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부흥회의 동기
2) 부흥운동의 원인과 배경
3) 부흥운동의 경과
4) 비정치화 교회 신앙과 민족적 기독교
5) 부흥운동의 교회사적 평가
6) 1907년 대부흥운동이 신앙 형태에 미친 영향
Ⅲ. 결론
* 참고문헌
Ⅱ. 본론
1) 부흥회의 동기
2) 부흥운동의 원인과 배경
3) 부흥운동의 경과
4) 비정치화 교회 신앙과 민족적 기독교
5) 부흥운동의 교회사적 평가
6) 1907년 대부흥운동이 신앙 형태에 미친 영향
Ⅲ.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으며 교회도 급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비정치적 개인구원의 복음이 교회 안에 1907년부터 자리잡게 되면서 두 가지 형태의 신앙 흐름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Ⅲ. 결론
역사적으로 말한다면 한국 교회는 부흥회적인 관련 속에서 출발했다. 1907년 전국교회에 부흥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 나타난 결과 중 하나는 교회의 양적, 영적 부흥이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이 전적으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에서 기인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만일 성장이 1907년의 부흥에 의해 촉진된 것이라면 1907까지의 교회 성장률은 적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통계에 의하면 부흥운동이 교회성장의 시초가 되지 못한다. 부흥은 교회가 성장일로에 있던 19년 간의 후반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대부흥운동이 폭발적인 교회성장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백낙준은 “그러한 부흥이 비기독교인들을 개종시키는 운동이었다고 하기보다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되찾게 하는 일이었다.”라고 지적하였다.
1907년을 전후하여 한국교회가 부흥하면서 주일학교 역시 급성장 했는데, 더 많은 교사들과 효율적인 조직운영과 지원이 필요하여 장감이 공동으로 협력해야만 했다. 그 결과 세계 주일학교협회의 한국 지부가 결성되었다. 선교사들은 전도구역을 분할하여 전도사역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협정을 맺었다. 1907년에는 남감리교와 북장로교 선교부 사이에 합의가 성립되어 강원도 북부로 3/2와 서울 이북의 경기도 지방은 남감리교에서 맡고, 강원도 남쪽으로 3/1과 서울서 동쪽과 서쪽에 있던 남감리교의 모든 구역은 북감리교에서 맡게 되었다. 1908년에는 남감리교와 캐나다 장로교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 원산 이남의 함경도 지방은 남감리교가 맡고 그 외의 함경도 지방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가 맡게 되었다. 서울 이남의 충청북도 지방은 북장로교가 전도하고, 충청남도는 북감리교, 전라도는 남장로교에서 각기 맡아서 전도하게 되었으며, 동남쪽으로 경상남도는 호주 선교부가 맡고, 나머지 지방은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기로 하였다. 선교사들은 단일교회를 세우는 일은 실패했을지라도 그나마 합의를 통해 상호 ‘예양’이라도 행할 수 있었던 것에 의의를 느꼈다. 그러나 이 연합은 분할을 위한 연합이었다. 각 지역의 교인들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교파가 결정되었고 일순간에 바뀌었으며,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교파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일단 나뉘고 난 뒤에 교파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비정치화는 부흥운동이 낳은 대표적인 부정적인 결과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가면서 반일의 소리가 높아가자 선교사들은 무력항쟁의 소지가 높아간다고 판단했다. 이에 교인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영적인 데로 치중하도록 이끌었다. 그런데 교인들의 편에서 생각하면, 암울했던 당시의 그리스도인이라면 민족의 고난이나 식민지적 상황에 무심하거나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도모한 한국교회의 비정치화는 이를 따랐던 한국교인의 입장에서 민족 현실에 손을 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나름대로 신앙인의 면모를 보여준 면도 있었다. 하지만 신앙생활로써 시민적 책임을 대체하고자 하였던 것은 당시에 기독교가 받았던 국가적 기대를 저버린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흥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민족적 수난의 시기를 겪는 이들에게, 억울하게 눌리고 배고프게 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을 꿰뚫어 보고, 그 원인을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제거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신앙과 각오를 주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구조적 원인을 못 보게 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 한국 교회사학 연구원,「 한국 기독교 사상」(연세대학교 출판부, 1998)
· 김민영, 「한국 초대 교회사」,( 쿰란출판사,1998)
· 최재건 박사 편, 「근현대 부흥운동사」,(기독교문서선교회,2007)
· 성갑식, 「한국역사와 기독교」,(대한기독교서회,1983)
· 박명수, 「한국교회 부흥운동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2003)
· 김진환, 「 한국교회부흥운동사」(크리스챤비전사, 1976)
· 민경배, 「한국의 기독교」(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1975)
· 제7회 국제학술대회 준비위원회 편,「21세기 한국교회의 영적각성과 부흥」,(장로회신학대학교,2007)
· 한완상, 「한국 교회, 이대로 좋은가?」,(대한기독교출판사,1984)
Ⅲ. 결론
역사적으로 말한다면 한국 교회는 부흥회적인 관련 속에서 출발했다. 1907년 전국교회에 부흥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 나타난 결과 중 하나는 교회의 양적, 영적 부흥이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이 전적으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에서 기인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만일 성장이 1907년의 부흥에 의해 촉진된 것이라면 1907까지의 교회 성장률은 적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통계에 의하면 부흥운동이 교회성장의 시초가 되지 못한다. 부흥은 교회가 성장일로에 있던 19년 간의 후반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대부흥운동이 폭발적인 교회성장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백낙준은 “그러한 부흥이 비기독교인들을 개종시키는 운동이었다고 하기보다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되찾게 하는 일이었다.”라고 지적하였다.
