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中南美 고대부터 식민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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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남미中南美 고대부터 식민지까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아메리카의 기원
-마야 문명 (BC 1000-AD 1200)
-마야판(1200-1480)
-우아리 문화 (Huari 700 -1200)

본문내용

제국을 증오하는 주변의 종족들과 연합하여 전쟁을 이끄는 군사적 정략으로, 톨테카족 (toltecas)과 틀락스칼떼까 족과 연합하여 전쟁을 행했다. 피사로는 코르테스의 정복 이야기를 듣고 그가 사용한 방식을 그대로 따라했다.
2. 스페인 정복자들은 철제와 화약 무기를 갖고 있었고, 당시 인디오들은 흑요석과 돌, 나무 칼 밖에 없었다.
3. 전염병은 전혀 면역체계를 갖지 못한 아메리카 인디오들에게 치명적이었고, 이는 가장 강력한 승리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잉카 이전의 안데스 지역의 문화 : 까랄(Carral, BC 2600-BC 1600) 페루 북부에서 발견된 안데스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 차빈 문화(Cultura de chavin BC 1200-BC 500), 차빈 데 우안타르(Chavin de Huantar )사원, 직물, 청동제기, 그릇 등 종교제기. 야마를 가축으로 길들임.
모체 문화(Cultura Mochica)(AD 100-600) : 페루 북부 해안 지역문화로 도자기가 유명하고 농업 기술이 발달하여 수로를 건설하였다. 모체 문화는 도자기로 유명하고, 갈대로 만든 배를 사용한 능숙한 어부이기도 했다. 모체의 시판 왕의 무덤이 원형을 유지한 채 발견되었고, 많은 금, 은, 청동 장식이 발견되었다.
피라미드: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피라미드를 지었다. 태양의 신전과 달의 신전.
나스카 문명 (AD 100-600) : 사막위에 그려진 거대한 나스코의 다양한 그림들로 그려진 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건조한 지역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음. 하늘에서만 그 형상을 알라 볼 수 있는 그림. 그림의 선의 넓이는 40센티에서 110 센티로 다양하고, 선의 길이 250 미터까지 이르는 것도 있음. 선의 깊이는 30센티를 넘지 않음
우아리 문화 (Huari 700 -1200) : 안데스 지역에서 최초로 국가의 모습으로 제국을 만들어냈는데, 후에 잉카제국에 무너지고 그 모델이 된다.
티와나쿠 제국 (tiwanaku 700-1200)
치무 제국 (chimu 1000-1470)
찬찬(chan chan)은 치무의 왕이 살던 아름다운 도시.
잉카의 황제 우아스카라에 의해 정복당함.
우앙카 문화 (huanca, 1200-1460)
잉카 문화 (1200-1532) : 안데스라는 이름은 안덴(anden)에서 유래했는데, 이들은 계단식 경작지를 보고 그것을 안덴 즉 계단이라고 붙인 데서 유래한다. 잉카 제국의 수도는 쿠스코 (Cuzco, 세계의 배꼽)였고, 1200년 경에 태양의 아들인 망코 카팍에 의해 세워졌으며, 마지막 잉카인 아타우알파까지 13대의 잉카(왕)으로 이어졌다. 쿠스코의 언어는 케추아(Quechua)이고, 제국이 확장되면서 아이마라(Aymara)등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게 되었다. 주식은 옥수수와 감자이며, 인공수로를 갖춘 계단식 경작지에서 나무막대 농구를 사용하여 농사를 지었고, 가축으로 야마와 알파카를 키우고, 고기, 털을 얻었다. (낙타과에 속하는 야마는 45 kg 이상을 견디지 못했지만 높은 고도를 견디었다) 잉카(태양의 아들이란 뜻)라는 왕을 중심으로 사회는 가족 친족 중심으로 피라미드 식로 구조화 되어 있고, 공동 경작을 하여 잉여 생산물을 국가가 분배했고, 미타라고 불리는 부역을 통해서 잉카 제국은 신전, 왕궁, 다리와 길을 건설하였다. 잉카인들은 태양신을 섬겼고, 다른 정복지의 신과 언어를 존중하였고, 따라서 비라코차 신(Viracocha), 태양신, 달의 신등 다양한 신들이 존재했다. 잉카에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키푸라는 줄을 이용하여 각종 정보를 전달하였다. 커튼 같이 나무 막대기에 줄이 주렁주렁 매달린 모양을 하고 있는 키푸는 매듭의 형태, 위치, 색깔에 따라 다른 의미를 나타냈고, 이를 읽어내는 관리도 있었다. 잉카의 건축술은 돌을 다듬는 기술로 유명한데, 요새나 왕궁 또는 신전에는 100톤이나 되는 돌이 면도칼 하나 들어가지 않게 잘 맞추어져 견고하게 건축되었다. 잉카인들은 신전보다는 상대적으로 집, 다리, 성벽, 수로, 길들을 많이 건설했다. 잉카의 도로는 제국을 연결하는 망으로서, 파차쿠텍 황제의 통치하에 만들어진 40000km의 길을 통해 100개 이상의 부족을 결합시켰다. 이 길은 넓었으며, 야마로 운반하는 상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큰 길이었다. 차스키라고 불리는 전령은 키푸스를 가지고 하루에 200km거리를 달려서 전 제국의 상황을 쿠수코의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잉카 제국의 건설(1450-1532) : 파착쿠텍은 잉카를 작은 나라에서 거대한 제국으로 만들어낸 왕이었는데, 그가 왕의 휴양도시 맞추피추를 건설하였다.
아타우알파: 잉카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포로로 잡혀서 죽임을 당하면서 잉카제국은 1532년에 멸망한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Pizarro, Francisco)와 잉카제국의 정복 : 프란시스코 피사로(1476-1541) 엑스트레 마드라의 트리히요(Trujillo) 에서 하급귀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돼지를 치고, 공부도 할 수 없었던 빈곤한 생활을 했고 1502년 군인이 되어 아메리카로 야망을 가지고 떠난다. 1519년에서 1521년에 파나마에서 엔코멘데로가 되고, 1524년부터 탐험을 2차에 걸쳐 탐험을 시작한다. 1530년 3차 원정대를(180명의 대원, 30명 상류층, 90명 중류층, 20명 하류층, 핵심 인원은 에스트레마드레의 17인 용사)를 조직하여, 왕의 허가를 받고 잉카 제국을 정복의 길을 떠난다. 1532.11.16 카하마루카에서 피사로는 잉카황제 아타우알파를 포로로 잡았는데 그날 170명의 스페인 군인들이 7천명의 아타우알파 비무장 군인들을 죽였다. 당시에 잉카황제가 와이나 카펙이 1527년부터 천연두가 돌기 시작한 천연두로 죽으면서, 왕권 다툼이 시작되면서 잉카 제국은 아타우알파와 우아스카라간의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타우알파 황제는 이복 동생 우아스카을 패배시키고, 8만명의 군과 함께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는 승리를 즐기고 있었다. 아타우알파가 군인을 무장시키지 않고 피사로를 만난 이유는 그가 170명의 스페인 군을 무시했기에,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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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06.06
  • 저작시기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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