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 광해군과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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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비운의 왕, 광해군과 연산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즐기지 않았다. 이 점이 광해군과 연산군이 후대에 다르게 평가 받게 되는 큰 이유이다.
※ 연산군에 대한 입장
연산군은 어찌 생각하면 불쌍한 왕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모함을 받아 죽은 것을 알았다면 냉정을 지킬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렇지만 그는 한나라의 왕이었기 때문에 참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명령하나에 사람들 목숨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폭군이 아니라 폭군이기는 했지만 불운했고 불쌍했던 왕으로 기억 되었으면 한다.
※ 광해군에 대한 입장
위에 비교를 통해 본다면 광해군은 폭군이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의 이미지는 어떠한 면에서 세조나 태종과 닮아 있다. 세조와 태종도 자신의 조카와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리고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을 펼쳤으며 후에는 성군까지는 아니더라도 훌륭한, 괜찮은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자신들의 친척 또는 가족을 죽이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광해군이 왕위를 올랐을 때에 성리학이 극도로 발전하면서 그러한 면이 인정되지 않은 것이 광해군이 폐위된 제일 큰 이유 일 수도 있다. 광해군이 만약 조선전기대에 왕이었다면 그가 한 행위는 인정되었고 성군이나 평범했던 임금으로 기록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이 한 정책들을 살펴본다면 그렇게 폭군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폭군의 기준은 백성들에게 폭정을 부리는 것이지 정적인 자신들의 가족과 대신들에게 폭정을 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궐을 새로 짓는 바람에 부역이 과다했다고 하지만 그 것은 전란 후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 것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폭정을 한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광해군 때에 펼쳐진 정책은 실용적이었다. 양면외교를 펼친 점이나 대동법을 시행한 정책, 천도를 행하려 했던 정책은 괜찮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광해군은 폭군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연산군과 광해군 모두 왕에서 밀려난 왕들이다. 그렇지만 연산군은 폭군이었지만 광해군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광해군은 폭정을 저질러서 보다는 여러 상황이 맞물려서 왕에서 폐위된 왕이었다. 그가 행한 정책들도 그 것을 보여준다. 광해군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행해져서 그에 대한 진실이 더 많이 나오고 더욱더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되기를 바란다.
※ 참고문헌
1) 이덕일, 이근희,『우리 역사의 수수께끼1-우리역사를 바꿀 34가지 오해와 진실』,김영 사, 「3.3. 연산군은 사대부에 맞선 혁명아인가, 패륜아인가」,「3.8. 인조반정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
2)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씽크빅, 2004
3) http://100.naver.com/index.nhn
4)「연산군일기」,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5)「광해군일기」,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6) http://koreandb.kdaq.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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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9.03.13
  • 저작시기2009.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2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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