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 론
A. 연구동기와 목적
B. 연구방법과 범위
개신교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문제점
A. 예배의 문제점
1. 설교 위주의 예배
2. 성례전 격하의 예배
B. 성만찬에 대한 이해
1. 카톨릭의 견해
2. 루터의 견해
3. 쯔빙글리의 견해
4. 칼빈의 견해
현대 각 교파 및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실제
A. 각 교파의 성만찬 순서
B. 예배당 내부구조
C. 실 례
성만찬의 실제적 제언
A. 성만찬 예배의 과제
B. 성만찬 예전의 모델
결 론
참 고 문 헌
A. 연구동기와 목적
B. 연구방법과 범위
개신교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문제점
A. 예배의 문제점
1. 설교 위주의 예배
2. 성례전 격하의 예배
B. 성만찬에 대한 이해
1. 카톨릭의 견해
2. 루터의 견해
3. 쯔빙글리의 견해
4. 칼빈의 견해
현대 각 교파 및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실제
A. 각 교파의 성만찬 순서
B. 예배당 내부구조
C. 실 례
성만찬의 실제적 제언
A. 성만찬 예배의 과제
B. 성만찬 예전의 모델
결 론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식으로 채용되었으며,16세기 트랜트 회의에서 최정범식의 작성을 보았던 것이다.13)
중세 카톨릭 교회의 성만찬은 화체설과 더불어 예배에 있어 극적인 신비의 현상으로 집례되었기 때문에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그리고 매주일 예배에서 빠짐없이 집례되어졌으나 불행하게도 사제의 행위에 머물렀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어 상대적으로 설교가 경시되어졌다.
2. 루터의 견해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물질이 있는 곳에 현실로 임재한다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즉 주님의 몸이 성찬 물질의 안에,밑에,함께계신다고 했는데, 이는 14세기에 있었던 오캄의 유명론에서 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루터는 믿는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질 수 있도록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의 지역적인 임재를 믿었고,‘공간속에 연장된
9) 조용술,“희생에서 본 성례전의 유형”, 기독교사상 1964.10 p.54.
10) Donald G. Bloesch, 목회와 신학, 오성춘 최건호 공역,(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1993),pp.51-53.
11) 정장복,예배학 개론, (서울:종로서적,1985),p.181 - 182.
12) L.Berkhof,뻘콥 조직신학 3, 고영민 역,(서울:기독교문사,1979),p.675.
13) 박형용, 조직신학 4 , (서울: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회,1977),p.331.
몸’이란 용어를 사용했다.14) 루터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평신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서도 피를 흘리셨던 것이라고 했다.그러므로 루터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들을 제외시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권한은 천사에게도 없고 교황이나 공의회의 권한에도 없다고 주장하였다.15) 이처럼 루터는 평신도들의 성만찬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사제가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였다.루터의 신학은 전통적인 카톨릭 사상과 매우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그의 강조점은 희생적인 미사가 아니라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에 있었다.그러나 그는 거룩한 교제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에 동참한다고 주장하였다.16)
3. 쯔빙글리의 견해
쯔빙글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예배에 임재하신다.하지만 그의 몸과 피 곧 그의 인성은 하늘 곧 아버지의 우편에 제한되어 계신다. 성만찬은 우리가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회고하는 점에 있어서 그것에 감사하는 ‘기념’일 뿐 이라고 하여 기념설을 주장했다.17) 그러므로 그는 성만찬을 단지 기념적 행위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의 기념과 신앙 공동체 의식의 근거로써 단순화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하고 말았다.그래서 그는 성만찬을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기념적 행사로 간주하여 년 2회로 함이 좋다는 견해를 펴 성만찬 예배의 경시 현상을 개신교에 유산으로 물려주고 말았던 것이다.18)
4. 칼빈의 견해
칼빈은 성만찬에 있어서 쯔빙글리와 루터 사이의 중간 위치를 취하였다. 칼빈은 성찬은 주님이 우리 마음에 인쳐 주시는 외적 표시로써,우리에게 향한 그의 선한 뜻의 약속으로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북돋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물질적 요소인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표상과 상징에 불과하며,그리스도는 떡의 물질에 부가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성령의 힘에 의해 성례는 일어남으로 우리들의 마음으로는 그는 이해할 수 없고,신앙으로 받아들일 뿐이라고 했다.성찬의 효과는 말씀에 달려있고,말씀과 하나님의 약속과 물질들을 분리시킴은 잘못이라 했고 성례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 신앙을 봉헌하는 것이고,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19)
칼빈과 루터가 쯔빙글리보다도 성찬의 진정한 의미를 보다 잘 파악했다. 칼빈과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은 과거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재적 사건이기도 하다. 성찬은 단지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총의 방편이기도 하다.떡과 포도주는 하나의 상징이지만,그것은 상징이 나타내는 실체에 참여하는 상징이다. 그것들은 단순히 외적인 상징이 아니라,효력 있는 상징인 것이다.성령으로 말미암아 떡과 포도주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를 전달한다.쯔빙글리의 중요한 공헌은 성찬을 교제의 식사 및 그리스도께 재헌신하는 사건
14) 박형용,“루터와 칼빈의 성례관 비교” 1968:로고스,v.20.(서울:크리스챤 헤럴드사),pp.52-53.
15) 지원용, 루터의 사상 : 신학과 교육 ,(서울:컨콜디아사,1982), p.141.
16) Donald G. Bloesch, 목회와 신학,pp.56.
17) Tony Lane,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 사상사,김응국 역,(서울:나침판사,1984),pp.275-279.
18) Ibid.
19) 박형용, “루터와 칼빈의 성례관 비교”,pp.54-56.
