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낭만주의
2. 역사주의의 본질과 그 역사
1) 역사주의의 개념
2) 역사주의의 연원과 18세기까지의 형성과정
3) 19세기의 역사주의의 완성과 “역사학파”들의 형성
4) 세기전환기의 역사주의의 위기와 신이상주의
5) 역사주의의 문제점들과 그 극복을 위해
2. 역사주의의 본질과 그 역사
1) 역사주의의 개념
2) 역사주의의 연원과 18세기까지의 형성과정
3) 19세기의 역사주의의 완성과 “역사학파”들의 형성
4) 세기전환기의 역사주의의 위기와 신이상주의
5) 역사주의의 문제점들과 그 극복을 위해
본문내용
나하면 세기말에는 독일학문이 근거하고 있던 이상주의가 대중화된 산업기술 사회에서 붕괴되어 갔고, 이러한 사회의 복합적인 현상들과 그 진행을 기존의 역사학은 성공적으로 취급하지 못하고 있었기 Eons이다. 그런가 하면 실증주의적 연구방법은 오히려 새로운 구체적 방법론을 통해 성과를 거두면서 더욱 확산되어 갔고, 더욱이 역사주의에 대해서는, 모든 개체들의 고유성을 강조함으로써 상대주의에 빠지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었다. 실로 역사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따라서 역사주의의 이 1차 위기는 19세기 말부터, 즉 1차 세계대전 전에 이미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빈델반트(W. Windelband)는 세기 말의 이러한 위기에 즈음하여 제자인 릭케르트(H. Rickert)와 함께 역사학적 방법을 새로이 정의하여 그 고유성을 부각시켜 보고자 시도했다. 그는 『역사와 자연과학』(1894)에서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며 “개성기술적(dioigraphisch)\"인가 하면, 자연과학은 일발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며 ”법칙정립적“(nomothetisch)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릭케르트는 『문화과학과 자연과학』(1899)에서 역사를 포함한 문화과학은 ”개별적“ 방법에, 자연과학은 ”일반화적“ 방법에 각각 근거하며, 전자는 價値關係的으로 후자는 몰가치적으로 파악한다고 정의했다.
이와같이 신칸트학파〔서남 독일학파〕의 이들 두사람은 모두 함께 실증주의적자연과학작 방법론에 대립하여 정신과학의 고유한 방법을 인식이론적으로 전개시켰다. 그러나 이 시도는 두 학문을 형식논리적으로 구분하는데 그쳤고, 역사인식에 있어서의 상대주의를 극복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문제점들을 더 심화시키고 말았다. 이들보다는 더 심오하게 정신작용의 구조와 의미를 새로이 부각시킨 인물을 딜타이였다.
딜타이가 『정신과학의 기초구축』(1905)과 『정신과학에서의 역사세계의 구성』(1910)에서 시도한 것은 정신과학의 방법론적 특성에 자체의 근거를 마련해 줌으로써 정시과학을 자연과학적 방법에 기초한 실증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그 근거는 理解理論이었다. 그는 역사생활에서는 정신이, 의식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며, 사회법칙들이란 정신행위의 표현들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정신생활의 구조연관을 통찰하는 일이 일차적인 과제이다. 그리고 이것을 인식하는 주제는 생동적인 역사 속에 있으므로, 불합리한 성격도 지니고 있는 생의 구조를 이해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그는 정신의 구조와 그 작용관계를 치밀하게 분석하여 해석학적 이해론을 세웠다. 新理想主義, 또는 新歷史主義로 불리는 그의 이론은 비꼬, 훔볼트, 드로이젠 등에게서 논의되어 왔던 이해의 원리를 거의 완성적으로 해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해이론은 정신구조의 해명에 국한된 반면에, 실제의 역사세계 속에서 분석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결국 상대주의를 구체적현실적으로 극복하는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력은 진지한 것이었다. 즉 그는 세기 전환의 시기에 유럽이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정신생활의 구조를 생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분석하여 역사현실에 대한 이해태도를 세워보고자 했고, 이것이 곧 생의 문제들에 대한 각성임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점에 그의 生의 哲學(Lebensphilosophie)의 의미가 있다.
