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향가 개론
3. 향가 주요 작품 분석
3.1. 서동요
3.1.1 배경설화
3.1.2 작품 분석
3.2. 모죽지랑가
3.2.1 배경설화
3.2.2 작품 분석
3.3. 헌화가
3.3.1 배경설화
3.3.2 작품 분석
4. 향가의 현대적 문화콘텐츠화의 현황과 기획
4.1. 향가 문화콘텐츠화의 현황
4.2. 영화 기획 - 신라 愛
4.3. 여행 상품 기획 - 향가의 향기(향가 체험)
5. 결론
6. 참고문헌
2. 향가 개론
3. 향가 주요 작품 분석
3.1. 서동요
3.1.1 배경설화
3.1.2 작품 분석
3.2. 모죽지랑가
3.2.1 배경설화
3.2.2 작품 분석
3.3. 헌화가
3.3.1 배경설화
3.3.2 작품 분석
4. 향가의 현대적 문화콘텐츠화의 현황과 기획
4.1. 향가 문화콘텐츠화의 현황
4.2. 영화 기획 - 신라 愛
4.3. 여행 상품 기획 - 향가의 향기(향가 체험)
5. 결론
6. 참고문헌
본문내용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비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중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3.1.2 작품 분석 최용수, 「서동설화와 <서동요>」,『배달말, 제20호』, 배달말학회, 1995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遺去如
선화 공주님은
남 그윽이 얼어두고
서동 방을
밤에 몰래 안겨간다
「서동요」와 또 그와 함께 전해지는 서동설화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60여 편의 논문에서 다양하게 연구되었는데, 크게 작품과 배경설화를 역사적 측면으로 접근하는 입장과 설화적 측면으로 접근하는 입장 두 가지가 있다.
가) 역사적인 측면으로 바라보는 해석
이 입장은「서동요」와 그 배경설화를 역사성에 비추어 접근해서 주로 ‘서동’이라는 인물이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① 무왕설
서동의 정체를 일연은 \'고본에 무강이라 하였으나 백제에는 무강이 없기에 무왕이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그대로 인정하여 소창진평, 양주동, 신채호 등 초기연구자들 대부분은 서동을 무왕으로 보고 있다.
② 동성왕설
서동을 백제 32대 동성왕으로 보는 입장으로, 『삼국사기』에 동성왕이 신라에 청혼하 여, 소지왕 때 이찬인 비지의 딸을 보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진평왕 의 공주를 취한 것으로 되었다고 본다. 또한 서동이라는 이름이 ‘모대(牟大), 마제여대 (麻帝餘大), 모도(牟都), 말다(末多)’라는 동성왕의 이름과 유사하기에 연관관계에 주목 하여 서동을 동성왕으로 보고 있다.
③ 법왕의 서자설
서동이 왕의 아들이므로 백제 법왕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입장이다. 즉, 서동은 지룡과 과부 사이에 태어났기에 정실의 자식이 아닌 첩의 자식이나 서자로 파악해 서동의 부(父) 를 법왕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서동은 왕의 혈통으로 태어났지만 정치적 사건으로 가문이 몰락해 마를 캐어 살아갔다고 본다.
나) 설화적인 측면으로 바라보는 해석
『삼국유사』‘무왕’조의 서동 이야기가 무왕이나 다른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것이라 하더 라도 이것은 설화화된 것이고, 또는 이것이 구전되어 오는 동안에 몇 가지 설화가 보태어 졌든가 아니면 전설적인 무왕에 기탁되어 만들어진 것 등으로 보는 입장이다.
① 불교적 관점
「서동요」와 관련된 이야기를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가 영웅에 흔히 있을 수 있는 후인들의 과장된 심리의 표현이거나 이미 그 당시에 민간에서 유행하고 있던 노래를 전설적인 무왕에 기탁하여 후인이 탁가(托歌)한 것이라 하고, 선화는 불교의 관음, 서동은 그의 보처인 남순동자, 그리고 서동의 어머니도 관음의 우보처인 해상용왕과 인연을 가진 여인으로 본다. 서동의 어머니와 지룡과의 교통으로 서동이 태어난 것을 미륵신앙이 용신앙에 유착된 것으로 보아 서동설화에 불교적 연계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② 정치 사회적 관점
이 관점에서 윤영옥은 서동전승의 고향을 신라에 두고, 신라사회, 특히 신분제도에 얽힌 사회의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했다. 한편 김학성은 서동이 백제 24대 동성왕이라는 설을 받아들여 ‘무왕’조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건을 설화화한 것임을 강조하며 귀족계층이 그들이 가치관에 의해 이미 민중설화로서 형성되어 유포되고 있던 서동설화를 변이시켜 귀족설화인 ‘무왕설화’로 재편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신배섭은 서동설화를 신분간국가간 인간과 초월자 간의 화해를 보여주는 설화라 하였다.
