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조선왕조실록 요약_2>
1. 성종
2. 연산군
3. 중종
4. 인종
5. 명종
6. 선조
7. 광해군
8. 인조
1. 성종
2. 연산군
3. 중종
4. 인종
5. 명종
6. 선조
7. 광해군
8. 인조
본문내용
궁궐과 백성을 버리고 도주 → 전쟁장기화 → 왜군의 전쟁물자 수송 곤란
여진족이 북방의 강력한 세력으로 일본은 두만강 건너 여진족과 싸우다 패함
이순신!
-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물자보급은 배로 해야 하는데 이순신이 보급로 완전 차단
※ 함경도에서 물자를 기다리던 왜군들은 배고픔과 총알이 부족한 상황 초래
- 1592년 4월에 시작한 전쟁은 다음해 봄까지 이어지고, 전쟁이 장기화 되자 일본은 명나라와 일본은 전쟁은 전쟁에 대한 강화교섭 시작
※ 일본은 경기, 충청, 경상, 전라 지역을 내놓고,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 첩으로 보내라는 등의 무모한 조건 → 회담 결렬 → 1597년 다시 전쟁 발발 ‘정유재란’
- 이순신은 왜란이라는 7년 동안의 어려움 속에서 옥포해전, 한산도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눈부신 23전 23승을 이끎
- 노량해전에서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
▣ 임진왜란이후(1598~1608년)
- 7년간의 전쟁이 끝났지만 전 국토는 황폐해짐
- 선조는 전쟁에 앞장서서 싸운 선무공신보다 선조를 따라 피난 갔던 호성공신을 더 높이 평가함
- 전쟁 승리의 모든 공을 명나라에게 돌리고, 찬양
제15대. 광해군
· 생애 : 1557~1641
· 재위기간 : 1608~1623
· 묘호 : 없음
· 즉위 : 선조와 후궁 공빈 김 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남. 선조의 장남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해 차남 광해군이 후계자로 지목됨. 임진왜란 발발 후 광해군은 전장을 누비며 전쟁의 총사령관 역할을 충실히 다함.
▣ 전쟁이 만든 왕세자(1592~1608년)
-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왕비사이에 자식이 없었고,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 두 아들을 둠
-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가면서 전쟁의 지휘권은 왕세자에게 넘기려고 함
- 18세 광해군은 왕세자의 자리를 받고, 의병을 독려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역할 해냄
- 광해군은 자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면서도 라이벌이기도 함
※ 전쟁으로 광해군의 지지도가 높고, 선조에 대한 인기 하락
- 임진왜란 후 선조는 새 왕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아들을 낳음(영창대군)
- 신하들은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각각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리
※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지만 영창대군은 훗날 정치적 라이벌이 됨
▣ 광해군 즉위와 개혁(1608~1623년)
- 양전사업 실시 : 전쟁으로 훼손된 토지 재조사 및 안정적 세금 확보
- 동의보감 완성 :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의 삶 위로
- 대동법 시행 : 조선 최고의 세금 개혁(지역 특산품 대신 쌀로 세금을 내게 함)
※ 대동 : 공자가 말하는 이상사회, 우리 모두 잘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세금제도라는 뜻
- 중립외교 실시 : 중국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은 외교정책 실시
※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신의와 성장하는 세력 ‘후금’ 사이에서 실리외교 펼침
▣ 인조반정
- 경북에서 일어나 단순 강도사건을 광해군과 대북파는 소북파와 영창대군에게 죄를 물음
※ 광해군과 대북파에게 위협적인 선조의 적장자 영장대군 증살, 인목왕후를 가둠(폐모살제)
- 대의와 명분, 효를 중시하는 서인들에게 용납될 수 없어 결국 서인을 중심으로 남인이 동조하여 인조반정이 발생
※ 종친 견제로 인한 왕족의 반발과 폐모살제 및 중립외교에 대한 신하들의 반발이 서로 일치
- 인조는 광해군과 서로 삼촌과 조카 관계
제16대. 인조
· 생애 : 1595~1649
· 재위기간 : 1623~1649
· 묘호 : 인조
· 즉위 : 선조의 손자.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이 인조의 아버지. 인조는 정원군의 장남, 광해군과는 숙부와 조카 사이지만 인조가 서인과 함께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름.