역사주의는 1차 세계대전 후 제 2의 위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독일민족의 패전으로부터 전통적인 역사사상과 그 방법론에 대한 회의가 자체 내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찾아온 것이었다.
트뢸취는 신학자이자 철학자로서 이 위기에 즈음하여 『역사주의와 그 문제점들』(1922)에서 딜타이에 뒤이어 역사적 사고의 성격과 방법론을 해명했다. 그는 데카르트와 라이프닛츠에게서 시작된 사상의 세속화와 자연주의적 세계상의 생성, 실증주의의 자연과학적 사고, 역사주의의 역사적발생적 사고 동을 추적하면서 역사주의를 하나의 정신현상으로, “정신의 자기이해”로서 보았고, 그 본질은 발전사상이라고 파악했다. 여기서 그는 가치평가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한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치란, 비록 상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우연적무정부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 속에서 형성되어 항상 생동하는,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모든 사상과 지식을 오히려 철저하게 역사화 시켜보는 것은 정치적사회적 생활관계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일로 된다. 그리하여 그는 서양문명의 무든 사상을, 가치들을 해당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이른바 “현재적인 문화종합(die gegenwartige Kultursyntese)\"을 이룩해 보는 일이 역사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이라고 제시했다. 이것은 각 시대의 이상과 현실의 역사적 권리를 인정하는, 그리고 모든 시대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로서, 말하자면 역사주의의 원정에로의 회귀이다. 그의 사고와 노력은 실로 진지한 것이었으나, 그의 제안한 바가 상대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되지는 못한다.
마이넥케(F. Meinecke)는 이미 1차 세계대전 전에 역사주의의 1차 위기를 겪으면서 『세계시민성과 민족국가』(1907)에서 개체사상과 보편주의의 조화를 시도했었다. 즉 그는 독일이 독자적인 민족국가로서 발전해 나갔던 과정을 보편주의적 이념과 결밥해 갔던 과정으로 파악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이념과 그 유산에도 역사적 권리를 부여했다. 요컨대 그는 민족과 국가를 개체로 보는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그 고유성을 강조하는 사고전통과 보편주의적 이념은 상호 조화되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역사학은 그 본질상 보편주의적임과 동시에 민족적이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민족이념을 인간성 이념 및 유럽 인염과 포괄시켜서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후의 2차 위기에서는『歷史主義의 生成』(1933)을 통해 개체사상과 발전사상이 유럽정신사에 결정적인 전환을 이룩했다는 점을 해명하여 역사주의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그는 라이프닛츠의 보편주의적 세계파악, 아놀드의 경건주의, 비코의 인간성철학, 볼테르의 문화사, 몽테스큐의 자연법적 합리주의, 버크의 전통주의 등이 역사주의의 d서
빈델반트(W. Windelband)는 세기 말의 이러한 위기에 즈음하여 제자인 릭케르트(H. Rickert)와 함께 역사학적 방법을 새로이 정의하여 그 고유성을 부각시켜 보고자 시도했다. 그는 『역사와 자연과학』(1894)에서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며 “개성기술적(dioigraphisch)\"인가 하면, 자연과학은 일발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며 ”법칙정립적“(nomothetisch)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릭케르트는 『문화과학과 자연과학』(1899)에서 역사를 포함한 문화과학은 ”개별적“ 방법에, 자연과학은 ”일반화적“ 방법에 각각 근거하며, 전자는 價値關係的으로 후자는 몰가치적으로 파악한다고 정의했다.
이와같이 신칸트학파〔서남 독일학파〕의 이들 두사람은 모두 함께 실증주의적자연과학작 방법론에 대립하여 정신과학의 고유한 방법을 인식이론적으로 전개시켰다. 그러나 이 시도는 두 학문을 형식논리적으로 구분하는데 그쳤고, 역사인식에 있어서의 상대주의를 극복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문제점들을 더 심화시키고 말았다. 이들보다는 더 심오하게 정신작용의 구조와 의미를 새로이 부각시킨 인물을 딜타이였다.
