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4장 전후경제복구건설과 사회주의적 개조(1953~1958) ∙ 2
1. 전후 정치 역학관계의 변화와 소련계 비판 ∙ 2
2. 개인숭배 비판과 [8월 종파사건] ∙ 4
3. 전후의 당・군관계 ∙ 6
4. 전후 경제건설에서 중공업중시노선의 추이와 성장속도 문제 ∙ 8
5. 전후 산업부문에서 당・직업동맹 ∙ 10
6. 농업집단화의 전개와 완료 ∙ 12
7. 농업집단화의 중요 측면 ∙ 14
제5장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 체제 확립(1958~1961) ∙ 16
1. 만주파의 권력 장악과 당의 ‘일원적 지도’ 체제 ∙ 16
2. 만주파의 당・군 장악과 당・군 일체화 ∙ 17
3. 사회주의대고조에서 「자력갱생」, 「국방・경제 병진」으로 ∙ 19
4. 공업부문에서 직업동맹 및 당사업체계의 전환 ∙ 20
5. 농촌당제도의 전환 ∙ 21
1. 전후 정치 역학관계의 변화와 소련계 비판 ∙ 2
2. 개인숭배 비판과 [8월 종파사건] ∙ 4
3. 전후의 당・군관계 ∙ 6
4. 전후 경제건설에서 중공업중시노선의 추이와 성장속도 문제 ∙ 8
5. 전후 산업부문에서 당・직업동맹 ∙ 10
6. 농업집단화의 전개와 완료 ∙ 12
7. 농업집단화의 중요 측면 ∙ 14
제5장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 체제 확립(1958~1961) ∙ 16
1. 만주파의 권력 장악과 당의 ‘일원적 지도’ 체제 ∙ 16
2. 만주파의 당・군 장악과 당・군 일체화 ∙ 17
3. 사회주의대고조에서 「자력갱생」, 「국방・경제 병진」으로 ∙ 19
4. 공업부문에서 직업동맹 및 당사업체계의 전환 ∙ 20
5. 농촌당제도의 전환 ∙ 21
본문내용
자력갱생’ 의미에는 군사적 성격 추가
4. 공업부문에서 직업동맹 및 당사업체계의 전환(p.846)
집단혁신운동에서 천리마운동으로(p.846)
- 1958년 6월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 선언: 많은 기업소에서 종업원 총회와 열성 자 회의 개최, 이 자리에서 ‘집단적 혁신운동’이란 말이 등장하여 종래의 증산 경쟁운동을 대신하게 됨
- 집단적 혁신운동이 한창 고양되고 있을 때 ‘반혁명분자에 대한 투쟁’, 중앙당 집 중지도 등이 서로 상승작용을 함으로써 열광적인 분위기 조성
- 1958년 9월 26~27일 당중앙위원회 개최: 전 당원에게 5개년 계획을 1년 반 앞당겨 완수하도록 호소하는 ‘당중앙위원회 편지’ 채택
- 1959년 3월 발기된 ‘천리마작업반운동’: 개개의 작업반에서 → 전 직장, 기업 소, 모든 집단에 이르기까지 확대, 발전,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구호가 만들어짐
- 천리마운동의 주요 목적: 생산의 부단한 확대와 노동생산성의 성장, 이를 위해 사상의식을 공산주의적으로 개조하는 데 있었음 → 공산주의 교양운동과 결합
- 증산경쟁운동 → 집단적 혁신운동 → 천리마운동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당과 정부, 사회단체가 총동원, 직업동맹이 주도적 영할 수행
직업동맹의 성격 변화(p.854)
- 1958년 초 직맹 내 숙청작업이 일단락되었지만, 제1차 5개년 계획 수행과정에 서 직맹의 위상은 근본적으로 변화(천리마작업반운동의 영향)
- 1959년 8월 노동부 폐지: 노동부가 수행하고 있는 노동규준량과 임금의 사정업 무 등 노동행정사업의 일부 기능을 직맹중앙위원회에 이관하는 조치가 취해짐
사회단체로서 직맹의 강화가 아닌 직맹의 ‘국가화’ 의미
공업부문에서 당 우위 원칙 확립(p.857)
- 1960년 1월 5~12일 각 도당의 토의를 거쳐 1월 15일 당중앙위 상무위원회 결 정 「국가기관 및 경제 문화기관에 대한 당의 령도와 통제를 강화할 데 대하 여」