③ 영웅담적 관점
이명선은 서동의 출생부터가 전설적이고,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나 신라 진평왕의 공주와 결혼하여 후에 백제왕까지 되었다는 그의 경력에는 흔히 있는 후인의 억측과 과장이 다분히 있다고 하여 서동설화를 영웅의 생애담으로 보고 있다. 또한 김열규는 서동을 무왕으로 본 삼국유사 기록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고 하여 이 이야기를 역사적 전설로 보았다. 이에 서동이 태어나 왕위로 오르기까지의 생애담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는 ‘hero-tale\'의 구조를 지닌다고 본다.
3.2. 모죽지랑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2 <효소왕대 죽지랑조(孝昭王代 竹旨郞條)>에 수록된 8구체 향가(鄕歌)이다. 화랑 죽지를 따르는 낭도 득오(득오곡得烏谷)가 지은 것으로 화랑 죽지의 인품을 찬양하는 서정시이다.
3.2.1 배경설화
신라 제 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라고 하는 급간(級干) 신라 관등 제 9위
이 있었다. 화랑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매일 출근하더니, 한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의 어미를 불러 아들이 어디에 갔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당전(幢典) 오늘날의 부대장에 해당하는 신라 때의 군직
모량부(牟梁部)의 익선 아간(阿干) 신라 관등 제 6위
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의 창직(倉直) 곡식창고를 지키는 직책
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급히 가느라고 낭께 알리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죽지랑은 이 말을 듣고,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그 곳에 갔다면 찾아 볼 필요가 없지마는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위로하고 대접해야겠소“라며 죽지랑은 익선의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떡과 술을 득오에게 먹였다. 죽지랑은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청하였으나 익선이 이를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마침 간진이라는 사람이 추화군 능절(能節)의 조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싣고 가다가, 죽지랑의 선비를 존대하는 풍도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막히고 변통성이 없는 것을 품위가 없고 천하게 생각하며, 가지고 가던 벼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휴가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또 진절사지(珍節舍知)가 쓰는 말안장을 더 주었더니 드디어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 신라에서 화랑을 관장하는 관직
가 이 이야기를 듣고 익선을 잡아다가 그의 더럽고 추한 마음을 씻어 주고자 하였는데, 도망쳐 버렸으므로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갔다. 때는 동짓달 몹시 추운 날인데 성 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키니 얼어 죽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모량리 사람을 모두 벼슬에서
3.1.2 작품 분석 최용수, 「서동설화와 <서동요>」,『배달말, 제20호』, 배달말학회, 1995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遺去如
선화 공주님은
남 그윽이 얼어두고
서동 방을
밤에 몰래 안겨간다
「서동요」와 또 그와 함께 전해지는 서동설화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60여 편의 논문에서 다양하게 연구되었는데, 크게 작품과 배경설화를 역사적 측면으로 접근하는 입장과 설화적 측면으로 접근하는 입장 두 가지가 있다.
가) 역사적인 측면으로 바라보는 해석
이 입장은「서동요」와 그 배경설화를 역사성에 비추어 접근해서 주로 ‘서동’이라는 인물이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① 무왕설
서동의 정체를 일연은 \'고본에 무강이라 하였으나 백제에는 무강이 없기에 무왕이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그대로 인정하여 소창진평, 양주동, 신채호 등 초기연구자들 대부분은 서동을 무왕으로 보고 있다.
② 동성왕설
서동을 백제 32대 동성왕으로 보는 입장으로, 『삼국사기』에 동성왕이 신라에 청혼하 여, 소지왕 때 이찬인 비지의 딸을 보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진평왕 의 공주를 취한 것으로 되었다고 본다. 또한 서동이라는 이름이 ‘모대(牟大), 마제여대 (麻帝餘大), 모도(牟都), 말다(末多)’라는 동성왕의 이름과 유사하기에 연관관계에 주목 하여 서동을 동성왕으로 보고 있다.
