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 전후경제복구건설과 사회주의적 개조(1953~1958) ,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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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 전후경제복구건설과 사회주의적 개조(1953~1958) ,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 체제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4장 전후경제복구건설과 사회주의적 개조(1953~1958)
 1. 전후 정치 역학 관계의 변화와 소련계 비판
 2. 개인숭배 비판과 '8월종파사건'
 3. 전후의 당, 군관계
 4. 전후 경제건설에서 중공업중시노선의 추이와 성장속도 문제
 5. 전후 산업부문에서 당, 직업동맹
 6. 농업집단화의 전개와 완료
 7. 농업집단화의 중요 측면
 8. 소결

제5장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 체제 확립(1958~1961)
 1. 만주파의 권력 장악과 당의 '일원적 지도' 체제
 2. 만주파의 당, 군 장악과 당, 군 일체화
 3. 사회주의 대고조에서 '자력갱생', '국방, 경제 병진'으로
 4. 공업부문에서 직업동맹 및 당사업체계의 전환 .
 5. 농촌당제도의 전환
 6. 소결

본문내용

김광협의 인민군창 건 제9주년기념 경축대회 보고 “인민군은 우리 선렬들의 애국전통, 특히 항일 무장투쟁의 혁명적 애국전통을 직접 계승했다”, 『로동신문』사설 “우리 조국의 믿음직한 수호자”, 『민주조선』사설 “인민군은 전취물의 믿음직한 보위자”
변화: ‘애국적 혁명전통’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요구
3. 사회주의대고조에서 [자력갱생][국방경제 병진]으로
제1차 5개년 계획과 사회주의의 대고조
- 1958년 3월 3~6일 당 제1차 대표자회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경제 발전 제1차 5개년(1957~61)계획안」 채택 → ‘자립적 민족경제’라는 표현이 처음 공식화, 내용은 “사회주의 경제형태의 유일적 지배”와 같은 의미
- 김일성의 노선 = 북조선 경제의 ‘법칙’, 경제발전 과정 지배, 중공업 중시론자 들의 승리
- 1958년 6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 김일성, 사회주의혁명과 사 회주의건설이 고조에 들어섰음을 선언
- 대중 동원 방식: 1958년 6월 ‘집단적 혁신 운동’ → 59년 3월 ‘천리마작업반운 동’으로 한층 더 비약함 (경제부문에 군사적 성격)
작업반 단위로 한 공산주의 교양운동이 혁신운동과 결합하여 천리마운동으로 발전
계획의 조기 달성과 경제성장 속도 문제
- 1959년 1월 24일 『로동신문』사설: 내각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중요발언’, “5개년 계획을 2년 이상 앞당겨 1959년 안에 초과 완수한다고 확정”
- 1959년 3월 ‘천리마운동’ 발기 → 전국적 확대, ‘사회주의건설의 총노선’이란 위 치 부여
「완충기」의 설정: 저성장과 소비재 중시
- 8월 중순 몇 차례에 걸쳐 당중앙위 상무위 확대회의 개최: 공업관리 체계 개편, 중앙공업과 함께 지방공업체계를 확립할 데 대한 결정 채택, 1960년도 경제계 획의 기본방향을 제시하고 1960년도를 ‘완충기’로 규정, 제2차 5개년 계획을 준비하는 해로 정함
- 그러나 곧 과도한 목표를 설정하는 방식과 미달성된 사실을 감추는 방식 부활
7개년 계획과 고성장노선으로의 복귀
- 1961년 9월 11~17일 제4회 당대회: ‘인민경제발전 7개년 계획’ 채택
- 7개년 계획도 “중공업 우선적 성장 보장, 경공업과 농촌경리 동시 발전” 노선 견지, 전반기 3년: 경공업과 농업을 발전시켜 인민생활 개선 역량에 집중, 후반 기 4년: 중공업기지를 확장하여 그 기술적 장비를 개선하는 데 집중
- 완충기 설정을 통하여 완화된 고성장노선의 부활
「자력갱생」과 「국방경제 병진」노선