- 당의 지도에 관한 결정 내용이 국가법령으로 성문화 →1960년 4월 29일 「도시군구역 인민위원회에 관한 잠정적 규정」
당이 국가기구의 상위에 있음을 정식으로 규정
공장관리에서 당의 일원적 통제체제 확립(p.864)
- 천리마작업반운동이 확대됨에 따라 공장 내부에서 노동관계의 중심이 작업반으 로 이동 → 1961년 6월부터 해당 당위원회 지도하에 각 공장에서 사상교양 단 위를 생산 단위와 합쳐서 개편하는 작업 진행
- 모든 작업반의 일과: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학습 → 작업반이 혁명전 통교양을 위한 거점이 됨
- 빨찌산 전사는 생산의 확대를 위해 일하는 ‘산업전사’의 모범이 됨(이러한 이미 지 속에 노동자의 권리관계나 계약관계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완전히 없어짐)
- 새로운 공장관리체제: ‘대안의 사업체계’ → ‘천리마운동’, ‘청산리방법’과 함께 북조선을 대표하는 독자적인 경제건설 및 관리 방식으로 공식화, 공산주의적 사업 체계
5. 농촌당제도의 전환(p.875)
지방 토착공산주의자의 숙청과 혁명전통 확립(p.875)
- 지방 당과 인민위원회까지 숙청 확대 +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민족해방투쟁 의 정통성을 대표하도록 정치작업
- 일제시대 적색농민조합운동이 강했던 지역에 중앙당 집중지도 → 토착 좌인운 동출신인 당, 인민위원회 간부 상당수 숙청
- 함경남북도를 중심으로 하여 각 지방별로 ‘향토사’라는 이름 아래 토착운동에 대한 정리작업이 이루어짐 →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이 직접 국내와 연계를 가지고 전개된 지역이었으나 국내에 호응했던 것은 갑산계였음, 적색농조운동 지역이었던 길주, 명천, 성진의 농민투쟁은 독자적 투쟁전통, 혁명전통을 항일 무장투쟁으로 단일화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필요성 제기
- 농촌에서 지방주의와 가족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작업은 천리마작업반운동이 발 기되면서 동시에 착수
청산리방법: 당의 일원적 지도체계(p.887)
- 군내 당위원회제도 정착: 1960년에 접어들어서면서, ‘청산리 방법’을 농촌에, ‘대안의 사업체계’를 공장에 적용하여 전국적으로 ‘당위원회에 의한 일원적 통 제체제’를 시행
- 1959년 12월 당중앙위 전원회의: 인민경제 전반에 걸친 부진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생산에 대한 지도에서 당 우위 원칙이 명확해짐, 이 원칙을 농업부 문에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에 김일성이 직접 착수 → 시범 케이스로 강서군 청 산리 선정
- 김일성과 중앙지도그룹의 현지지도는 ‘청산리방법’으로 명명 → 전국 농촌 모범
- 당정 관계 및 군대, 공장, 농촌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당의 일원적 지도 체계를 관철, ‘사회’를 생산단위의 작업반 수준까지 국가사회주의 안으로 포섭
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와 농업지도체계 개편(p.897)
- 군농업협동조합경영위원회: 도인민위원회의 지도하에 군의 규모에 다라 11~17 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집단적 합의제’에 의하여 운영되는 국가기관
- 농업관리체계 개편: 군에서 개시, 1962년 7월에는 중앙과도 수준에서도 실시
도인민위원회에서 농촌경리부문이 분리되어 도농촌경리위원회 설치
도시군인민위원회에서 농촌경리에 대한 지도관리기능이 분리됨으로써 인 민위원회와 지방 농업지도기관 사이의 업무가 명확히 구분되어 일관된 농업지 도체계가 갖춰짐
