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 1편 서 론
미중 관계의 중요성
제 2편 본 론
제 1장 미중관계의 전략적 협력관계로의 변화
1. 데탕트 이전의 미중관계개설과 중소분쟁
2. 중-미 이해관계의 합치와 관계전환을 실현하기 위한 비밀 외교
3. ‘구동존이’ 방식의 합의와 상해 공동성명
제 2장 동북아시아의 4강-다극체제의 출현
1. 중.소분쟁
제 3장 데탕트 이후 미-중 관계
1. 데탕트 이후 냉전시대(~1989)
2. 탈냉전 시기의 미-중 관계
3. 미중관계의 전략적 경쟁관계로의 전환배경(2001~)
제 4장 데탕트
1. 데탕트 detente의 의미
2. 데탕트의 시대 ( 1969년 - 1979년 )
3. 데탕트 이후 세계정세 변화
제 3편 결 론
*참고문헌*
미중 관계의 중요성
제 2편 본 론
제 1장 미중관계의 전략적 협력관계로의 변화
1. 데탕트 이전의 미중관계개설과 중소분쟁
2. 중-미 이해관계의 합치와 관계전환을 실현하기 위한 비밀 외교
3. ‘구동존이’ 방식의 합의와 상해 공동성명
제 2장 동북아시아의 4강-다극체제의 출현
1. 중.소분쟁
제 3장 데탕트 이후 미-중 관계
1. 데탕트 이후 냉전시대(~1989)
2. 탈냉전 시기의 미-중 관계
3. 미중관계의 전략적 경쟁관계로의 전환배경(2001~)
제 4장 데탕트
1. 데탕트 detente의 의미
2. 데탕트의 시대 ( 1969년 - 1979년 )
3. 데탕트 이후 세계정세 변화
제 3편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소간의 신냉전은 이미 미-소 두 강대국간의 대결일 뿐이지 이전처럼 전세계적 범위에서의 양진영간 총체적 대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 3편 결 론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래로 4단계 국면을 거치면서 전개되어 왔다. 처음 20여 년 동안 미국과 중국은 양국 지도자들의 이념적 차이로 인해 본질적으로는 서로 적대적이었다. 이러한 초기 시기에 양국간에는 간헐적인 군사적 대립, 경제적, 문화적 유대관계의 결여, 외교적 접촉의 제한 등과 같은 양상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이 상대방의 관심과 성취 능력을 파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상호 관계는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아직도 소모적인 분쟁거리는 남아있었다. 양국은 정상화된 경제적, 문화적 관계들을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버리고 상대방에 대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력을 유지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과 중국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양국 모두 소련과의 관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1969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미국과 중국은 소련에 대하여 전략적 제휴관계를 유지하였다.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1978년 미중 국교 정상화 등을 통해 묵시적으로 이루어진 양국간 동맹관계는 미국과 중국에서 흥분을 불러일으켰고 우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시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중 관계는 열정적인 연애관계라기보다는 편의상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미국과 중국 모두 상대방에 대해서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혹은 상대방과 소련관의 대립관계에 개입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양국은 각각 상대방이 비밀스럽게 소련과 화해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미중 관계의 두 번째 국면에서 이루어진 쌍무적 유대관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비록 무역상의 교역 증대, 군사적 관계의 개시, 초보적인 학술 교류 등이 있었지만, 이러한 미중 관계의 유대적 측면들은 양국 관계의 잠재력에 비해 그 정도가 매우 낮은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미중 관계가 세 번째 국면으로 접어드는데 이 시기는 아마도 미국이 중국의 현대화와 개혁에 협조하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전개는 과거 소련에 대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한 것보다 극적이지는 못 했으나 전략적 화해 시기보다는 양국간의 제휴관계가 광범위하고 적극적이었다. 전략적 제휴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이익들, 즉 소련의 침공을 물리치고 전세계 차원에서 소련의 패권수립을 막는다는 목표는 어떤 의미에서 수동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반면에 경제적 제휴관계로부터 얻어지는 이익들, 즉 미국이 중국 시장에 접근하고 중국이 미국의 기술과 자본에 접근하였을 때 양국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능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경제적 제휴관계를 통해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국부와 국력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물질적 지원과 기술적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에 미국은 중국이 미국의 가치와 제도를 수용, 이러한 가치와 제도로 전환하고자 하는 열렬한 학생으로 보았다. 이 적극적인 관계 모색을 통해 1970년대의 양국 관계를 훨씬 뛰어넘는 관계 발전이 가능하였다. 