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종묘
1) 국가 예제의 으뜸인 종묘
2) 중국의 종묘 제도
3) 우리나라의 종묘 제도
4) 종묘의 연혁
5) 종묘의 형식
6) 종묘제례
7) 종묘제례의 절차
8) 종묘 제례악
9) 제례와 건축공간
2. 사직단
1) 사직단의 제도
2) 사직단의 형식
3) 조선시대 사직단의 연혁
4) 사직단의 제례
1) 국가 예제의 으뜸인 종묘
2) 중국의 종묘 제도
3) 우리나라의 종묘 제도
4) 종묘의 연혁
5) 종묘의 형식
6) 종묘제례
7) 종묘제례의 절차
8) 종묘 제례악
9) 제례와 건축공간
2. 사직단
1) 사직단의 제도
2) 사직단의 형식
3) 조선시대 사직단의 연혁
4) 사직단의 제례
본문내용
록 하였다.
또한 종묘는 물론 도성 한 군데밖에 없지만 유사한 기능을 가진 시설이 일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종묘 제사의 유형을 다른 장소에서도 지냈던 것이다. 그 예로 태조와 태조비의 제사를 지내던 문소전이 있었고, 그 밖에 목청전, 선원전, 영숭전, 경기전 등 왕의 영정을 모신 건물들이 있었다. 이 건물에서 하는 제사들을 ‘속제’라 불렀다.
이처럼 사직과 종묘는 5례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게 취급된 예제의 대상이었다. 특히 서울의 사직단과 종묘는 예제의 측면에서만 보면 그것은 오히려 궁궐보다 더 높이 존숭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중국의 종묘 제도
5례가 이미 고대 중국에서부터 성립되었듯이 종묘 제도 역시 그 근간은 주례에서 비롯된다.
중국의 오래된 종묘 제도는 대체로 ‘예기’의 기록을 전거로 하였다. 예기에 명시된 종묘 제도는 “천자는 7묘로 3소 3목에 태조의 묘를 더하여 7이 되며 제후는 5묘로 2소 2목에 태조의 목을 더하여 5가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소목이란 태조의 묘를 중앙에 노호 2세, 4세 또는 6세를 왼쪽에 두어 소라고 하고 3세, 5세, 7세를 오른쪽에 두어 목이라고 부른 것으로 소목제는 묘제의 기본이었다. 소목제 아래서는 각 묘는 독립된 건물을 별도로 갖고 있으며 각 묘는 전묘후침이라하여 묘는 앞에 두고 뒤에는 의관 등을 보관한 침(방)을 따로 두었다.
그러나 후한대에 들어와 종묘제도에 동당이실 제도가 나타났다. 동당이실 곧 건물은 같이 쓰고 그 안에 실만 따로 하여 여러 신위를 한 지붕 아래 함께 모신다는 것이다. 종전의 소목제가 변화된 것이다. 이는 곧 서상의 개념이다 서상이란 서쪽 끝이 제일 높은 위치로 하고 그 오른쪽으로 차례로 신위의 순서를 정하는 것이다.
이후로 중국의 왕조는 대체로 동당이실 제도가 지배적인 것이 되었으며 다만 신위의 배열에서는 소목제가 준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종묘 제도
고려시대 이전의 제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기원 6년에 시조묘를 세웠고 고구려도 시조 동명왕묘를 세웠고 고국양왕 때는 종묘를 수리했다는 기사가 있다. 백제로 동명왕묘를 세웠고 또한 국모묘를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종묘 제도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본격적인 종묘 제도가 성종 때 중국식으로 개편하여 제도화되었다. 이때의 종묘는 1011년 글안족의 침입 때 불에 타 버리고 1027년에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재건된 종묘는 동당이실에 서상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정종 때 신위의 배열 방식을 5묘제를 채택하여 바꾸고 따로 별묘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종묘 제도는 대체로 동달이실제를 택하고 신위는 서상 또는 5묘의 소목제를 택하였다.
조선시대의 종묘 제도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직후 고려의 종묘를 헐고 그 자리에 새로운 종묘를 건립하였으나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개경의 종묘는 철거하고 한양에 새로운 종묘를 마련하였다. 1394년 종묘, 사직과 궁궐터를 정했는데 궁월의 북쪽으로 종묘 터를 정하였다. 이때 사직은 종묘와 반대되는 궁의 서쪽에 정하였는데 이처럼 궁을 중심으로 종묘를 왼쪽, 사직을 오른쪽에 두는 것은 중국 고대 예제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종묘가 완성된 것은 1395년으로 동당이실의 7칸 건물로 세워졌다. 다만 중국의 전묘후침이 상례였으나 침전은 세우지 않았고 공신당과 재궁을 두었을 뿐이었다. 이때 신위의 배열은 비록 건물은 동달이실이 었지만. 소목제를 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신위의 배열은 뒤에 서상의 원칙으로 바뀌는데 이 변화가 초래된 것은 별묘인 영녕전의 건립이었다. 정종 때 신실 5칸은 이미 다 차있었으므로 신위를 이동해야 했다. 여기서 생각해 낸 방안이 중국 송나라의 예에 따라 새로 별묘를 짓는 것이었다. 별묘는 정전 바로 가까운 서쪽에 지었는데 정전 4칸에 좌우로 익실 각 1칸을 더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종묘는 중국에서 시행된 것에 바탕을 두고 여기에 별묘 제도를 예에 따라서 채택하여 건립되었다. 조선 왕조는 500년 동안 지속되었고 자연히 종묘는 부족한 신실을 채우기 위하여 증축을 거듭해 그 결과 조선조 종묘만이 갖는 독특한 건축 구성을 하게 되었다. 또한 거기에다 건물의 재료나 형식에서도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요소들을 갖추어지게 되어 고유한 건축형태로 전개되었다.