- 경제성장을 위한 제반 조건의 장애: 1961년 10월 소련공산당 제22차 대회에서 중소분쟁 폭발, 그 영향으로 소련과의 냉각관계 시작
- 7개년 계획과 관련하여 소련에서 어떠한 원조 약속도 얻지 못함
- 1990년대에 김일성이 사용하던 ‘자력갱생’이란 용어가 이때 처음 쓰인 것
- 자력갱생: 대중적 동원을 최대화하여 계속해서 높은 성장률을 견지하기 위한 목 적에서, 악화한 대외적 환경을 참고 견뎌 내기 위한 정책 → ‘경제우선’ 정책의 연장
- 1962년 12월 북조선 경제발전노선의 근본적 전환
- 경제건설과 군사력 강화의 병진정책 채택, 정전 이래 견지해 온 경제우선 정책 이 변경됨
- ‘자력갱생’ 의미에 군사적 성격 추가
4. 공업부문에서 직업동맹 및 당사업체계의 전환
집단혁신운동에서 천리마운동으로
- 1959년 3월 발기된 ‘천리마작업반운동’: 개개의 작업반에서 → 전 직장, 기업 소, 모든 집단에 이르기까지 확대, 발전,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구호가 만들어짐
- 천리마운동의 주요 목적: 생산력 증대를 위해 사상의식을 공산주의적으로 개조 한다는 데 있었음
직업동맹의 성격 변화
- 1958년 초 직맹 내 숙청작업이 일단락되었지만, 제1차 5개년 계획 수행과정에 서 직맹의 위상은 근본적으로 변화(천리마작업반운동의 영향)
- 1959년 8월 노동부 폐지: 노동부가 수행하고 있는 노동규준량과 임금의 사정업 무 등 노동행정사업의 일부 기능을 직맹중앙위원회에 이관하는 조치가 취해짐
사회단체로서 직맹의 강화가 아닌 직맹의 ‘국가화’ 의미
공업부문에서 당 우위 원칙 춥립
- 1960년 1월 5~12일 각 도당의 토의를 거쳐 1월 15일 당중앙위 상무위원회 결 정 「국가기관 및 경제 문화기관에 대한 당의 령도와 통제를 강화할 데 대하여」
- 당의 지도에 관한 결정 내용이 국가법령으로 성문화 →1960년 4월 29일 「도시군구역 인민위원회에 관한 잠정적 규정」
당이 국가기구의 상위에 있음을 정식으로 규정
공장관리에서 당의 일원적 통제체제 확립
- 천리마작업반운동이 확대됨에 따라 공장 내부에서 노동관계의 중심이 작업반으 로 이동 → 1961년 6월부터 해당 당위원회 지도하에 각 공장에서 사상교양 단 위를 생산 단위와 합쳐서 개편하는 작업 진행
- 모든 작업반의 일과: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학습 → 작업반이 혁명전 통교양을 위한 거점이 됨, 빨찌산 전사는 생산의 확대를 위해 일하는 ‘산업전 사’의 모범
- 새로운 공장관리체제: ‘대안의 사업체계’ → ‘천리마운동’, ‘청산리방법’과 함께 북조선을 대표하는 독자적인 경제건설 및 관리 방식으로 공식화, 공산주의적 사업 체계
5. 농촌당제도의 전환
지방 토착공산주의자의 숙청과 혁명전통 확립
- 지방 당과 인민위원회까지 숙청 확대 +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민족해방투쟁 의 정통성을 대표하도록 정치작업
- 일제시대 적색농민조합운동이 강했던 지역에 중앙당 집중지도 → 토착 좌인운 동출신인 당, 인민위원회 간부 상당수 숙청
청산리방법: 당의 일원적 지도체계
- 군내 당위원회제도 정착: 1960년에 접어들어서면서, ‘청산리 방법’을 농촌에, ‘대안의 사업체계’를 공장에 적용하여 전국적으로 ‘당위원회에 의한 일원적 통 제체제’를 시행
- 당군제도의 개편작업: 1960년 9월경 인민군당위원회에 의한 일원적 통제제도 로서 정착
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와 농업지도체계 개편
- 당정 관계 및 군대, 공장, 농촌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당의 일원적 지도 체계를 관철, ‘사회’를 생산단위의 작업반 수준까지 국가사회주의 안으로 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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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1.11
  • 저작시기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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