무역, 투자, 학술교류, 문화교류 등이 괄목할 정도로 증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이르러 미중 관계의 세 번째 국면은 이미 잠식되기 시작하였다. 쌍무적 유대관계가 확대됨에 따라 양국간에 이익과 손실을 어떻게 할당할 것인가를 놓고 불만이 증대되었던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무역여건과 투자여건을 비난하였는데 중국의 덤핑수출, 수입제한, 해외직접투자 여건미비 등을 비난하였다. 반면에 중국은 나름대로 미국 시장 접근을 방해하는 장애물, 미국의 기술수출에 대한 통제, 유능한 학생과 교수의 유출 등에 대한 불만을 거론하면서 이에 응수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양국 사회의 상호 침투가 점차 증대하면서 잠시 덮어두었던 이데올로기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많은 보수적 중국인들은 미국과의 경제적 제휴관계를 통해 미국의 기술 뿐만 아니라 미국의 가치들이 유입되는 것을 우려하였다. 한편, 미국인들은 중국의 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중국 내에서 아직도 인권 침해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양국의 차이점들이 부각되면서 양국은 점차 공동 목적을 규정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는 미중 관계의 세 번째 국면을 종결시키고 미국과 중국을 불신의 새로운 시기로 몰아놓은 극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양국 정부는 상대방을 의심하게 되었다. 북경은 미국이 교묘하게 중국의 공산주의 통치를 전복하려는 정책을 수행하여 왔다고 결론지었고, 워싱턴은 중국이 더 이상 쌍무적 쟁점과 국제적 쟁점에 있어서 미국의 이해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많은 미국인들이 중국 정부가 인권, 무역, 해외무기판매 등에 대한 정책을 바꾸도록 중국에 대한 제재를 강화할 것을 주장함에 따라 양국관계를 지지하는 정치적 토대는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로 양국 정부가 상대방에 대해 공식적인 제재를 가했기 때문에, 그리고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미국 사회에서 일어난 반응으로 인해 양국간의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 유대관계는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미중 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 조건들이 유동적이기 때문에 양국 관계의 미래를 예견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우선 국제 전략 환경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소련이 겪고 있는 심각한 내부 진통과 동유럽에서 소련의 몰락이 양극 시대의 종결을 표시하는 징표라는 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탈냉전시기의 세계가 몇몇 주요 강대국을 중심으로 움직여 나갈 것인가 아니면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아 이를 중심으로 움직여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합치된 의견이 있지 않다. 물론 탈냉전 이후 전세계적 차원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줄어들었지만, 양극 체제의 쇠퇴와 더불어 지역분쟁이 새롭게 증가하고 있다.
또한 국제경제의 미래 역시 불투명한 상태이다. 어떤 사람들은 전세계 차원의 자유무역을 보장하는 전후 국제제도들이, 특히 관세와 무역에 대한 일반 협정은 겨
제 3편 결 론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래로 4단계 국면을 거치면서 전개되어 왔다. 처음 20여 년 동안 미국과 중국은 양국 지도자들의 이념적 차이로 인해 본질적으로는 서로 적대적이었다. 이러한 초기 시기에 양국간에는 간헐적인 군사적 대립, 경제적, 문화적 유대관계의 결여, 외교적 접촉의 제한 등과 같은 양상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이 상대방의 관심과 성취 능력을 파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상호 관계는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아직도 소모적인 분쟁거리는 남아있었다. 양국은 정상화된 경제적, 문화적 관계들을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버리고 상대방에 대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력을 유지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과 중국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양국 모두 소련과의 관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1969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미국과 중국은 소련에 대하여 전략적 제휴관계를 유지하였다.