- 도농촌경리위원회는 내각에 직속, 농업위원회의 행정, 기술적 지도를 받아 도내 국영농목장을 직접 관리, 협동조합에 대해서는 군협동조합경영위원회를 통하여 국가적 지도를 실현함으로써, 도내 농촌경리에 대한 통일적 관리와 지도를 실 현하는 전문적인 농업지도기관의 위치가 부여됨
북조선의 독특한 창조적인 해결책으로 자찬하고 있었으나 일견 모순된 체계: 리 단위에서는 행정 기구와 경제조직을 일체화하면서 거꾸로 군 단위에서는 양 자를 분리, 군농업협동조합경영위원회는 소유형태로서는 전 인민적 소유에 속 하는 국영기관인데 그것이 협동적 소유에 속하는 농업협동조합을 지도, 관리한 다는 문제 → 1959년 초 논쟁: ‘접근-융합론’, ‘통합-전환론’의 대립 후 접 근-융합론의 방향으로 정리, 리 단위 통합의 최초 전환에 이은 협동조합 국가 화 두 번째의 정책전환 성격
4. 공업부문에서 직업동맹 및 당사업체계의 전환(p.846)
집단혁신운동에서 천리마운동으로(p.846)
- 1958년 6월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 선언: 많은 기업소에서 종업원 총회와 열성 자 회의 개최, 이 자리에서 ‘집단적 혁신운동’이란 말이 등장하여 종래의 증산 경쟁운동을 대신하게 됨
- 집단적 혁신운동이 한창 고양되고 있을 때 ‘반혁명분자에 대한 투쟁’, 중앙당 집 중지도 등이 서로 상승작용을 함으로써 열광적인 분위기 조성
- 1958년 9월 26~27일 당중앙위원회 개최: 전 당원에게 5개년 계획을 1년 반 앞당겨 완수하도록 호소하는 ‘당중앙위원회 편지’ 채택
- 1959년 3월 발기된 ‘천리마작업반운동’: 개개의 작업반에서 → 전 직장, 기업 소, 모든 집단에 이르기까지 확대, 발전,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구호가 만들어짐
- 천리마운동의 주요 목적: 생산의 부단한 확대와 노동생산성의 성장, 이를 위해 사상의식을 공산주의적으로 개조하는 데 있었음 → 공산주의 교양운동과 결합
- 증산경쟁운동 → 집단적 혁신운동 → 천리마운동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당과 정부, 사회단체가 총동원, 직업동맹이 주도적 영할 수행
직업동맹의 성격 변화(p.854)
- 1958년 초 직맹 내 숙청작업이 일단락되었지만, 제1차 5개년 계획 수행과정에 서 직맹의 위상은 근본적으로 변화(천리마작업반운동의 영향)
- 1959년 8월 노동부 폐지: 노동부가 수행하고 있는 노동규준량과 임금의 사정업 무 등 노동행정사업의 일부 기능을 직맹중앙위원회에 이관하는 조치가 취해짐
사회단체로서 직맹의 강화가 아닌 직맹의 ‘국가화’ 의미
공업부문에서 당 우위 원칙 확립(p.857)
- 1960년 1월 5~12일 각 도당의 토의를 거쳐 1월 15일 당중앙위 상무위원회 결 정 「국가기관 및 경제 문화기관에 대한 당의 령도와 통제를 강화할 데 대하 여」
- 당의 지도에 관한 결정 내용이 국가법령으로 성문화 →1960년 4월 29일 「도시군구역 인민위원회에 관한 잠정적 규정」
당이 국가기구의 상위에 있음을 정식으로 규정
공장관리에서 당의 일원적 통제체제 확립(p.864)
- 천리마작업반운동이 확대됨에 따라 공장 내부에서 노동관계의 중심이 작업반으 로 이동 → 1961년 6월부터 해당 당위원회 지도하에 각 공장에서 사상교양 단 위를 생산 단위와 합쳐서 개편하는 작업 진행
- 모든 작업반의 일과: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학습 → 작업반이 혁명전 통교양을 위한 거점이 됨
- 빨찌산 전사는 생산의 확대를 위해 일하는 ‘산업전사’의 모범이 됨(이러한 이미 지 속에 노동자의 권리관계나 계약관계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완전히 없어짐)
- 새로운 공장관리체제: ‘대안의 사업체계’ → ‘천리마운동’, ‘청산리방법’과 함께 북조선을 대표하는 독자적인 경제건설 및 관리 방식으로 공식화, 공산주의적 사업 체계
