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 서평 - 중국근세사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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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옹정제 서평 - 중국근세사 레포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내용 요약

1장. 고뇌하는 노황제
2장. 개가 되고 돼지가 되라
3장.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
4장. 천명을 받들어
5장. 총독 삼인방
6장. 충의는 민족을 초월한다
7장. 독재정치의 한계

Ⅱ. 한계와 비판점

Ⅲ. 영향과 의의
Ⅳ.소감

본문내용

宮崎市定, 『옹정제』서평
Ⅰ. 내용 요약
1장. 고뇌하는 노황제
강희제는 대내적으로는 반란의 평정, 대외적으로는 타이완 병합, 외몽골 보호, 준가르부 토벌 등의 무공을 세우며 청조를 반석 위에 올렸다. 그러나 그가 노쇠해감에 따라 35명에 이르는 황자의 존재가 골칫거리가 되었다. 강희제는 그 중 유일한 적자인 이아거(二阿哥)를 매우 아꼈고, 그의 나이 불과 2세 때에 그를 황태자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황태자는 강희제의 기대와 달리 답답한 황제수업에 싫증을 느꼈고, 일찍이 지명된 황태자의 주변에 들러붙은 청탁꾼들과 결합해 거대한 정치권력이 되었다. 이런 황태자의 행실이 맘에 들지 않던 차에, 황태자가 쿠데타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연이어 들려오자 강희제는 결국 황태자를 폐위한다. 그러나 황태자가 폐위되자마자 나머지 아들들이 팔아거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한 모종의 움직임을 보이자 강희제는 황자들의 권력투쟁에 엄청나게 실망한다. 강희제는 결국 이아거를 황태자로 복위시키기로 결정했으나, 이아거를 둘러싼 불온한 움직임은 멈출 줄 몰랐고, 결국 강희제는 다시금 황태자를 폐위한다는 결심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 강희제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 임종이 가까워져 황자들이 집결한다. 또 하나의 유력 후보로 평가되던 십사아거가 준가르부 정벌에 나가 있던 시점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8명의 황자 중 후계자로 지명된 것은 의외로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던 사아거, 즉 옹정제였다.
2장. 개가 되고 돼지가 되라
강희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옹정제의 지위는 확고부동해 보였다. 우선 옹정제의 사려 깊음, 학문과 문예, 선학에 대한 조예 등이 높은 평판을 자아냈다. 그리고 옹정제의 생모인 태후도 건재했다. 또한 준가르부 정벌로 서부 국경에서 대군을 장악하고 있었던 십사아거는 옹정제의 동복형제였으며, 그 휘하의 군무 총괄자인 총독 연갱요(年羹堯)의 누이는 옹정제의 총애받는 후궁이었다. 이 모든 것은 옹정제의 황좌가 확고부동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옹정제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바로 그의 즉위가 강희제의 의지가 아닌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옹정제는 이런 소문의 출처를, 강희제 생전에 황태자가 되고자 하는 의도를 가장 뚜렷하게 내비추었던 팔아거의 소행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팔아거가 실제로 옹정제에 대한 모종의 음모를 꾀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옹정제의 눈에 비친 팔아거의 모든 행동은 옹정제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옹정제의, 정무에 대한 거듭된 질책과 계속되는 의심에, 팔아거는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에 이르게 된다. 끝내 옹정제는 팔아거를 평민으로 강등시키라는 명을 내리는데, 팔아거에게 평민으로서의 이름을 정할 기회를 주자, 팔아거는 “개.”라고 대답한다. 이로써 팔아거는 ‘개’가 된 채로 독방에서 감금 생활을 하게 된다.
팔아거와 절친했던 구아거도 옹정제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옹정제는 구아거를 옹정제의 충복인 총독 연갱요의 감시 하에 두어 죄수나 다름없는 대접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닝의 구아거와 베이징의 구아거의 아들은 종종 로마자로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이 비밀편지가 발각되어 옹정제의 큰 의심을 산다. 결국 구아거도 황족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평민으로서 개명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옹정제에 의해 ‘돼지’로 명명된다. 결국 돼지는 독방에 감금된 채로 병에 걸려 옥사하고 만다.
옹정제의 친동생 십사아거도 박해의 대상이 되었는데, 십사아거가 수도로 소환되었을 때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개선행사를 문의한 점, 군신의 예가 아닌 형제간의 의례로 황제를 배알하려 한 점 등이 옹정제의 심중에 거슬려, 그는 건륭제가 즉위할 때까지 감금생활을 하게 된다.
형제들과의 싸움이 끝나고 옹정제의 황제 권력은 드디어 제자리를 잡은 듯 했다. 그러나 옹정제는 자신의 후세에는 그러한 권력 투쟁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제도로 태자밀건법을 고안해낸다. 건륭제가 가경제에게 직접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이 태상황이 된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태자밀건법은 청조 내내 지켜졌고, 여러 황자들이 권력 투쟁 없이 황제의 마음에 들고자 수양에 힘쓰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팔, 구, 십사아거 등과는 달리 옹정제가 총애한 형제도 있었다. 십삼아거 이친왕이 그 예이다. 이친왕은 성실, 정직한 인물이었고 옹정제에 대한 충성을 늦추지 않았다. 이에 옹정제는 이친왕을 가장 충실한 심복 신하로 삼게 된다. 그런 이친왕이 옹정 8년에 세상을 떠난다. 이 때 옹정제는 황제의 이름자를 피해 允으로 바꾸었던 이친왕의 이름을, 다시 황제의 휘인 胤으로 고치게 했을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고 한다. 냉혹해 보이는 독재군주라고 해도, 그에게 충을 다하는 형제, 신하에게는 애정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3장.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
태조-태종-세조-성조-세종(옹정제)로 이루어지는 청 황실의 계보는 옹정제의 경우가 그랬듯 적장자의 계승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맏아들은 태조 홍타이지가 아닌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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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5.03
  • 저작시기2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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