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1978년 미중 국교 정상화 등을 통해 묵시적으로 이루어진 양국간 동맹관계는 미국과 중국에서 흥분을 불러일으켰고 우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시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중 관계는 열정적인 연애관계라기보다는 편의상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미국과 중국 모두 상대방에 대해서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혹은 상대방과 소련관의 대립관계에 개입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양국은 각각 상대방이 비밀스럽게 소련과 화해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미중 관계의 두 번째 국면에서 이루어진 쌍무적 유대관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비록 무역상의 교역 증대, 군사적 관계의 개시, 초보적인 학술 교류 등이 있었지만, 이러한 미중 관계의 유대적 측면들은 양국 관계의 잠재력에 비해 그 정도가 매우 낮은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미중 관계가 세 번째 국면으로 접어드는데 이 시기는 아마도 미국이 중국의 현대화와 개혁에 협조하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전개는 과거 소련에 대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한 것보다 극적이지는 못 했으나 전략적 화해 시기보다는 양국간의 제휴관계가 광범위하고 적극적이었다. 전략적 제휴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이익들, 즉 소련의 침공을 물리치고 전세계 차원에서 소련의 패권수립을 막는다는 목표는 어떤 의미에서 수동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반면에 경제적 제휴관계로부터 얻어지는 이익들, 즉 미국이 중국 시장에 접근하고 중국이 미국의 기술과 자본에 접근하였을 때 양국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능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경제적 제휴관계를 통해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국부와 국력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물질적 지원과 기술적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에 미국은 중국이 미국의 가치와 제도를 수용, 이러한 가치와 제도로 전환하고자 하는 열렬한 학생으로 보았다. 이 적극적인 관계 모색을 통해 1970년대의 양국 관계를 훨씬 뛰어넘는 관계 발전이 가능하였다. 무역, 투자, 학술교류, 문화교류 등이 괄목할 정도로 증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이르러 미중 관계의 세 번째 국면은 이미 잠식되기 시작하였다. 쌍무적 유대관계가 확대됨에 따라 양국간에 이익과 손실을 어떻게 할당할 것인가를 놓고 불만이 증대되었던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무역여건과 투자여건을 비난하였는데 중국의 덤핑수출, 수입제한, 해외직접투자 여건미비 등을 비난하였다. 반면에 중국은 나름대로 미국 시장 접근을 방해하는 장애물, 미국의 기술수출에 대한 통제, 유능한 학생과 교수의 유출 등에 대한 불만을 거론하면서 이에 응수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양국 사회의 상호 침투가 점차 증대하면서 잠시 덮어두었던 이데올로기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많은 보수적 중국인들은 미국과의 경제적 제휴관계를 통해 미국의 기술 뿐만 아니라 미국의 가치들이 유입되는 것을 우려하였다. 한편, 미국인들은 중국의 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중국 내에서 아직도 인권 침해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양국의 차이점들이 부각되면서 양국은 점차 공동 목적을 규정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는 미중 관계의 세 번째 국면을 종결시키고 미국과 중국을 불신의 새로운 시기로 몰아놓은 극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양국 정부는 상대방을 의심하게 되었다. 북경은 미국이 교묘하게 중국의 공산주의 통치를 전복하려는 정책을 수행하여 왔다고 결론지었고, 워싱턴은 중국이 더 이상 쌍무적 쟁점과 국제적 쟁점에 있어서 미국의 이해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많은 미국인들이 중국 정부가 인권, 무역, 해외무기판매 등에 대한 정책을 바꾸도록 중국에 대한 제재를 강화할 것을 주장함에 따라 양국관계를 지지하는 정치적 토대는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로 양국 정부가 상대방에 대해 공식적인 제재를 가했기 때문에, 그리고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미국 사회에서 일어난 반응으로 인해 양국간의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 유대관계는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미중 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 조건들이 유동적이기 때문에 양국 관계의 미래를 예견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우선 국제 전략 환경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소련이 겪고 있는 심각한 내부 진통과 동유럽에서 소련의 몰락이 양극 시대의 종결을 표시하는 징표라는 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탈냉전시기의 세계가 몇몇 주요 강대국을 중심으로 움직여 나갈 것인가 아니면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아 이를 중심으로 움직여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합치된 의견이 있지 않다. 물론 탈냉전 이후 전세계적 차원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줄어들었지만, 양극 체제의 쇠퇴와 더불어 지역분쟁이 새롭게 증가하고 있다.
또한 국제경제의 미래 역시 불투명한 상태이다. 어떤 사람들은 전세계 차원의 자유무역을 보장하는 전후 국제제도들이, 특히 관세와 무역에 대한 일반 협정은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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