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관계
3. 제국주의 시대의 아시아 선교
4. 제국주의와 가톨릭과 개신교 중국선교
1) 교안(敎案)
2) 태평천국의 난
5. 나가며
2.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관계
3. 제국주의 시대의 아시아 선교
4. 제국주의와 가톨릭과 개신교 중국선교
1) 교안(敎案)
2) 태평천국의 난
5. 나가며
본문내용
금지시키려 하는 인도 아편의 대 중국 수출을 영국이 기어코 확보하고야 말겠다고 작정한데 있었다. 이 전쟁을 종식시킨 남경조약(1842)으로 중국에 거주하는 서구인들은 여러 이득을 얻게 된다. 홍콩은 영국에 할양되어 영국의 신민지기 되었다. 5개의 조역항구들-광동(廣東), 하문(廈門), 복주(福州), 영파(寧波), 상하이(上海)-은 외국인들에게 개방되었다. 치외법권의 원칙에 의하여 외국인들은 자국의 법률과 관리들에 의한 재판권을 보장받게 되었다. 조약문에 종교에 관한 조항이 특별히 마련되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상인들 못지않게 선교사들도 외국인들에게 부여된 특권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선교사들은 전쟁을 개탄타고 조약의 내용이 제대로 결정되었는지를 의심하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중국이 복음에 대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우세하였다. 너무나 명백하게 군함과 대포의 뒤를 좇아 기독교가 들어갔다는 사실은 중국 내의 기독교 사업에 영원히 떼어버릴 수 없는 장애요소가 된다. 이 기간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저술은 Louis Wei Tsing-sing, La politique Missionaire de La France en Chine 1842-1856 (Paris 1960); 스티븐 니일, 위의 책 350에서 재인용.
조약체결 후 몇 년 이내에 런던 선교회(LMS)와 CMS 두 단체가 대거로 몰려 왔으며 이어 감리교, 장로교가 뒤따랐고, 미국에서는 회중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감리교, 성공회 등이 뒤따랐다. 1860년까지 중국에서 일한 선교사는 개신교 선교사 214명에 불과했고, 이들이 사역한 지역을 매우 적은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많은 문제점이 야기된다.
1)교안(敎案)
이시악은 선교사들에 의해 교인이 된 중국 사람들을 대개 다음의 4종류로 구별하였다. 첫째,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둘째, 교회의 부동산에 의지하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입교한 사람들로 대개 교회 토지를 부치는 농민 및 교회의 일을 관리하는 무리 등이 여기에 속했다. 셋째, 교회의 하찮은 은혜를 탐내 교민을 일종의 직업 내지 직함으로 생각하는 무뢰 유민들이 있었다. 넷째, 교회 세력에 기대어 착취에 저항하고 도리어 타인을 착취하는 사람들로 소수 외국인의 힘을 빌어 권위와 복을 꾀하는 악인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소수의 셋째, 넷째에 해당하는 자들이 기독교 해외 포교운동의 정치 침략성에 부합하여 교회 선교사의 비호를 받아 교민의 대표를 이루었다는데 있었다. 이시악 외 지음/ 이은자 역,『제국주의의 침략과 민중운동; 근대중국의 반기독교 운동』,(서울: 고려원, 1992), 23.
심지어 중죄인이 입교하여 보후를 구한 경우도 있었고 어떤 사람과 원수가 되면 선교사에 의탁하여 원수를 갚기도 하였다. 선교사는 무뢰배를 비호하여 그 위세를 표시하고 무뢰배는 선교사에 의지하여 선량한 민중을 압박하였다. 이에 반기독교적인 교안들이 일어난 것은 필연적 추세였다.
남경교안은 청이 개입한 첫 번째 박해사건으로 예수회가 중국 선교를 시작한 지 30여 년 만에 발생하여 기독교가 중국의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세력으로 인식될 때 어떠한 적대적 반응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남경교안(南京敎案)에 대해서는 주로 예수회 보관자료를 이용한 연구가 많으나 중국 측 자료가 충실히 남아있고, 특히 『破師集』이 집중적으로 연구되면 더 풍부한 학문적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張維華,1956.“南京敎案始末” 『中國近代史論叢』.第1輯 第二冊. 臺北 : 正中書國,201-226; 도희서 등, 67-123; 보성관. 1993. “中國文化的第一次激烈衝突-明季南京敎案文化背景분석.” 『史學集刊 4』, 57-63; Kelly, Edward Thomas. 1971. \"The Anti-christian Persecution of 1616-1617 in Nanking.\" Ph. D, diss., Columbia Univ.; Young, John D. 1983.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the First Encounter. Hong Kong: Hong Kong Univ. Press,59-76)등 참조. 안경덕, 위의 글,53에서 재인용.
1616년 5월부터 12월까지 남경예부시랑 심각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중국의 법통을 혼란시키고 무리를 만들어 불궤를 꾀하며 요순 이래의 역법을 혼란시키며 천주교 교인은 제사를 소홀히 하여 이어오는 좋은 풍습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상소를 세 차례나 올렸고, 예부상서 방종철, 내관 위진충. 유조, 유학자 안문휘, 서여가 등의 도움을 받아 1617년 2월 3일에 세 명의 예수회 신부를 포함한 27명의 천주교 관련 구속자에 대하여 중앙정부차원의 징계와 함께 선교활동의 금지조치를 얻어 냈다. 심각은 선교사들의 불법입국, 국가존위가 걸린 선교활동, 중국의 전통이론과 상치되는 서양의 천문, 역법 등을 문제 삼았다. 심각은 왕조와 중국 전통의 수호자로서 성실한 관리의 입장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안경덕, 위의 글,56.