1907년을 전후하여 한국교회가 부흥하면서 주일학교 역시 급성장 했는데, 더 많은 교사들과 효율적인 조직운영과 지원이 필요하여 장감이 공동으로 협력해야만 했다. 그 결과 세계 주일학교협회의 한국 지부가 결성되었다. 선교사들은 전도구역을 분할하여 전도사역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협정을 맺었다. 1907년에는 남감리교와 북장로교 선교부 사이에 합의가 성립되어 강원도 북부로 3/2와 서울 이북의 경기도 지방은 남감리교에서 맡고, 강원도 남쪽으로 3/1과 서울서 동쪽과 서쪽에 있던 남감리교의 모든 구역은 북감리교에서 맡게 되었다. 1908년에는 남감리교와 캐나다 장로교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 원산 이남의 함경도 지방은 남감리교가 맡고 그 외의 함경도 지방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가 맡게 되었다. 서울 이남의 충청북도 지방은 북장로교가 전도하고, 충청남도는 북감리교, 전라도는 남장로교에서 각기 맡아서 전도하게 되었으며, 동남쪽으로 경상남도는 호주 선교부가 맡고, 나머지 지방은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기로 하였다. 선교사들은 단일교회를 세우는 일은 실패했을지라도 그나마 합의를 통해 상호 ‘예양’이라도 행할 수 있었던 것에 의의를 느꼈다. 그러나 이 연합은 분할을 위한 연합이었다. 각 지역의 교인들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교파가 결정되었고 일순간에 바뀌었으며,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교파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일단 나뉘고 난 뒤에 교파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비정치화는 부흥운동이 낳은 대표적인 부정적인 결과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가면서 반일의 소리가 높아가자 선교사들은 무력항쟁의 소지가 높아간다고 판단했다. 이에 교인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영적인 데로 치중하도록 이끌었다. 그런데 교인들의 편에서 생각하면, 암울했던 당시의 그리스도인이라면 민족의 고난이나 식민지적 상황에 무심하거나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도모한 한국교회의 비정치화는 이를 따랐던 한국교인의 입장에서 민족 현실에 손을 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나름대로 신앙인의 면모를 보여준 면도 있었다. 하지만 신앙생활로써 시민적 책임을 대체하고자 하였던 것은 당시에 기독교가 받았던 국가적 기대를 저버린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흥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민족적 수난의 시기를 겪는 이들에게, 억울하게 눌리고 배고프게 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을 꿰뚫어 보고, 그 원인을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제거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신앙과 각오를 주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구조적 원인을 못 보게 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 한국 교회사학 연구원,「 한국 기독교 사상」(연세대학교 출판부, 1998)
· 김민영, 「한국 초대 교회사」,( 쿰란출판사,1998)
· 최재건 박사 편, 「근현대 부흥운동사」,(기독교문서선교회,2007)
· 성갑식, 「한국역사와 기독교」,(대한기독교서회,1983)
· 박명수, 「한국교회 부흥운동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2003)
· 김진환, 「 한국교회부흥운동사」(크리스챤비전사, 1976)
· 민경배, 「한국의 기독교」(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1975)
· 제7회 국제학술대회 준비위원회 편,「21세기 한국교회의 영적각성과 부흥」,(장로회신학대학교,2007)
· 한완상, 「한국 교회, 이대로 좋은가?」,(대한기독교출판사,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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