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선교대회와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즘 - 1910년 에든버러 대회와 1928년 예루살렘 대회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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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계선교대회와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즘 - 1910년 에든버러 대회와 1928년 예루살렘 대회를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세계선교와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의 흐름 - 1910년대와 1920년대를 중심으로-
1. 세계선교의 동향
2. 한국교회의 상황
Ⅲ. 에든버러 선교대회(1910)와 한국교회
1. 한국대표의 참여
2. ‘선교사 위주의 에큐메니즘’에서 ‘본토민 신자 위주의 에큐메니즘’으로의 전환과 확장
Ⅳ. 예루살렘 선교대회(1928)와 한국교회
1. 예루살렘 대회와 한국교회의 참여
2. 사회선교로의 인식의 전환과 ‘본토민 신자 위주의 에큐메니즘’의 활성화
Ⅴ. 나가며

본문내용

다고 역설했다. 그러면 기독교인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이고 교회는 더한층 풍성한 자원을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Basil Matthews, 『Roads to the City of God : A world Outlook from Jerusalem』, (NY: Missionary Education Movement of the United State and Canada, 1928), 55. 최재건,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와 한국교회,” 「신학논단」45(2006/7), 198에서 재인용.
그는 이 대회에서 발표한 글을 귀국 후 The Korea Mission Field 1928년 9월호에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약 50년의 선교역사에 30만 한국인 신도에 4천여 교회를 이루었으며, 장로교회는 중국 산동에 3명의 선교사를 12,000원 예산으로 파송하고 있어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J. S. Ryang, “The Condition of Christian Church in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1928.8), 189. 최재건, 198에서 재인용.
교회 연합문제에 있어서는 교파수가 많지 않으며 이미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결성되어 왕성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J. S. Ryang, 192. 최재건, 198에서 재인용.
그는 또한 기독신보, 1928년 7월 11자에 예루살렘 대회의 특색을 10가지로 분석 1) 종래의 선교대회와 달리 선교사 중심이 아니고 50여 개국에서 온 240명의 대표 중 거의 절반이 피선교국 교회의 대표단이었고 그들의 의견이 존중되었다는 점, 2)대표자 240여 명 중에서 여자가 39명이었고 위원회 서기도 10이니 중에서 4인이 여자였으며, 매일 아침 경건회 시간에 3인의 여자가 예배인도를 했고, 부회장 3인 중 1인은 여자로 선정하자고 하여 여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점, 3) 대회경비가 많이 들었다는 점, 4) 회칙 개정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IMC에 정식으로 가입하였고 37명의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이 한국인이었던 점, 5) 미국 이민법이 동양인을 차별하고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노동자를 학대한 일이 잘못되었던 점을 인정한 점, 6) 중국 대표 余日草 박사가 중국의 현상이라는 문제로 불평등조약의 폐기와 피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의 관리권한을 중국에게 양도할 것을 주장했고, 인도 대표 다타가 영국의 무리한 인도식민지 지배에 대해 언급했던 점, 7) 선교사업에 있어서 농촌과 농민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점이 언급된 점, 8) 매일 아침 경건회 시간에 각국 대표가 모국어로 기도하였는데, 한국 대표도 기도를 인도했던 점, 9) 기독교가 보편적이고 초국가적이니만큼 국제적 성질을 발달시키는 동시에 민족교회를 충실히 하며 존중히 여기자고 했던 점, 10) 각국 대표로부터 수많은 의견이 있었으나 기독교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뿐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라고 만장일치로 가결했던 점 등이다. “예루살렘 會議의 特色,” 「기독신보」, 1928년 7월 11일자.
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2. 사회선교로의 인식의 전환과 ‘본토민 신자 위주의 에큐메니즘’의 활성화
예루살렘대회를 계기로 기독교계에는 사회복음주의에 기초한 신앙생활의 사회화와 실제화가 시대적 과제로 대두되었고, 기독교의 ‘사회화’, ‘실제화’에 대한 요구는 기독교계의 연합적 사업을 추동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연합적으로 이 일을 감당하자는 인식 속에서 ‘연합문제’가 크게 제기되었다. 김권정, “1920년대 후반 기독교세력의 반기독교운동 대응과 민족운동의 전개,”「한국기독교와 역사」14(2001/2), 100.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을 통해서만 세계 창조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초월적인 신앙으로 경도되고 있었다. 다른 한편 역사와 사회현실 개조에 인간이 책임질 부분이 있다는 신앙인식의 변화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31운동 후 1920년대의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도전과 일제의 통치로 인한 사회경제적 황폐화를 겪으면서 사회 현실을 개조시키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Ⅱ (서울: 기독교문사, 1990), 217.
기존의 YMCA외에 YWCA, 그리고 장로회·감리회 등 교단 내부에 농촌사업을 위한 농업부가 설치된 것을 비롯하여, 예루살렘 대회의 결의들을 구체화하기 위한 제반노력들이 경주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IMC 회장 모트의 재차 방한을 계기로 열린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임시대회(1929.4.29~30, 중앙 YMCA회관)는 예루살렘대회의 연장선상에서 ‘祖先(조선)사람의 幸福(행복)과 祖先(조선)사람의 感情(감정)과 生活(생활)을 위한 傳道(전도)’, ‘現代(현대) 祖先(조선)사람을 眞實(진실)노 滿足(만족)케 할만한 傳道(전도)’를 위한 成案(성안)과 계획을 마련하기 위한 본격적인 첫 모임이었다. \"社說:聯合公議會 臨時大會에 臨하야,\"「기독신보」, 1929.4.17일자. 이 사설에서는 “조선사람을 행복스럽게 하랴면 예수교도 조선사람의 예수교가 되여야 하고 교회와 교회의 모든 경영이 조선사람의 것이 되는 날에야 그 목적을 성취할 줄로 확실히 밋는다”고 하여, 이번 대회가 우리 민족을 예수의 천국으로 인도하는 ‘조선적 기독교’ 건설의 계기가 되기를 축원하였다. 장규식, “신간회운동기 ‘基督主義’ 사회운동론의 대두와 基督信友會,” 「한국근현대사연구」16(2001/3), 97.
정인과를 회장으로, 양주삼을 실행위원장으로 하여 열린 임시대회는 기독교 각 단체 대표 100명이 회집한 가운데, ‘금일 조선교회의 생활과 사업 중에 치중할 요점’, ‘조선 교회에 필요한 지도자의 모집과 양성과 및 ’계속근무 문제에 대하야’, ‘조선교회의 재원을 증진’, ‘정신상 단합과 사업상 협동’등 4개 분과에 걸친 토론을 진행하였다. “朝鮮耶蘇敎聯合公議會 後報,”(一)·(二.)「기독신보」, 1929.4.24; 5.1일자 , 장규식, 97에서 재인용.
그리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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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1.12
  • 저작시기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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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77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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