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1.머릿말
본론 2.독일시민사회의 ‘특수한 길’
3.교양의 이념
4 교양시민층의 구성
결론 5.맺는말
본론 2.독일시민사회의 ‘특수한 길’
3.교양의 이념
4 교양시민층의 구성
결론 5.맺는말
본문내용
이 누렸던 신분적 특권은 물론 그 관직에 관하여서도 18세기말에 이르도록 어떠한 법적 보장도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국왕의 절대주의와 한번도 대항관계를 이루지 못하였음은 물론 자기들의 지위의 안정과 보장을 기존의 권력체제에 의존함으로써 확보하고자 하였다.
계몽 관료 엘리트로서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스라우의 수요회 중심의 사법관료그룹과 케니히스베르크의 행정관료그룹 -그 성립의 배경에는 그 지역에서의 수출무역의 번영과 농업의 급속한 비약이라는 경제발전이 있었다.-은 점차 볼프의 영향에서 벗어나 프랑스의 ‘사회계약’에 기울어지고 영국의 자유주의에 매료되었으며 특히 케니히스베르크에서는 칸트의 국가학과 아담 스미스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관료와 학자 및 부르주아라는 귀족과 시민의 요소가 융합되고 정치적 계몽의 이념이 뿌리를 내렸으며 그 모든 것은 장차 슈타인하르덴베르크의 개혁운동의 추진력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변화는 대왕의 신봉자로부터 칸트와 서구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로의, 다시 말하여 ‘국왕의 관료’에서 ‘국가의 관료’에로의 독일 관료층의 바람직한 변모를 그리고 ‘위로부터의 개혁’의 주체로서의 그들의 새로운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교양시민층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다한 것으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대학교수이니, 그들은 교양 이념의 형성자이자 교양 시민층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였다.
독일 사회의 봉건체제 그대로의 신분 계층적 구조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여러 영역의 엘리트들이 교류하는 개방적인 살롱이나 카페, 아카데미나 클럽을 독일에서는 오랫동안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고 그에 대신하여 교양시민층, 그 중에서도 특히 교수와 문필가들은 이른바 ‘학자공화국’이라는 그들만의 특수한 폐쇄적 집단을 형성하였다.
독일 문화 내지 독일적 지성의 특수성과 문제성은 무엇보다도 그 대학문화적 성격에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운동이 시민적 인문주의운동으로서 전개되고 17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과학혁명과 근대사상이 거의 대학 밖에서 시민사회를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의 대다수가 대학 밖에서 활동한 ‘자유로운 문필가’였다는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18세기 후반에서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독일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철학자사상가는 물론 시인작가까지도 적지 않게 학자 공동체의 주민 즉 대학교수 혹은 아카3데미 엘리트였다는 사실은 실로 놀랄만하다고 할 것이다.
대학과 교수에 의한 문화의 독점에도 점차 변화가 나타났다. 즉 토마지우스가 교단에서 아카데미 드레스를 벗어버린 같은 시기에 레싱은 할레 대학을 공격하였으며 18세기의 뛰어난 학자 중에서 예외적으로 대학인이 아니었던 빈켈만을 패단티즘과 함께 대학의 학풍을 비판하고 조소하였으며 학문과 사회간의 바람직한 관련을 희구하였으니 그러한 풍조는 이제까지의 대학문화의 퇴조를 그리고 폭넓은 새로운 시민문화의 태동을 고지한다고 할 것이다.
5. 맺는 말
독일에서도 중세말 도시가 보다 자율적이고 그에 힘입어 시민계급이 번영하였음을 당시 민족적 특성으로 아로새긴 시민적인 문화가 형성되었었다. 그리하여 그대 문화와 더불어 교양도 여러 계층의 공유재산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누렸다. 그러나 30년 전란뒤의 도시의 황폐와 영방적 분립은 문화적인 동질성까지도 파괴하여 여러 신분과 계층의 차이를 뛰어 넘어 국민 전체의 일체감을 창출하고 수렴하는 ‘공공성’ 및 ‘공중’의 부재는 물론, 독일 문화에 ‘국민적 양식’을 18세기까지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 독일에서도 점진적으로 지적인 변화가 나타났으며 그 주도적 역할을 다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교양시민층이었다.