종묘의 연혁
태조4년에 완성된 종묘는 창건된 위치에서 오랜시간 동안 존중받는 건물로 존재해 왔다. 그 사이에 수난도 있었으며, 증축을 하기도 하였다.
-창건에서 첫 번째 증건까지
태조 4년 창건될 때의 종묘는 동당이실의 대실7칸에 좌우 익실 2칸이 달린 정전과 공신당 신문, 동문, 서문 외에 신주 향관청이 있는 규모였다. 제 3대 태종이 즉위 뒤 종묘에 약간의 시설을 추가하고 왕 16년에 종묘에 북문을 새로 내어 창덕궁에서 바로 통하는 통로를 열었으며, 세종 때 별묘인 영녕전을 새로이 지은 것 말고는 종묘는 별다른 변화 없이 제 12대 인종까지 약 150년의 세월을 보냈다. 이때까지의 종묘의 모습 중 조금 특이했던 것은 담 안에는 거의 마당을 다 덮을 정도의 크기로 네모난 월대가 마련되고 다시 뒤쪽에 상월대가 놓였는데 월대의 한가운데로 신문에서 가운데 계단사이로 사람이 아닌 신령만이 지나는 신성한 통로인 신로가 있었다는 것이다. 150년을 잘 지내온 종묘는 1545년 명종이 즉위하게 되고 신실의 부족문제로 증축이 논의 되었다. 논의 후에 원래는 정전에 새로 3칸을 증축하기로 하였는데 문종이 협실에 들어가게 되는 문제 때문에 4칸이 증축되기로 결정이 되었다. 따라서 명종 원전에 종묘 정전은 새로 증축되어 전체 11칸의 건물이 되었다.
<국조오례의 참고그림으로 >
-종묘의 소실과 재건
종묘는 그 뒤로 약 200년 동안 영녕전 시설과 명종 때의 증축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1592년 왜적의 침입으로 도성 안의 궁궐들과 함께 건물이 모두 불에 타는 수난을 겪고 말았다. 여기서 조금 재미있는 점은 모두 불에 타고 남은 건물이 종묘밖에 없었으나 왜군은 신령이 머물고 있는 종묘에 기거하는 것이 두려워 나머지 건물을 모두 불태우고 다른곳으로 거처를
또한 종묘는 물론 도성 한 군데밖에 없지만 유사한 기능을 가진 시설이 일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종묘 제사의 유형을 다른 장소에서도 지냈던 것이다. 그 예로 태조와 태조비의 제사를 지내던 문소전이 있었고, 그 밖에 목청전, 선원전, 영숭전, 경기전 등 왕의 영정을 모신 건물들이 있었다. 이 건물에서 하는 제사들을 ‘속제’라 불렀다.
이처럼 사직과 종묘는 5례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게 취급된 예제의 대상이었다. 특히 서울의 사직단과 종묘는 예제의 측면에서만 보면 그것은 오히려 궁궐보다 더 높이 존숭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중국의 종묘 제도
5례가 이미 고대 중국에서부터 성립되었듯이 종묘 제도 역시 그 근간은 주례에서 비롯된다.
중국의 오래된 종묘 제도는 대체로 ‘예기’의 기록을 전거로 하였다. 예기에 명시된 종묘 제도는 “천자는 7묘로 3소 3목에 태조의 묘를 더하여 7이 되며 제후는 5묘로 2소 2목에 태조의 목을 더하여 5가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소목이란 태조의 묘를 중앙에 노호 2세, 4세 또는 6세를 왼쪽에 두어 소라고 하고 3세, 5세, 7세를 오른쪽에 두어 목이라고 부른 것으로 소목제는 묘제의 기본이었다. 소목제 아래서는 각 묘는 독립된 건물을 별도로 갖고 있으며 각 묘는 전묘후침이라하여 묘는 앞에 두고 뒤에는 의관 등을 보관한 침(방)을 따로 두었다.
그러나 후한대에 들어와 종묘제도에 동당이실 제도가 나타났다. 동당이실 곧 건물은 같이 쓰고 그 안에 실만 따로 하여 여러 신위를 한 지붕 아래 함께 모신다는 것이다. 종전의 소목제가 변화된 것이다. 이는 곧 서상의 개념이다 서상이란 서쪽 끝이 제일 높은 위치로 하고 그 오른쪽으로 차례로 신위의 순서를 정하는 것이다.