5. 농촌당제도의 전환(p.875)
지방 토착공산주의자의 숙청과 혁명전통 확립(p.875)
- 지방 당과 인민위원회까지 숙청 확대 +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민족해방투쟁 의 정통성을 대표하도록 정치작업
- 일제시대 적색농민조합운동이 강했던 지역에 중앙당 집중지도 → 토착 좌인운 동출신인 당, 인민위원회 간부 상당수 숙청
- 함경남북도를 중심으로 하여 각 지방별로 ‘향토사’라는 이름 아래 토착운동에 대한 정리작업이 이루어짐 →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이 직접 국내와 연계를 가지고 전개된 지역이었으나 국내에 호응했던 것은 갑산계였음, 적색농조운동 지역이었던 길주, 명천, 성진의 농민투쟁은 독자적 투쟁전통, 혁명전통을 항일 무장투쟁으로 단일화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필요성 제기
- 농촌에서 지방주의와 가족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작업은 천리마작업반운동이 발 기되면서 동시에 착수
청산리방법: 당의 일원적 지도체계(p.887)
- 군내 당위원회제도 정착: 1960년에 접어들어서면서, ‘청산리 방법’을 농촌에, ‘대안의 사업체계’를 공장에 적용하여 전국적으로 ‘당위원회에 의한 일원적 통 제체제’를 시행
- 1959년 12월 당중앙위 전원회의: 인민경제 전반에 걸친 부진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생산에 대한 지도에서 당 우위 원칙이 명확해짐, 이 원칙을 농업부 문에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에 김일성이 직접 착수 → 시범 케이스로 강서군 청 산리 선정
- 김일성과 중앙지도그룹의 현지지도는 ‘청산리방법’으로 명명 → 전국 농촌 모범
- 당정 관계 및 군대, 공장, 농촌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당의 일원적 지도 체계를 관철, ‘사회’를 생산단위의 작업반 수준까지 국가사회주의 안으로 포섭
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와 농업지도체계 개편(p.897)
- 군농업협동조합경영위원회: 도인민위원회의 지도하에 군의 규모에 다라 11~17 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집단적 합의제’에 의하여 운영되는 국가기관
- 농업관리체계 개편: 군에서 개시, 1962년 7월에는 중앙과도 수준에서도 실시
도인민위원회에서 농촌경리부문이 분리되어 도농촌경리위원회 설치
도시군인민위원회에서 농촌경리에 대한 지도관리기능이 분리됨으로써 인 민위원회와 지방 농업지도기관 사이의 업무가 명확히 구분되어 일관된 농업지 도체계가 갖춰짐
- 도농촌경리위원회는 내각에 직속, 농업위원회의 행정, 기술적 지도를 받아 도내 국영농목장을 직접 관리, 협동조합에 대해서는 군협동조합경영위원회를 통하여 국가적 지도를 실현함으로써, 도내 농촌경리에 대한 통일적 관리와 지도를 실 현하는 전문적인 농업지도기관의 위치가 부여됨
북조선의 독특한 창조적인 해결책으로 자찬하고 있었으나 일견 모순된 체계: 리 단위에서는 행정 기구와 경제조직을 일체화하면서 거꾸로 군 단위에서는 양 자를 분리, 군농업협동조합경영위원회는 소유형태로서는 전 인민적 소유에 속 하는 국영기관인데 그것이 협동적 소유에 속하는 농업협동조합을 지도, 관리한 다는 문제 → 1959년 초 논쟁: ‘접근-융합론’, ‘통합-전환론’의 대립 후 접 근-융합론의 방향으로 정리, 리 단위 통합의 최초 전환에 이은 협동조합 국가 화 두 번째의 정책전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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