계몽 관료 엘리트로서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스라우의 수요회 중심의 사법관료그룹과 케니히스베르크의 행정관료그룹 -그 성립의 배경에는 그 지역에서의 수출무역의 번영과 농업의 급속한 비약이라는 경제발전이 있었다.-은 점차 볼프의 영향에서 벗어나 프랑스의 ‘사회계약’에 기울어지고 영국의 자유주의에 매료되었으며 특히 케니히스베르크에서는 칸트의 국가학과 아담 스미스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관료와 학자 및 부르주아라는 귀족과 시민의 요소가 융합되고 정치적 계몽의 이념이 뿌리를 내렸으며 그 모든 것은 장차 슈타인하르덴베르크의 개혁운동의 추진력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변화는 대왕의 신봉자로부터 칸트와 서구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로의, 다시 말하여 ‘국왕의 관료’에서 ‘국가의 관료’에로의 독일 관료층의 바람직한 변모를 그리고 ‘위로부터의 개혁’의 주체로서의 그들의 새로운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교양시민층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다한 것으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대학교수이니, 그들은 교양 이념의 형성자이자 교양 시민층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였다.
독일 사회의 봉건체제 그대로의 신분 계층적 구조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여러 영역의 엘리트들이 교류하는 개방적인 살롱이나 카페, 아카데미나 클럽을 독일에서는 오랫동안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고 그에 대신하여 교양시민층, 그 중에서도 특히 교수와 문필가들은 이른바 ‘학자공화국’이라는 그들만의 특수한 폐쇄적 집단을 형성하였다.
독일 문화 내지 독일적 지성의 특수성과 문제성은 무엇보다도 그 대학문화적 성격에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운동이 시민적 인문주의운동으로서 전개되고 17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과학혁명과 근대사상이 거의 대학 밖에서 시민사회를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의 대다수가 대학 밖에서 활동한 ‘자유로운 문필가’였다는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18세기 후반에서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독일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철학자사상가는 물론 시인작가까지도 적지 않게 학자 공동체의 주민 즉 대학교수 혹은 아카3데미 엘리트였다는 사실은 실로 놀랄만하다고 할 것이다.
대학과 교수에 의한 문화의 독점에도 점차 변화가 나타났다. 즉 토마지우스가 교단에서 아카데미 드레스를 벗어버린 같은 시기에 레싱은 할레 대학을 공격하였으며 18세기의 뛰어난 학자 중에서 예외적으로 대학인이 아니었던 빈켈만을 패단티즘과 함께 대학의 학풍을 비판하고 조소하였으며 학문과 사회간의 바람직한 관련을 희구하였으니 그러한 풍조는 이제까지의 대학문화의 퇴조를 그리고 폭넓은 새로운 시민문화의 태동을 고지한다고 할 것이다.
5. 맺는 말
독일에서도 중세말 도시가 보다 자율적이고 그에 힘입어 시민계급이 번영하였음을 당시 민족적 특성으로 아로새긴 시민적인 문화가 형성되었었다. 그리하여 그대 문화와 더불어 교양도 여러 계층의 공유재산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누렸다. 그러나 30년 전란뒤의 도시의 황폐와 영방적 분립은 문화적인 동질성까지도 파괴하여 여러 신분과 계층의 차이를 뛰어 넘어 국민 전체의 일체감을 창출하고 수렴하는 ‘공공성’ 및 ‘공중’의 부재는 물론, 독일 문화에 ‘국민적 양식’을 18세기까지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 독일에서도 점진적으로 지적인 변화가 나타났으며 그 주도적 역할을 다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교양시민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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