▣ 친명배금 정책(1623년)
- 광해군은 늘 왕위에 불안해하며 자신과 같은 후궁 소생의 자녀들에게도 적개심
- 광해군의 견제로 인조는 아버지, 동생을 잃음 → 인조반정에 가담
- 인조는 왕위에 오르자 ‘친명배금’ 정책을 펼침
※ 후금은 계속 세력이 커지고, 명나라는 쇠약한 상태지만 인조와 서인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강조
▣ 정묘호란(1627년)
- 이괄은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지만 서인들은 이괄을 배척함
- 서인 김유와 이골 사이에 갈등으로 이괄은 김유보다 공적이 낮게 봉해짐
- 이괄은 군대를 이끌어 난을 일으킴 → 이괄은 자신의 부하들의 배신으로 이괄 세력은 무너짐 → 이괄 밑에 있던 장수들은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을 침공하자고 부추김
※ 후금은 조선 정부의 친명배금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후금은 명나라를 치려면 조선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
- 이괄의 잔당세력들이 조선 침략을 앞장서자, 후금은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 →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피난 → 후금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 → 조선은 후금과 화친을 맺고, 후금 군대를 철수
▣ 병자호란(1636년)
- 세력이 점점 커진 후금은 1632년 조선에게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명함
- 후금의 국호를 ‘청’으로 바꾸더니 조선을 더욱 압박함 → 조정은 두 파로 나뉨
척화론자 : 죽더라도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는 주장
주화론자 :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막고, 실리를 추구하자는 주장
- 결국 척화론자의 주장대로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하자, 청나라가 조선 침공(병자호란) ※ 청은 정묘호란처럼 피난 가는 인조의 길목을 막고 잡음 → 잡힌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잠실 고수부지까지 한겨울 맨발로 끌려감 → 얼어붙은 한강 바닥에 인조가 무릎을 꿇음 → 삼궤 구고두레 함.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총 9번을 청나라 황제에게 절을 함)
-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는 부인 세자빈 강씨와 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인질로 끌려감
※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8년간 인질 생활을 함. 약소국의 세자지만 직접 농사를 짓고, 청나라 황실과 교류를 통해 훌륭한 외교관 역할을 해냄 → 청에서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울지 모른 다는 불안감에 인조는 장남을 내침 → 소현세자는 귀국 3개월 만에 의문사 함.
여진족이 북방의 강력한 세력으로 일본은 두만강 건너 여진족과 싸우다 패함
이순신!
-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물자보급은 배로 해야 하는데 이순신이 보급로 완전 차단
※ 함경도에서 물자를 기다리던 왜군들은 배고픔과 총알이 부족한 상황 초래
- 1592년 4월에 시작한 전쟁은 다음해 봄까지 이어지고, 전쟁이 장기화 되자 일본은 명나라와 일본은 전쟁은 전쟁에 대한 강화교섭 시작
※ 일본은 경기, 충청, 경상, 전라 지역을 내놓고,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 첩으로 보내라는 등의 무모한 조건 → 회담 결렬 → 1597년 다시 전쟁 발발 ‘정유재란’
- 이순신은 왜란이라는 7년 동안의 어려움 속에서 옥포해전, 한산도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눈부신 23전 23승을 이끎
- 노량해전에서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
▣ 임진왜란이후(1598~1608년)
- 7년간의 전쟁이 끝났지만 전 국토는 황폐해짐
- 선조는 전쟁에 앞장서서 싸운 선무공신보다 선조를 따라 피난 갔던 호성공신을 더 높이 평가함
- 전쟁 승리의 모든 공을 명나라에게 돌리고, 찬양
제15대. 광해군
· 생애 : 1557~1641
· 재위기간 : 1608~1623
· 묘호 : 없음
· 즉위 : 선조와 후궁 공빈 김 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남. 선조의 장남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해 차남 광해군이 후계자로 지목됨. 임진왜란 발발 후 광해군은 전장을 누비며 전쟁의 총사령관 역할을 충실히 다함.