이라고 생각한 데에 있다.20)
C. 성만찬의 의미
성만찬은 신학적 의미보다 구속의 위대한 사역을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대하는 감격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신 구속의 사랑 때문이므로 초대교회에서 부터 성만찬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험하는 데에 기독교는 최우선적인 신학적 관심을 두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성례전 전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져오는 새로운 계약이 성립되고 반복되는 예전으로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마다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신학적 의미는 어떤 면에서 카톨릭의 화체설보다 더욱 깊은 뜻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내용이라 하겠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의 형을 대신 지시고 희생하신 주님의 구속사건에 대한 철저한 회상을 요구하는 예전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또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발생과 계속적인 성만찬의 거행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그 지체를 이룬 무리들이 동일한 신앙 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한다는 깊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성만찬은 화체설과 더불어 예배에 있어 극적인 신비의 현상으로 집례되었기 때문에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그리고 매주일 예배에서 빠짐없이 집례되어졌으나 불행하게도 사제의 행위에 머물렀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어 상대적으로 설교가 경시되어졌다.
2. 루터의 견해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물질이 있는 곳에 현실로 임재한다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즉 주님의 몸이 성찬 물질의 안에,밑에,함께계신다고 했는데, 이는 14세기에 있었던 오캄의 유명론에서 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루터는 믿는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질 수 있도록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의 지역적인 임재를 믿었고,‘공간속에 연장된
9) 조용술,“희생에서 본 성례전의 유형”, 기독교사상 1964.10 p.54.
10) Donald G. Bloesch, 목회와 신학, 오성춘 최건호 공역,(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1993),pp.51-53.
11) 정장복,예배학 개론, (서울:종로서적,1985),p.181 - 182.
12) L.Berkhof,뻘콥 조직신학 3, 고영민 역,(서울:기독교문사,1979),p.675.
13) 박형용, 조직신학 4 , (서울: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회,1977),p.331.
몸’이란 용어를 사용했다.14) 루터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평신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서도 피를 흘리셨던 것이라고 했다.그러므로 루터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들을 제외시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권한은 천사에게도 없고 교황이나 공의회의 권한에도 없다고 주장하였다.15) 이처럼 루터는 평신도들의 성만찬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사제가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였다.루터의 신학은 전통적인 카톨릭 사상과 매우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그의 강조점은 희생적인 미사가 아니라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에 있었다.그러나 그는 거룩한 교제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에 동참한다고 주장하였다.16)
3. 쯔빙글리의 견해
쯔빙글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예배에 임재하신다.하지만 그의 몸과 피 곧 그의 인성은 하늘 곧 아버지의 우편에 제한되어 계신다. 성만찬은 우리가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회고하는 점에 있어서 그것에 감사하는 ‘기념’일 뿐 이라고 하여 기념설을 주장했다.17) 그러므로 그는 성만찬을 단지 기념적 행위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의 기념과 신앙 공동체 의식의 근거로써 단순화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하고 말았다.그래서 그는 성만찬을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기념적 행사로 간주하여 년 2회로 함이 좋다는 견해를 펴 성만찬 예배의 경시 현상을 개신교에 유산으로 물려주고 말았던 것이다.18)
4. 칼빈의 견해
칼빈은 성만찬에 있어서 쯔빙글리와 루터 사이의 중간 위치를 취하였다. 칼빈은 성찬은 주님이 우리 마음에 인쳐 주시는 외적 표시로써,우리에게 향한 그의 선한 뜻의 약속으로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북돋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물질적 요소인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표상과 상징에 불과하며,그리스도는 떡의 물질에 부가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성령의 힘에 의해 성례는 일어남으로 우리들의 마음으로는 그는 이해할 수 없고,신앙으로 받아들일 뿐이라고 했다.성찬의 효과는 말씀에 달려있고,말씀과 하나님의 약속과 물질들을 분리시킴은 잘못이라 했고 성례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 신앙을 봉헌하는 것이고,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19)
칼빈과 루터가 쯔빙글리보다도 성찬의 진정한 의미를 보다 잘 파악했다. 칼빈과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은 과거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재적 사건이기도 하다. 성찬은 단지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총의 방편이기도 하다.떡과 포도주는 하나의 상징이지만,그것은 상징이 나타내는 실체에 참여하는 상징이다. 그것들은 단순히 외적인 상징이 아니라,효력 있는 상징인 것이다.성령으로 말미암아 떡과 포도주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를 전달한다.쯔빙글리의 중요한 공헌은 성찬을 교제의 식사 및 그리스도께 재헌신하는 사건
14) 박형용,“루터와 칼빈의 성례관 비교” 1968:로고스,v.20.(서울:크리스챤 헤럴드사),pp.52-53.
15) 지원용, 루터의 사상 : 신학과 교육 ,(서울:컨콜디아사,1982), p.141.
16) Donald G. Bloesch, 목회와 신학,pp.56.
17) Tony Lane,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 사상사,김응국 역,(서울:나침판사,1984),pp.275-279.
18) Ibid.
19) 박형용, “루터와 칼빈의 성례관 비교”,pp.54-56.
이라고 생각한 데에 있다.20)
C. 성만찬의 의미
성만찬은 신학적 의미보다 구속의 위대한 사역을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대하는 감격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신 구속의 사랑 때문이므로 초대교회에서 부터 성만찬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험하는 데에 기독교는 최우선적인 신학적 관심을 두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성례전 전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져오는 새로운 계약이 성립되고 반복되는 예전으로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마다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신학적 의미는 어떤 면에서 카톨릭의 화체설보다 더욱 깊은 뜻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내용이라 하겠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의 형을 대신 지시고 희생하신 주님의 구속사건에 대한 철저한 회상을 요구하는 예전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또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발생과 계속적인 성만찬의 거행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그 지체를 이룬 무리들이 동일한 신앙 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한다는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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