딜타이가 『정신과학의 기초구축』(1905)과 『정신과학에서의 역사세계의 구성』(1910)에서 시도한 것은 정신과학의 방법론적 특성에 자체의 근거를 마련해 줌으로써 정시과학을 자연과학적 방법에 기초한 실증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그 근거는 理解理論이었다. 그는 역사생활에서는 정신이, 의식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며, 사회법칙들이란 정신행위의 표현들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정신생활의 구조연관을 통찰하는 일이 일차적인 과제이다. 그리고 이것을 인식하는 주제는 생동적인 역사 속에 있으므로, 불합리한 성격도 지니고 있는 생의 구조를 이해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그는 정신의 구조와 그 작용관계를 치밀하게 분석하여 해석학적 이해론을 세웠다. 新理想主義, 또는 新歷史主義로 불리는 그의 이론은 비꼬, 훔볼트, 드로이젠 등에게서 논의되어 왔던 이해의 원리를 거의 완성적으로 해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해이론은 정신구조의 해명에 국한된 반면에, 실제의 역사세계 속에서 분석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결국 상대주의를 구체적현실적으로 극복하는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력은 진지한 것이었다. 즉 그는 세기 전환의 시기에 유럽이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정신생활의 구조를 생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분석하여 역사현실에 대한 이해태도를 세워보고자 했고, 이것이 곧 생의 문제들에 대한 각성임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점에 그의 生의 哲學(Lebensphilosophie)의 의미가 있다.
역사주의는 1차 세계대전 후 제 2의 위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독일민족의 패전으로부터 전통적인 역사사상과 그 방법론에 대한 회의가 자체 내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찾아온 것이었다.
트뢸취는 신학자이자 철학자로서 이 위기에 즈음하여 『역사주의와 그 문제점들』(1922)에서 딜타이에 뒤이어 역사적 사고의 성격과 방법론을 해명했다. 그는 데카르트와 라이프닛츠에게서 시작된 사상의 세속화와 자연주의적 세계상의 생성, 실증주의의 자연과학적 사고, 역사주의의 역사적발생적 사고 동을 추적하면서 역사주의를 하나의 정신현상으로, “정신의 자기이해”로서 보았고, 그 본질은 발전사상이라고 파악했다. 여기서 그는 가치평가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한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치란, 비록 상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우연적무정부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 속에서 형성되어 항상 생동하는,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모든 사상과 지식을 오히려 철저하게 역사화 시켜보는 것은 정치적사회적 생활관계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일로 된다. 그리하여 그는 서양문명의 무든 사상을, 가치들을 해당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이른바 “현재적인 문화종합(die gegenwartige Kultursyntese)\"을 이룩해 보는 일이 역사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이라고 제시했다. 이것은 각 시대의 이상과 현실의 역사적 권리를 인정하는, 그리고 모든 시대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로서, 말하자면 역사주의의 원정에로의 회귀이다. 그의 사고와 노력은 실로 진지한 것이었으나, 그의 제안한 바가 상대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되지는 못한다.
마이넥케(F. Meinecke)는 이미 1차 세계대전 전에 역사주의의 1차 위기를 겪으면서 『세계시민성과 민족국가』(1907)에서 개체사상과 보편주의의 조화를 시도했었다. 즉 그는 독일이 독자적인 민족국가로서 발전해 나갔던 과정을 보편주의적 이념과 결밥해 갔던 과정으로 파악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이념과 그 유산에도 역사적 권리를 부여했다. 요컨대 그는 민족과 국가를 개체로 보는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그 고유성을 강조하는 사고전통과 보편주의적 이념은 상호 조화되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역사학은 그 본질상 보편주의적임과 동시에 민족적이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민족이념을 인간성 이념 및 유럽 인염과 포괄시켜서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후의 2차 위기에서는『歷史主義의 生成』(1933)을 통해 개체사상과 발전사상이 유럽정신사에 결정적인 전환을 이룩했다는 점을 해명하여 역사주의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그는 라이프닛츠의 보편주의적 세계파악, 아놀드의 경건주의, 비코의 인간성철학, 볼테르의 문화사, 몽테스큐의 자연법적 합리주의, 버크의 전통주의 등이 역사주의의 d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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