이후로 중국의 왕조는 대체로 동당이실 제도가 지배적인 것이 되었으며 다만 신위의 배열에서는 소목제가 준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종묘 제도
고려시대 이전의 제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기원 6년에 시조묘를 세웠고 고구려도 시조 동명왕묘를 세웠고 고국양왕 때는 종묘를 수리했다는 기사가 있다. 백제로 동명왕묘를 세웠고 또한 국모묘를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종묘 제도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본격적인 종묘 제도가 성종 때 중국식으로 개편하여 제도화되었다. 이때의 종묘는 1011년 글안족의 침입 때 불에 타 버리고 1027년에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재건된 종묘는 동당이실에 서상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정종 때 신위의 배열 방식을 5묘제를 채택하여 바꾸고 따로 별묘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종묘 제도는 대체로 동달이실제를 택하고 신위는 서상 또는 5묘의 소목제를 택하였다.
조선시대의 종묘 제도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직후 고려의 종묘를 헐고 그 자리에 새로운 종묘를 건립하였으나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개경의 종묘는 철거하고 한양에 새로운 종묘를 마련하였다. 1394년 종묘, 사직과 궁궐터를 정했는데 궁월의 북쪽으로 종묘 터를 정하였다. 이때 사직은 종묘와 반대되는 궁의 서쪽에 정하였는데 이처럼 궁을 중심으로 종묘를 왼쪽, 사직을 오른쪽에 두는 것은 중국 고대 예제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종묘가 완성된 것은 1395년으로 동당이실의 7칸 건물로 세워졌다. 다만 중국의 전묘후침이 상례였으나 침전은 세우지 않았고 공신당과 재궁을 두었을 뿐이었다. 이때 신위의 배열은 비록 건물은 동달이실이 었지만. 소목제를 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신위의 배열은 뒤에 서상의 원칙으로 바뀌는데 이 변화가 초래된 것은 별묘인 영녕전의 건립이었다. 정종 때 신실 5칸은 이미 다 차있었으므로 신위를 이동해야 했다. 여기서 생각해 낸 방안이 중국 송나라의 예에 따라 새로 별묘를 짓는 것이었다. 별묘는 정전 바로 가까운 서쪽에 지었는데 정전 4칸에 좌우로 익실 각 1칸을 더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종묘는 중국에서 시행된 것에 바탕을 두고 여기에 별묘 제도를 예에 따라서 채택하여 건립되었다. 조선 왕조는 500년 동안 지속되었고 자연히 종묘는 부족한 신실을 채우기 위하여 증축을 거듭해 그 결과 조선조 종묘만이 갖는 독특한 건축 구성을 하게 되었다. 또한 거기에다 건물의 재료나 형식에서도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요소들을 갖추어지게 되어 고유한 건축형태로 전개되었다.
종묘의 연혁
태조4년에 완성된 종묘는 창건된 위치에서 오랜시간 동안 존중받는 건물로 존재해 왔다. 그 사이에 수난도 있었으며, 증축을 하기도 하였다.
-창건에서 첫 번째 증건까지
태조 4년 창건될 때의 종묘는 동당이실의 대실7칸에 좌우 익실 2칸이 달린 정전과 공신당 신문, 동문, 서문 외에 신주 향관청이 있는 규모였다. 제 3대 태종이 즉위 뒤 종묘에 약간의 시설을 추가하고 왕 16년에 종묘에 북문을 새로 내어 창덕궁에서 바로 통하는 통로를 열었으며, 세종 때 별묘인 영녕전을 새로이 지은 것 말고는 종묘는 별다른 변화 없이 제 12대 인종까지 약 150년의 세월을 보냈다. 이때까지의 종묘의 모습 중 조금 특이했던 것은 담 안에는 거의 마당을 다 덮을 정도의 크기로 네모난 월대가 마련되고 다시 뒤쪽에 상월대가 놓였는데 월대의 한가운데로 신문에서 가운데 계단사이로 사람이 아닌 신령만이 지나는 신성한 통로인 신로가 있었다는 것이다. 150년을 잘 지내온 종묘는 1545년 명종이 즉위하게 되고 신실의 부족문제로 증축이 논의 되었다. 논의 후에 원래는 정전에 새로 3칸을 증축하기로 하였는데 문종이 협실에 들어가게 되는 문제 때문에 4칸이 증축되기로 결정이 되었다. 따라서 명종 원전에 종묘 정전은 새로 증축되어 전체 11칸의 건물이 되었다.
<국조오례의 참고그림으로 >
-종묘의 소실과 재건
종묘는 그 뒤로 약 200년 동안 영녕전 시설과 명종 때의 증축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1592년 왜적의 침입으로 도성 안의 궁궐들과 함께 건물이 모두 불에 타는 수난을 겪고 말았다. 여기서 조금 재미있는 점은 모두 불에 타고 남은 건물이 종묘밖에 없었으나 왜군은 신령이 머물고 있는 종묘에 기거하는 것이 두려워 나머지 건물을 모두 불태우고 다른곳으로 거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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