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하였다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위로는 도를 넓히는 데 어긋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어긋나며, 사은(四恩)을 저버렸으니 실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 모임이 파한 후에는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운둔하며, 동사(同社)를 결정하고 항상 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연마하기에 힘쓰며, 예불과 독경에 정진하고 나아가서는 노동에도 힘을 쏟자. 각기 소임에 따라 경영하고 인연에 따라 심성을 수양하여 한평생을 자유롭게 지내며...\'
위와 같이 시작하는 권수정혜결사문은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그 방법으로 선정(禪定)과 교학(敎學)을 같이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시하고 있다. 즉 정과 혜는 한마음에 통일되어 항상 균형을 지녀야 한다고 본 것이다. 지눌은 교단 내의 부패와 선종, 교종의 대립을 불식하고, 새로운 불교를 건설하고사 정혜결사운동(定慧結社運動)을 전개했다. 당시 무신 세력간의 끊임없는 권력 쟁탈전으로 인한 사회 전체의 혼란으로 곳곳에서 반란과 민중봉기가 그치지 않자 불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지눌의 결사운동은 정법 불교로 복귀하기 위한 작업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한 당시 불교계를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선언서였다.
지눌의 정혜결사운동은 큰 호응을 얻어 결사(結社)를 시작한 지 8년째인 1197년에는 황족 및 조정 관리를 비롯해 수백명의 승려가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격하게 절제하는 생활을 기피하여 운동에 반대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지눌은 그들을 교화하여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자신의 덕과 법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지눌은 모든 보살행을 멈추고 은거하여 선정(禪定)을 닦기로 결심했다. 지눌은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하며 그곳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한 채 오직 생각도 없고 집착도 없는 해탈의 경지에 안주하여 마음의 근원을 연구했다. 이때 대혜어록(大慧語錄)의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객관과 상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니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일상의 인연이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 여의치 않고 오로지 참선을 통해 연구해야만 한다.\"는 문구에 이르어 세 번째 큰 깨달음을 얻었다. 지눌은 훗날 \"내가 보문사 이래로 10여 년 동안 일찍이 방심하지 않고 수행을 해왔건만 오히려 정견을 놓지 못한 채 물건이 가슴에 걸려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지리산에서 대혜어록을 보다 홀연히 눈이 열리니 즉시 편안해졌다.\"며 이때의 깨달음에 대해 회고했다.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큰 깨달음을 얻은 지눌은 운둔 생활을 벗어나 예전보다 더 적극적인 보살행을 통해 현실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1200년 송광산 길상사로 들어가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하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했다. 또한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종과 교종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이때 지눌은 졸애의 구산선문을 통합하여 조계종을 개창하였는데, 의천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과 교종의 합일점을 모색했다면 지눌은 선종을 중심으로 선종과 교종의 합일점을 모색했다. 지눌이 주로 머물며 불법을 강설한 곳이 바로 송광산 길상사로, 1205년에 송광산은 조계산, 길상사는 수선사로 고쳐졌다. 이후 수선사는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하며 동방 제일의 도량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으며, 고려 후기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선사는 원래 지눌이 1190년 팔공산 거조사에서 법회를 갖고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하며 정혜결사를 결성하고 개칭한 정혜사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는 무신 세력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았지만, 지눌의 뒤를 이은 혜심(慧諶)대에 이르러 황실과 무신 귀족, 유학자 관료 등이 입사함으로써 중앙의 정치 세력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이로써 교단은 크게 발전하였고 이후 중앙 세력과 더욱 밀착되어 갔다. 이후 무신 정권이 붕괴되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부터는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재추들의 후원을 받았다. 지눌은 조정의 뜻에 따라 120일 동안 대법회를 베풀며 불경을 강설하고 대중을 지도했다. 그 후 10여년 동안 계속해서 활동하다가 1210년 3월 27일, 선법당에서 문답을 끝낸 뒤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법어를 남긴 후 입적하였다. 불일보조(佛日普照)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죽은 뒤 국사(國師)로 추증되었다. 저서엔 《진심직설(眞心直說)》,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상당록(上堂錄)》,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
참고 문헌
송광사 중요목조건축물 : 정밀실측보고서/문화재청/문화재청
선광사와 선암사/신영훈 외/조선일보사/2000
보조 지눌의 사상과 영향/김방룡/보고사/2006
송광사/강건기 외/대원사/1997
불일 보조국사와 조계산 송광사/한정섭/불교정신문화원 2005
참고 사이트
전라남도 개관:http://100.naver.com/100.nhn?docid=134502
전라남도 연혁:http://100.naver.com/100.nhn?docid=719883
순천시 개관:http://100.naver.com/100.nhn?docid=97995
순천시 연혁:http://100.naver.com/100.nhn?docid=721088
전라남도 홈페이지:http://jeonnam.go.kr/
순천시홈페이지연혁:
http://www.suncheon.go.kr/open_content/about/guidance/suncheon_intro/suncheon_intro/
순천시시청홈페이지:http://www.suncheon.go.kr/
송광사홈페이지:http://www.songgwangsa.org/
지눌:http://100.naver.com/100.nhn?docid=142336
위와 같이 시작하는 권수정혜결사문은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그 방법으로 선정(禪定)과 교학(敎學)을 같이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시하고 있다. 즉 정과 혜는 한마음에 통일되어 항상 균형을 지녀야 한다고 본 것이다. 지눌은 교단 내의 부패와 선종, 교종의 대립을 불식하고, 새로운 불교를 건설하고사 정혜결사운동(定慧結社運動)을 전개했다. 당시 무신 세력간의 끊임없는 권력 쟁탈전으로 인한 사회 전체의 혼란으로 곳곳에서 반란과 민중봉기가 그치지 않자 불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지눌의 결사운동은 정법 불교로 복귀하기 위한 작업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한 당시 불교계를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선언서였다.