③ 법왕의 서자설
서동이 왕의 아들이므로 백제 법왕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입장이다. 즉, 서동은 지룡과 과부 사이에 태어났기에 정실의 자식이 아닌 첩의 자식이나 서자로 파악해 서동의 부(父) 를 법왕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서동은 왕의 혈통으로 태어났지만 정치적 사건으로 가문이 몰락해 마를 캐어 살아갔다고 본다.
나) 설화적인 측면으로 바라보는 해석
『삼국유사』‘무왕’조의 서동 이야기가 무왕이나 다른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것이라 하더 라도 이것은 설화화된 것이고, 또는 이것이 구전되어 오는 동안에 몇 가지 설화가 보태어 졌든가 아니면 전설적인 무왕에 기탁되어 만들어진 것 등으로 보는 입장이다.
① 불교적 관점
「서동요」와 관련된 이야기를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가 영웅에 흔히 있을 수 있는 후인들의 과장된 심리의 표현이거나 이미 그 당시에 민간에서 유행하고 있던 노래를 전설적인 무왕에 기탁하여 후인이 탁가(托歌)한 것이라 하고, 선화는 불교의 관음, 서동은 그의 보처인 남순동자, 그리고 서동의 어머니도 관음의 우보처인 해상용왕과 인연을 가진 여인으로 본다. 서동의 어머니와 지룡과의 교통으로 서동이 태어난 것을 미륵신앙이 용신앙에 유착된 것으로 보아 서동설화에 불교적 연계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② 정치 사회적 관점
이 관점에서 윤영옥은 서동전승의 고향을 신라에 두고, 신라사회, 특히 신분제도에 얽힌 사회의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했다. 한편 김학성은 서동이 백제 24대 동성왕이라는 설을 받아들여 ‘무왕’조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건을 설화화한 것임을 강조하며 귀족계층이 그들이 가치관에 의해 이미 민중설화로서 형성되어 유포되고 있던 서동설화를 변이시켜 귀족설화인 ‘무왕설화’로 재편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신배섭은 서동설화를 신분간국가간 인간과 초월자 간의 화해를 보여주는 설화라 하였다.
③ 영웅담적 관점
이명선은 서동의 출생부터가 전설적이고,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나 신라 진평왕의 공주와 결혼하여 후에 백제왕까지 되었다는 그의 경력에는 흔히 있는 후인의 억측과 과장이 다분히 있다고 하여 서동설화를 영웅의 생애담으로 보고 있다. 또한 김열규는 서동을 무왕으로 본 삼국유사 기록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고 하여 이 이야기를 역사적 전설로 보았다. 이에 서동이 태어나 왕위로 오르기까지의 생애담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는 ‘hero-tale\'의 구조를 지닌다고 본다.
3.2. 모죽지랑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2 <효소왕대 죽지랑조(孝昭王代 竹旨郞條)>에 수록된 8구체 향가(鄕歌)이다. 화랑 죽지를 따르는 낭도 득오(득오곡得烏谷)가 지은 것으로 화랑 죽지의 인품을 찬양하는 서정시이다.
3.2.1 배경설화
신라 제 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라고 하는 급간(級干) 신라 관등 제 9위
이 있었다. 화랑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매일 출근하더니, 한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의 어미를 불러 아들이 어디에 갔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당전(幢典) 오늘날의 부대장에 해당하는 신라 때의 군직
모량부(牟梁部)의 익선 아간(阿干) 신라 관등 제 6위
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의 창직(倉直) 곡식창고를 지키는 직책
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급히 가느라고 낭께 알리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죽지랑은 이 말을 듣고,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그 곳에 갔다면 찾아 볼 필요가 없지마는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위로하고 대접해야겠소“라며 죽지랑은 익선의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떡과 술을 득오에게 먹였다. 죽지랑은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청하였으나 익선이 이를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마침 간진이라는 사람이 추화군 능절(能節)의 조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싣고 가다가, 죽지랑의 선비를 존대하는 풍도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막히고 변통성이 없는 것을 품위가 없고 천하게 생각하며, 가지고 가던 벼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휴가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또 진절사지(珍節舍知)가 쓰는 말안장을 더 주었더니 드디어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 신라에서 화랑을 관장하는 관직
가 이 이야기를 듣고 익선을 잡아다가 그의 더럽고 추한 마음을 씻어 주고자 하였는데, 도망쳐 버렸으므로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갔다. 때는 동짓달 몹시 추운 날인데 성 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키니 얼어 죽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모량리 사람을 모두 벼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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