▣ 전쟁이 만든 왕세자(1592~1608년)
-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왕비사이에 자식이 없었고,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 두 아들을 둠
-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가면서 전쟁의 지휘권은 왕세자에게 넘기려고 함
- 18세 광해군은 왕세자의 자리를 받고, 의병을 독려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역할 해냄
- 광해군은 자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면서도 라이벌이기도 함
※ 전쟁으로 광해군의 지지도가 높고, 선조에 대한 인기 하락
- 임진왜란 후 선조는 새 왕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아들을 낳음(영창대군)
- 신하들은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각각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리
※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지만 영창대군은 훗날 정치적 라이벌이 됨
▣ 광해군 즉위와 개혁(1608~1623년)
- 양전사업 실시 : 전쟁으로 훼손된 토지 재조사 및 안정적 세금 확보
- 동의보감 완성 :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의 삶 위로
- 대동법 시행 : 조선 최고의 세금 개혁(지역 특산품 대신 쌀로 세금을 내게 함)
※ 대동 : 공자가 말하는 이상사회, 우리 모두 잘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세금제도라는 뜻
- 중립외교 실시 : 중국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은 외교정책 실시
※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신의와 성장하는 세력 ‘후금’ 사이에서 실리외교 펼침
▣ 인조반정
- 경북에서 일어나 단순 강도사건을 광해군과 대북파는 소북파와 영창대군에게 죄를 물음
※ 광해군과 대북파에게 위협적인 선조의 적장자 영장대군 증살, 인목왕후를 가둠(폐모살제)
- 대의와 명분, 효를 중시하는 서인들에게 용납될 수 없어 결국 서인을 중심으로 남인이 동조하여 인조반정이 발생
※ 종친 견제로 인한 왕족의 반발과 폐모살제 및 중립외교에 대한 신하들의 반발이 서로 일치
- 인조는 광해군과 서로 삼촌과 조카 관계
제16대. 인조
· 생애 : 1595~1649
· 재위기간 : 1623~1649
· 묘호 : 인조
· 즉위 : 선조의 손자.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이 인조의 아버지. 인조는 정원군의 장남, 광해군과는 숙부와 조카 사이지만 인조가 서인과 함께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름.
▣ 친명배금 정책(1623년)
- 광해군은 늘 왕위에 불안해하며 자신과 같은 후궁 소생의 자녀들에게도 적개심
- 광해군의 견제로 인조는 아버지, 동생을 잃음 → 인조반정에 가담
- 인조는 왕위에 오르자 ‘친명배금’ 정책을 펼침
※ 후금은 계속 세력이 커지고, 명나라는 쇠약한 상태지만 인조와 서인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강조
▣ 정묘호란(1627년)
- 이괄은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지만 서인들은 이괄을 배척함
- 서인 김유와 이골 사이에 갈등으로 이괄은 김유보다 공적이 낮게 봉해짐
- 이괄은 군대를 이끌어 난을 일으킴 → 이괄은 자신의 부하들의 배신으로 이괄 세력은 무너짐 → 이괄 밑에 있던 장수들은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을 침공하자고 부추김
※ 후금은 조선 정부의 친명배금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후금은 명나라를 치려면 조선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
- 이괄의 잔당세력들이 조선 침략을 앞장서자, 후금은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 →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피난 → 후금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 → 조선은 후금과 화친을 맺고, 후금 군대를 철수
▣ 병자호란(1636년)
- 세력이 점점 커진 후금은 1632년 조선에게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명함
- 후금의 국호를 ‘청’으로 바꾸더니 조선을 더욱 압박함 → 조정은 두 파로 나뉨
척화론자 : 죽더라도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는 주장
주화론자 :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막고, 실리를 추구하자는 주장
- 결국 척화론자의 주장대로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하자, 청나라가 조선 침공(병자호란) ※ 청은 정묘호란처럼 피난 가는 인조의 길목을 막고 잡음 → 잡힌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잠실 고수부지까지 한겨울 맨발로 끌려감 → 얼어붙은 한강 바닥에 인조가 무릎을 꿇음 → 삼궤 구고두레 함.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총 9번을 청나라 황제에게 절을 함)
-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는 부인 세자빈 강씨와 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인질로 끌려감
※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8년간 인질 생활을 함. 약소국의 세자지만 직접 농사를 짓고, 청나라 황실과 교류를 통해 훌륭한 외교관 역할을 해냄 → 청에서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울지 모른 다는 불안감에 인조는 장남을 내침 → 소현세자는 귀국 3개월 만에 의문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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