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근대의 옷을 입은 신여성의 출현
2. 변화와 갈등의 물결을 타다
3. 자기 정체성에 눈뜨다
4. 성과 사랑의 자유를 부르짖다.
5. 단발에 스카프를 두르고 종로거리를 활보하다.
6. 소비와 유행의 선두에 서다
7. 학교에 가다
8. 학교제도를 비판하다
9. 직업전선에 뛰어들다.
2. 변화와 갈등의 물결을 타다
3. 자기 정체성에 눈뜨다
4. 성과 사랑의 자유를 부르짖다.
5. 단발에 스카프를 두르고 종로거리를 활보하다.
6. 소비와 유행의 선두에 서다
7. 학교에 가다
8. 학교제도를 비판하다
9. 직업전선에 뛰어들다.
본문내용
주요한 표현양식이었으며, 서로를 연상하게 만드는 밀접한 관계였다. 여성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여성들의 주장이 특히 성과 사랑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여기서 급진주의란 말을 잘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급진주의는 특정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일관된 경향이나 속성이라기보다는 여성해방과 성의 자유와 관련된 파편적인 언행들로s 표출되었다고 말하수있다. 이러한 파편적인 언행들에서 우리는 성에 대한 억압이나 여성의 정조를 절대시하는 사상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편린들을 볼수 있다 이것은 남녀 평등과 자유연애라는 근대 이념이 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성의 정조 관념을 비판하면서, 남자 공창의 필요성을 제기한 나혜석의 언급이나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에서 ‘성적으로 문한한 여성’으로 낙인 찍힌 김명순에 대하여 그의 연애는 무사기 하고 그의 성행위는 순진했다 고 평가 한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급진주의의 전형적 사례는 1920년대에 찻아볼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시기 근대에 대한 열렬한 추구 속에 신여성이 출현하였고, 성과 사랑에 대한 이들의 파격적인 주장과 행동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영향은 오래 가지 않았는데 1장에서 보았듯이 그에 대한 사회적 반발로 신여성의 퇴조가 급격하게 찾아왔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이르면 보수적인 구여성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그것은 이시기에 있었던 전통과 자아에 대한 반성이라는 지적환경의 산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1930년대 전반에 연애지상주의는 이미 청산되었다고 말할 수있다. 그렇지만 한시대를 풍미하였던 사상의 세례는 여전히 감성의 깊은 골짜기를 넘나들면서 지속적인 영향을 마치고 있었다. 그리고 1920년대처럼 신선하고 발랄한 것은 아니었지만, 성에 대한 급진 주의적 사고는 193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934년에 사랑에 실패한 한 여성이 자살을 하였다. 이사건에 대한 사회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급진주의적 사고의 일단을 엿볼수 있다. 여기에는 물론 그 죽음이 무의미하다는 비난이나 비탄이 당연히 따랐지만, 일부는 이 여성의 죽음을 또 다른 시각에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즉 “진실한 연애는 맹목적인 것”이며 “연애는 절대로 자상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다시 강조된 것이다. 자유주의 사조에는 고유한 몇몇 특성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급진주의나 사회주의와는 구분되는 자유주의의 특유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자유주의가 포괄하고 있는 다양한 입장들의 스펙트럼을 드러내었다. 자유주의 보다 덜하다고는 하지만 사회주의 성개념역시 모호하다, 엥겔스나 베벨 이 말하는 성애는 비교적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1920년대의 식민지 사회에서 이 개념을 적용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은 급진주의나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연애 개념이 얼마만큼 계급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데 치중하였다. 이렇듯 사회주의자들이 바라본 성은 형식적이고 당위적이었으면 교조적인 성향이 있었다. 그리고 자유주의와는 다른 목표를 설정하였다고 하더라도 자유주의와 동일한 바익으로 성을 억압하고 금지하고, 또 경계의 대상으로 삼아 성을 공동의 이념이나 대의에 종속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사랑과 성의 현실과 행태에 대해 날카로운 시대 감각과 비판의식을 보여주었지만, 이들의 주장은 때로는 사회주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사조들의 복합과 상호모순들을 포함하였다, 대부분의 주류사회주의자들이 현실 운동에 뛰어들거나 감옥에서 혁명에 치중하고 있을 때, 교조적인 이론의 소개나 해설, 피상적인 논의나 당위의 주장 등이 나오면서 성 문제를 둘러싼 논의의 장이 채워지고 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20년대 신여성의 출현이 식민지 사회에 미친 영향은 수 십 년 전에 철도와 기차가 전통사회에 가져다준 놀라움과 충격에 비견될 수 있다. 근대성의 한표상이었던 신여성은 수천년 동아 s전통적인 인습에 사로잡혀왔던 성과 혼인과 가족을 둘러싼 가치와 규범과 문화적 실행, 그리고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1920년대부터 성에 자유를 열렬하게 옹호하였던 급진주의의 출현은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전시 체제로 이행하는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이러한 향락과 퇴폐는 사회에서 추방되어 일반의 시야에서 사라진 듯 했다. 그러나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이제 햐악과 퇴폐는 감시와 통제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잠복하여 더욱 은밀한 방식으로 추구되었다. 그것은 1920년대 에 추구한 자유로운 성과 성의 해방이라는 이상을 포기한 대가이기도 했다. 열정적사랑 이라함은 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인식되었고, 또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랑의 유형이라고 볼수 있다. 열정적 사랑은 성이 과도하게 억압되어있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1920년대 이후 자유연애와 여성 해방에 관한 사상 및 주장들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고 는 하더라도, 그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시 지역의 교육받은 층에 한정된 현상이었다. 사회 집단이나 범주의 구체적인 요구와 필요에 의해 나왔다기보다는 근대의 산물로 수입되었던 자유연애와 여성 해방의 이념은, 전통의 지배가 끈질기게 존속하였다 식민지 상황에서 통속화 되는 경향이 있었다. 전반적 식민지 상황에서 억눌린 성은 자신의 파멸,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죽음 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에서 궁극적인 분출구를 찾기도 했던 것이다. 동성애는 이 시기의 억눌린 성이 분출구를 찾아나가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그렇다고 동성애가 식민지 사회에만 존재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서구에서도 전통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비슷한 현상들이 관찰되는데 동성애가 주로 여성들 사이의 그것을 지칭한다는 점에서도 두 사례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볼수 있다.
5. 단발에 스카프를 두르고 종로거리를 활보하다.
해방이후 특히 1960년대에 한국사회가 압축적으로 경험하였던 근대화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변화만을 수반한 것이 아니다. 대학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의 의식과 지식 생산에도 직간접의 영향을 미치면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서구의 가치들에 입각하여 현상을
5. 단발에 스카프를 두르고 종로거리를 활보하다.
해방이후 특히 1960년대에 한국사회가 압축적으로 경험하였던 근대화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변화만을 수반한 것이 아니다. 대학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의 의식과 지식 생산에도 직간접의 영향을 미치면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서구의 가치들에 입각하여 현상을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