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H. 클라인 「성서 고고학」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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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에릭 H. 클라인 「성서 고고학」요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부 성서 고고학의 발달사 2

2부 고고학과 성서 8

본문내용

간과하게 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이 시기에 아일랜드 고고학자 ‘로버트 알렉산더 스튜어트 매캘리스터’가 다른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다. 1898년부터 1909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적을 발굴했는데 ‘게셀’에서의 발굴작업은 팔레스타인에서 큰 규모중 하나였다. 그러나 빠른 발굴작업으로 대부분 유물들의 정확한 위치를 기록하는데 실패했다. 페트리와 비교했을 때 토기와 층서학에 대해 신경을 덜 썼다. 하지만 게셀에서 가나안 ‘산당’(높은 제단)과 ‘게셀 달력’을 발견했다. 게셀 달력은 팔레오-히브리어 또는 페니키아 문자로 새겨져 있고 기본적인 농업 활동을 기록하여 성서시대 사람들의 삶의 이해를 높였다.
비슷한 시기에 하버드대학교의 ‘조지 라이스너’는 효율적인 발굴팀을 구성했는데
모든 발견물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그는 기반암에 이르는 깊이까지 하나의 트렌치를 모두 조사하도록 지시했는데 다른 트렌치에서 발견되는 유적의 복잡한 구조와 다양한 지층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그의 문서화작업은 꼼꼼해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1914년 팔레스타인탐사기금은 ‘T. E. 로렌스’를 고용해 조사를 수행하도록 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학위를 받은 고고학자였는데 두 달도 되지 않아 동료인 ‘레너드 울리’와 ‘네겝 사막’과 ‘와디 아라바’에서 모든 시대 걸쳐 발견된 많은 고고학 유물들을 조사하고 기록했다. 그리하여 1915년 팔레스타인탐사기금을 통해 ‘신 광야’라는 제목으로 발표했고 과거는 물론 오늘날에도 고고학자들은 이를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성서 고고학은 페트리와 라이스너와 같은 노력으로 학문분야로서의 모습으로 서서히 발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태동기에 있었고 다시 한 번 변화를 꾀하게 된다.
3장에서는 양 대전 사이의 시기로 둥근 텔에서 발견한 직각의 구덩이에 대해 다룬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페트리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1920년대까지 수많은 유적을 발굴했다. 이 시기는 ‘영국 위임통치령’ 기간 이었는데, 영국에서는 ‘팔레스타인문화재청’, ‘요르단문화재청’과 막바지에는 ‘팔레스타인고고학박물관’을 설립하여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유물들을 보관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대학들이 발굴을 후원하던 국가 기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활동하던 새로운 세대의 고고학자들이 대학 또는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교수들은 학기 중에는 강의를 했기에 주로 여름방학 기간에 한시적인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까지도 계속되어 팔레스타인 지역에 발굴 작업을 하는 외국인 고고학자들은 대학 또는 박물관에 본거지를 두고 주로 여름에 발굴 작업을 한다.
1920년대가 되자 존스홉킨스대학교의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가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그는 여전히 초기단계에 머물렀던 성서 고고학 분야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공헌했다. 한 예로, 올브라이트로 인해 처음으로 성지의 역사를 식별이 가능하도록 고고학적 시대로 나누는 시도를 했다. 1912년 매캘리스터가 게셀의 발굴보고서를 발표 했을 때 그는 셈족 이전시기와 첫 번째에서 네 번째에 이르는 셈족시기로 유물들을 분류했다. 또한 덴마크의 학자 ‘C. J. 톰센’이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분류한 ‘삼시대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올브라이트는 성서 고고학과 관련된 학술서적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용어를 사용했고 각각의 주요시대를 추가로 세분했다. 이와 같은 분류는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그는 발굴과정에서 발견한 자료를 성서의 텍스트 또는 이외의 비문과 연관해 비교하고 결론을 도출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넬슨 글루에크’이다. 올브라이트의 제자인 그는 토기와 층서학의 전문가였다. 그는 고고학적으로 불모지인 ‘트랜스요르단’에서 여러 측량과 탐사를 한 인물로 유명했다. 성서에서 언급되는 에돔, 모압, 암몬왕국의 고대유적들을 확인하여 성서 고고학을 한층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게셀 유적의 발굴기간에 그는 전도유망한 고고학자들을 가르쳤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성서고고학학교와 예루살렘 캠퍼스를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양 대전 사이 기간동안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와 고고학자들은 ‘므깃도 유적’에서 연속적으로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1925년에서 1939년까지 므깃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발굴이 이어졌다. 처음으로 므깃도 유적을 발굴할 때 고고학자들은 ‘수평발굴’로 알려진 새로운 기술을 사용했는데 텔의 층서를 위에서 아래로 한 층씩 파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세 번째 층을 파낸 후 자금이 부족해져 전통적인 수직발굴로 전환하여 진행했다. 이는 언덕의 옆면에 계단식 트렌치를 파는 방식인데 이로써 유적의 연속적인 역사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주전 3000년-3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약 20개 도시가 서로 다른 시대에 존재한 흔적인 고대 가나안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들을 많이 발견 했다. 한편 시카고 고고학자들은 여기서 솔로몬 시대에 이뤄진 수공예 기술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특히 ‘병거도시’를 근거로 솔로몬 시대에 속한 것으로 추정했다. 1998년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교 발굴팀은 또 다른 ‘마구간’을 발견했지만 솔로몬에 의해 지어졌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같은 시기에 또 다른 고고학자들로 이루어진 ‘합동탐사단’이 고대 사마리아 유적에서 새로운 발굴을 진행했다. 이중 ‘캐슬린 케니언’도 포함된다. 사마리아는 그녀의 첫 번째 발굴지였다. 그녀는 영국의 휠러에 의해 개발된 새로운 발굴 방법을 이용했는데 토양과 고대 유물의 색, 조직 그리고 다른 특성에서 발견되는 차이점을 주목하는 방식이었다. 차이점이 발견될 때 토기와 유물이 담긴 양동이도 바뀌어야하고 이로써 식별이 가능한 층서에 따라 발굴이 진행될 수가 있다. 한해가 끝나면 고고학자들은 겹겹이 쌓인 층의 단면을 사진으로 보관하고 발굴보고서로 발표한다. 이렇듯 이 층서학적 발굴은 ‘케니언-휠러 발굴방법’으로 알려지고 가장 정확하다는 평을 받는다. 현재에도 성지와 다른 지역을 발굴할 때 쓰이는 주요 수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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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7.05.22
  • 저작시기20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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