남경교안은 역사적으로 건국 수도였고 정통을 수호한다는 자부심 깔린 보수적 성격의 도시였던 남경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이곳에서 사교(邪敎)인 가톨릭이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여 가톨릭이 정통을 위해하는 잠재성이 있다는 것을 고발하고 알려 중앙정부 차원의 조치를 요구한 사건이었다. 이 교안의 영향으로 천주교가 사교로 인식 되었고 천주교가 선교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중앙정부 차원의 금교조치를 당했고,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서 5년 이상 추방당하여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반기독교 세력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역사적으로는 국기를 흔드는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중복하여 일어났으므로 외세에 대한 경계와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불안정하고 방어적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606-1607년에 반교사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취한 입장은 다른 사교에 대하여도 동일하게 견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교사인이라 통칭되는 수구세력들은 기독
조약체결 후 몇 년 이내에 런던 선교회(LMS)와 CMS 두 단체가 대거로 몰려 왔으며 이어 감리교, 장로교가 뒤따랐고, 미국에서는 회중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감리교, 성공회 등이 뒤따랐다. 1860년까지 중국에서 일한 선교사는 개신교 선교사 214명에 불과했고, 이들이 사역한 지역을 매우 적은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많은 문제점이 야기된다.
1)교안(敎案)
이시악은 선교사들에 의해 교인이 된 중국 사람들을 대개 다음의 4종류로 구별하였다. 첫째,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둘째, 교회의 부동산에 의지하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입교한 사람들로 대개 교회 토지를 부치는 농민 및 교회의 일을 관리하는 무리 등이 여기에 속했다. 셋째, 교회의 하찮은 은혜를 탐내 교민을 일종의 직업 내지 직함으로 생각하는 무뢰 유민들이 있었다. 넷째, 교회 세력에 기대어 착취에 저항하고 도리어 타인을 착취하는 사람들로 소수 외국인의 힘을 빌어 권위와 복을 꾀하는 악인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소수의 셋째, 넷째에 해당하는 자들이 기독교 해외 포교운동의 정치 침략성에 부합하여 교회 선교사의 비호를 받아 교민의 대표를 이루었다는데 있었다. 이시악 외 지음/ 이은자 역,『제국주의의 침략과 민중운동; 근대중국의 반기독교 운동』,(서울: 고려원, 1992), 23.
심지어 중죄인이 입교하여 보후를 구한 경우도 있었고 어떤 사람과 원수가 되면 선교사에 의탁하여 원수를 갚기도 하였다. 선교사는 무뢰배를 비호하여 그 위세를 표시하고 무뢰배는 선교사에 의지하여 선량한 민중을 압박하였다. 이에 반기독교적인 교안들이 일어난 것은 필연적 추세였다.
남경교안은 청이 개입한 첫 번째 박해사건으로 예수회가 중국 선교를 시작한 지 30여 년 만에 발생하여 기독교가 중국의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세력으로 인식될 때 어떠한 적대적 반응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남경교안(南京敎案)에 대해서는 주로 예수회 보관자료를 이용한 연구가 많으나 중국 측 자료가 충실히 남아있고, 특히 『破師集』이 집중적으로 연구되면 더 풍부한 학문적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張維華,1956.“南京敎案始末” 『中國近代史論叢』.第1輯 第二冊. 臺北 : 正中書國,201-226; 도희서 등, 67-123; 보성관. 1993. “中國文化的第一次激烈衝突-明季南京敎案文化背景분석.” 『史學集刊 4』, 57-63; Kelly, Edward Thomas. 1971. \"The Anti-christian Persecution of 1616-1617 in Nanking.\" Ph. D, diss., Columbia Univ.; Young, John D. 1983.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the First Encounter. Hong Kong: Hong Kong Univ. Press,59-76)등 참조. 안경덕, 위의 글,53에서 재인용.
1616년 5월부터 12월까지 남경예부시랑 심각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중국의 법통을 혼란시키고 무리를 만들어 불궤를 꾀하며 요순 이래의 역법을 혼란시키며 천주교 교인은 제사를 소홀히 하여 이어오는 좋은 풍습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상소를 세 차례나 올렸고, 예부상서 방종철, 내관 위진충. 유조, 유학자 안문휘, 서여가 등의 도움을 받아 1617년 2월 3일에 세 명의 예수회 신부를 포함한 27명의 천주교 관련 구속자에 대하여 중앙정부차원의 징계와 함께 선교활동의 금지조치를 얻어 냈다. 심각은 선교사들의 불법입국, 국가존위가 걸린 선교활동, 중국의 전통이론과 상치되는 서양의 천문, 역법 등을 문제 삼았다. 심각은 왕조와 중국 전통의 수호자로서 성실한 관리의 입장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안경덕, 위의 글,56.
남경교안은 역사적으로 건국 수도였고 정통을 수호한다는 자부심 깔린 보수적 성격의 도시였던 남경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이곳에서 사교(邪敎)인 가톨릭이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여 가톨릭이 정통을 위해하는 잠재성이 있다는 것을 고발하고 알려 중앙정부 차원의 조치를 요구한 사건이었다. 이 교안의 영향으로 천주교가 사교로 인식 되었고 천주교가 선교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중앙정부 차원의 금교조치를 당했고,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서 5년 이상 추방당하여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반기독교 세력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역사적으로는 국기를 흔드는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중복하여 일어났으므로 외세에 대한 경계와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불안정하고 방어적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606-1607년에 반교사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취한 입장은 다른 사교에 대하여도 동일하게 견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교사인이라 통칭되는 수구세력들은 기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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