발은 로마의 중심인 로마 시를 향해 진격하면서 칸나에 회전을 거쳐 로마를 포위하기에 이른다. 로마는 전략을 수세로 바꿔 에스파냐와 카르타고 양국에서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지구전의 양상으로 대응하여, 한니발은 결국 이탈리아 반도에서 퇴각한다. 카르타고 본국으로 원정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자마 회전에서 한니발을 패퇴시키고 결국 카르타고는 다시 한 번 패하게 된다.
3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일방적인 승리로 결국 끝이 나고 카르타고는 멸망하여 지중해의 주도권은 로마에게 넘어온다.
4 제정의 시작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로마군의 주요 병력은 로마시민군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어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승전을 배경으로 라티푼디움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는데 이는 대토지를 의미하는 라틴어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농민들은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승전으로 국유지가 되어야 할 농토를 유력자가 사유화 하였고 대규모의 노예시장의 발달 등으로 농민들은 경쟁력을 잃고 농지는 황폐화 되고 중소 시민의 생활은 어려워져 갔다. 그리고 무산계급은 늘어갔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 사태를 개선하고자 호민관에 취임하여 여러 가지 제도 개혁을 시도했다. 대 지주의 토지소유에 한도를 정하는 법을 추진하고 싼값으로 곡물을 공급하는 곡물법안, 이탈리아 동맹시 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시민권 법안, 부당소득 단속의 객관화를 위한 법안 등의 개혁시도는 암살로 좌절되었다. 동맹시의 시민권부여를 재차 논의하던 드루수스의 암살이 기폭제가 되어 이탈리아 반도와 기타 로마의 동맹 시들은 시민권의 확대를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켰고 로마에서는 진압이 어려워지자 이탈리아 전역의 동맹시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
이시기 즈음하여 독재 정치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마리우스는 이탈리아 주변 타 부족들의 침략을 막아내고 포에니 전쟁의 원군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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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04.03
  • 저작시기2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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