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임진왜란 역사관
1). 임진왜란 역사관이란?
2). 임진왜란 역사관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2.동래 부동헌
1). 동래 부동헌이란?
2). 동래 부동헌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3. 송공단
1). 송공단이란?
2). 송공단과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4. 복천 박물관과 복천동 고분군
1). 복천 박물관이란?
2). 복천동 고분군
3.) 복천 박물관과 복천동 고분군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5. 동래읍성
1). 동래읍성은?
2). 동래읍성 역사 축제란?
3). 동래읍성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6.동래향교
1). 동래향교란?
2). 동래향교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7.끝 마무리
1). 임진왜란 역사관이란?
2). 임진왜란 역사관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2.동래 부동헌
1). 동래 부동헌이란?
2). 동래 부동헌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3. 송공단
1). 송공단이란?
2). 송공단과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4. 복천 박물관과 복천동 고분군
1). 복천 박물관이란?
2). 복천동 고분군
3.) 복천 박물관과 복천동 고분군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5. 동래읍성
1). 동래읍성은?
2). 동래읍성 역사 축제란?
3). 동래읍성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6.동래향교
1). 동래향교란?
2). 동래향교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7.끝 마무리
본문내용
에 대한 나의 생각
이 박물관은 초등학교 때 가족과 함께 방문 해 봤던 곳이다. 확실히 어렸을 때 왔을 때랑 이번에 왔을 때 느낀점이 조금 다른거 같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을 다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꼼꼼히 보려했다. 이번에 방문했을 때는 먼저 복천박물관과 고분군이 어떠한 곳인지 알아보고 가서 무덤에 대해 더 자세히 봤다. 삼국시대의 유적을 보면서 순장이라는 것과 자신의 재물에 대한 욕심을 알 수 있었다.
5. 동래읍성
5-1 동래읍성이란?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동래 시가지 중심 지역인 평탄지 일부를 포함한다.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축조되어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모두 갖춘 읍성이다. 성의 둘레는 1,962m, 높이 0.5~3m이며, 넓이는 103,647㎡이다. 삼한시대에 건립되었으나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수축(修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위시해 군·관민이 함께 장렬한 전투를 벌였던 최대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어 있던 것을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이 현재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읍성에는 동·서·남문과 암문(暗門)의 4개 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있었는데,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 하였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두었고 나머지 3개 문에도 옹성을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5-2 동래읍성 역사 축제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을 지키기 위해 송상현 동래부사와 동래읍성민들이 일치단결하여 결사 항전하던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실제의 긴박한 전투상황을 재현하고, 조선시대 동래장터재현 등 읍성민들의 생활상을 직접 체험케 하는 역사교육· 체험형 축제
5-3 동래읍성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임진왜란 당시에 북문이 뚫려 부산진성이 함락 당했다. 수적 열세에서도 열심히 싸웠던 곳에 왔다는 것이 느낌이 뭔가 뭉클했다. 그리고 북문 위에 올라가 성문 밖을 바라보니 탁 트인 시야가 너무 좋았다.
6. 동래향교
6-1 동래향교란?
조선 초 유교 교육 진흥책의 일환으로 지방에 향교를 세울 것을 장려하는 태조의 교서를 받들어, 와성(臥城)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8년(1605년)에 중건하였다. 숙종 31년(1705년)에 관노산(官奴山) 아래로 옮겼다가 영조 21년(1745년)에 읍성 동문 밖으로 다시 이건하였다. 정조 9년(1785년)에 지곡동(池谷洞)으로 이전하였으며, 순조 12년(1812년)에 최종적으로 지금의 위치에 옮겨졌다 국가에서 토지와 서적 ·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정원 70인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향교 자체의 교육기능은 사라지고 대신 동인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학기능을 이어가고 있으며, 평생교육원을 인가받아 한문전문 교육기관으로 역할하고 있다.
6-2 동래향교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요즘시대에서 향교는 학교랑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이 든다. 역사방송이나 사극 같은 것을 보면 향교 같은 곳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봤었다. 그런 곳을 가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나중에 되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학교 건물들도 역사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7. 끝 마무리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신채호 선생-
저는 역사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탐방을 통해 제가 얼마나 많이 부족한지를 알게
이 박물관은 초등학교 때 가족과 함께 방문 해 봤던 곳이다. 확실히 어렸을 때 왔을 때랑 이번에 왔을 때 느낀점이 조금 다른거 같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을 다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꼼꼼히 보려했다. 이번에 방문했을 때는 먼저 복천박물관과 고분군이 어떠한 곳인지 알아보고 가서 무덤에 대해 더 자세히 봤다. 삼국시대의 유적을 보면서 순장이라는 것과 자신의 재물에 대한 욕심을 알 수 있었다.
5. 동래읍성
5-1 동래읍성이란?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동래 시가지 중심 지역인 평탄지 일부를 포함한다.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축조되어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모두 갖춘 읍성이다. 성의 둘레는 1,962m, 높이 0.5~3m이며, 넓이는 103,647㎡이다. 삼한시대에 건립되었으나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수축(修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위시해 군·관민이 함께 장렬한 전투를 벌였던 최대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어 있던 것을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이 현재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읍성에는 동·서·남문과 암문(暗門)의 4개 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있었는데,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 하였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두었고 나머지 3개 문에도 옹성을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5-2 동래읍성 역사 축제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을 지키기 위해 송상현 동래부사와 동래읍성민들이 일치단결하여 결사 항전하던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실제의 긴박한 전투상황을 재현하고, 조선시대 동래장터재현 등 읍성민들의 생활상을 직접 체험케 하는 역사교육· 체험형 축제
5-3 동래읍성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임진왜란 당시에 북문이 뚫려 부산진성이 함락 당했다. 수적 열세에서도 열심히 싸웠던 곳에 왔다는 것이 느낌이 뭔가 뭉클했다. 그리고 북문 위에 올라가 성문 밖을 바라보니 탁 트인 시야가 너무 좋았다.
6. 동래향교
6-1 동래향교란?
조선 초 유교 교육 진흥책의 일환으로 지방에 향교를 세울 것을 장려하는 태조의 교서를 받들어, 와성(臥城)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8년(1605년)에 중건하였다. 숙종 31년(1705년)에 관노산(官奴山) 아래로 옮겼다가 영조 21년(1745년)에 읍성 동문 밖으로 다시 이건하였다. 정조 9년(1785년)에 지곡동(池谷洞)으로 이전하였으며, 순조 12년(1812년)에 최종적으로 지금의 위치에 옮겨졌다 국가에서 토지와 서적 ·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정원 70인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향교 자체의 교육기능은 사라지고 대신 동인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학기능을 이어가고 있으며, 평생교육원을 인가받아 한문전문 교육기관으로 역할하고 있다.
6-2 동래향교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
요즘시대에서 향교는 학교랑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이 든다. 역사방송이나 사극 같은 것을 보면 향교 같은 곳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봤었다. 그런 곳을 가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나중에 되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학교 건물들도 역사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7. 끝 마무리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신채호 선생-
저는 역사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탐방을 통해 제가 얼마나 많이 부족한지를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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