지눌의 정혜결사운동은 큰 호응을 얻어 결사(結社)를 시작한 지 8년째인 1197년에는 황족 및 조정 관리를 비롯해 수백명의 승려가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격하게 절제하는 생활을 기피하여 운동에 반대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지눌은 그들을 교화하여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자신의 덕과 법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지눌은 모든 보살행을 멈추고 은거하여 선정(禪定)을 닦기로 결심했다. 지눌은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하며 그곳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한 채 오직 생각도 없고 집착도 없는 해탈의 경지에 안주하여 마음의 근원을 연구했다. 이때 대혜어록(大慧語錄)의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객관과 상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니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일상의 인연이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 여의치 않고 오로지 참선을 통해 연구해야만 한다.\"는 문구에 이르어 세 번째 큰 깨달음을 얻었다. 지눌은 훗날 \"내가 보문사 이래로 10여 년 동안 일찍이 방심하지 않고 수행을 해왔건만 오히려 정견을 놓지 못한 채 물건이 가슴에 걸려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지리산에서 대혜어록을 보다 홀연히 눈이 열리니 즉시 편안해졌다.\"며 이때의 깨달음에 대해 회고했다.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큰 깨달음을 얻은 지눌은 운둔 생활을 벗어나 예전보다 더 적극적인 보살행을 통해 현실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1200년 송광산 길상사로 들어가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하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했다. 또한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종과 교종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이때 지눌은 졸애의 구산선문을 통합하여 조계종을 개창하였는데, 의천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과 교종의 합일점을 모색했다면 지눌은 선종을 중심으로 선종과 교종의 합일점을 모색했다. 지눌이 주로 머물며 불법을 강설한 곳이 바로 송광산 길상사로, 1205년에 송광산은 조계산, 길상사는 수선사로 고쳐졌다. 이후 수선사는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하며 동방 제일의 도량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으며, 고려 후기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선사는 원래 지눌이 1190년 팔공산 거조사에서 법회를 갖고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하며 정혜결사를 결성하고 개칭한 정혜사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는 무신 세력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았지만, 지눌의 뒤를 이은 혜심(慧諶)대에 이르러 황실과 무신 귀족, 유학자 관료 등이 입사함으로써 중앙의 정치 세력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이로써 교단은 크게 발전하였고 이후 중앙 세력과 더욱 밀착되어 갔다. 이후 무신 정권이 붕괴되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부터는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재추들의 후원을 받았다. 지눌은 조정의 뜻에 따라 120일 동안 대법회를 베풀며 불경을 강설하고 대중을 지도했다. 그 후 10여년 동안 계속해서 활동하다가 1210년 3월 27일, 선법당에서 문답을 끝낸 뒤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법어를 남긴 후 입적하였다. 불일보조(佛日普照)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죽은 뒤 국사(國師)로 추증되었다. 저서엔 《진심직설(眞心直說)》,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상당록(上堂錄)》,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
참고 문헌
송광사 중요목조건축물 : 정밀실측보고서/문화재청/문화재청
선광사와 선암사/신영훈 외/조선일보사/2000
보조 지눌의 사상과 영향/김방룡/보고사/2006
송광사/강건기 외/대원사/1997
불일 보조국사와 조계산 송광사/한정섭/불교정신문화원 2005
참고 사이트
전라남도 개관:http://100.naver.com/100.nhn?docid=134502
전라남도 연혁:http://100.naver.com/100.nhn?docid=719883
순천시 개관:http://100.naver.com/100.nhn?docid=97995
순천시 연혁:http://100.naver.com/100.nhn?docid=721088
전라남도 홈페이지:http://jeonnam.go.kr/
순천시홈페이지연혁:
http://www.suncheon.go.kr/open_content/about/guidance/suncheon_intro/suncheon_intro/
순천시시청홈페이지:http://www.suncheon.go.kr/
송광사홈페이지:http://www.songgwangsa.org/
지눌:http://100.naver.com/100.nhn?docid=14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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