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사두 썬다 싱』134.
제 5장 결론
선다 싱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자신의 개인적인 신비체험, 절대자와의 합일을 위해 굴속으로 들어가 고행과 명상을 하는 수도승이 아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복음 전파에 힘썼으며, 전도 여행 중에는 숱하게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기도와 명상을 중요하게 여겼고, 기도로 삶의 방향을 결정했으며, 기도와 명상 가운데, 그에게 임하는 엑스타시와 환상을 소중하게 여겼다. 실로 헌신적인 봉사의 삶을 살았으며,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희생적인 봉사를 강조했다. 고행을 통해 죄 값을 치룬다거나 구원에 이르는 것을 거부했으며, 힌두교의 세상을 단념하는 금욕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선다 싱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지상에서의 자신의 의무이며, 사두가 된 목적은 은혜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엑스타시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먼저, 인간 스스로, 자력으로 체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엑스타시에 들기 위해 자신도 노력하지 않았고, 노력을 권고하지도 않았다. 그 것은 주시는 은사일 뿐, 인간이 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선다 싱 자신은 그 은사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은사를 값진 진주에 비유하며 자신이 받은 박해와 고통 속에 엑스타시를 누리는 은사가 없었다면, 사두의 생활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으며, 그 은사는 세상과도 바꿀 수 없다고 고백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엑스타시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워했다. 이것은 자신의 모국어든 영어든 그 상황을 다 묘사하거나 설명할 수 없으며, 듣는 이들이 차마 이해하지 못하며, 믿지도 못하고, 자신을 이상하게(미치거나 신성시하는) 몰아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발제를 시작하며, 넘치는 신비주의의 정의를 잠시 접어두고, 선다 싱의 현실참여적인 삶과 구원에 대한 그의 신앙관에 주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운둔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고행이나 자해를 통한 인간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가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었고, 회심의 순간 이후,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선다 싱은 기적을 믿었고, 기적을 경험했으며, 엑스타시와 환상 등의 신비한 신앙 체험 안에서 살았다. 신비하지만, 그는 역사적 책임감을 회피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구원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도 않았지만 너무 높고 높고 높아서 낮고 낮아 비천하기 짝이 없는 자신과는 만나기 힘든 하나님이 아니라 늘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했다. 이 볼 때, 우리의 기준으로 그가 신비주의자라는 경향은 박약하다.
발제문을 마치기 전에 지난 주 강의 시간의 스펙트럼을 떠올려 본다. 신비주의에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우리가 토론하는 두 가지 기준을 다 빠져나간다. 지속적 은총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비주의는 여타 신비주의로 오리엔트 되어 있지 않다. 신비주의의 횡적 스펙트럼 안에서 그리고 기독교 횡적 스펙트럼 안에서 선다 싱의 위치를 다시 한 번 그려보길 바란다.
제 5장 결론
선다 싱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자신의 개인적인 신비체험, 절대자와의 합일을 위해 굴속으로 들어가 고행과 명상을 하는 수도승이 아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복음 전파에 힘썼으며, 전도 여행 중에는 숱하게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기도와 명상을 중요하게 여겼고, 기도로 삶의 방향을 결정했으며, 기도와 명상 가운데, 그에게 임하는 엑스타시와 환상을 소중하게 여겼다. 실로 헌신적인 봉사의 삶을 살았으며,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희생적인 봉사를 강조했다. 고행을 통해 죄 값을 치룬다거나 구원에 이르는 것을 거부했으며, 힌두교의 세상을 단념하는 금욕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선다 싱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지상에서의 자신의 의무이며, 사두가 된 목적은 은혜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엑스타시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먼저, 인간 스스로, 자력으로 체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엑스타시에 들기 위해 자신도 노력하지 않았고, 노력을 권고하지도 않았다. 그 것은 주시는 은사일 뿐, 인간이 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선다 싱 자신은 그 은사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은사를 값진 진주에 비유하며 자신이 받은 박해와 고통 속에 엑스타시를 누리는 은사가 없었다면, 사두의 생활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으며, 그 은사는 세상과도 바꿀 수 없다고 고백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엑스타시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워했다. 이것은 자신의 모국어든 영어든 그 상황을 다 묘사하거나 설명할 수 없으며, 듣는 이들이 차마 이해하지 못하며, 믿지도 못하고, 자신을 이상하게(미치거나 신성시하는) 몰아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발제를 시작하며, 넘치는 신비주의의 정의를 잠시 접어두고, 선다 싱의 현실참여적인 삶과 구원에 대한 그의 신앙관에 주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운둔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고행이나 자해를 통한 인간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가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었고, 회심의 순간 이후,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선다 싱은 기적을 믿었고, 기적을 경험했으며, 엑스타시와 환상 등의 신비한 신앙 체험 안에서 살았다. 신비하지만, 그는 역사적 책임감을 회피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구원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도 않았지만 너무 높고 높고 높아서 낮고 낮아 비천하기 짝이 없는 자신과는 만나기 힘든 하나님이 아니라 늘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했다. 이 볼 때, 우리의 기준으로 그가 신비주의자라는 경향은 박약하다.
발제문을 마치기 전에 지난 주 강의 시간의 스펙트럼을 떠올려 본다. 신비주의에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우리가 토론하는 두 가지 기준을 다 빠져나간다. 지속적 은총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비주의는 여타 신비주의로 오리엔트 되어 있지 않다. 신비주의의 횡적 스펙트럼 안에서 그리고 기독교 횡적 스펙트럼 안에서 선다 싱의 위치를 다시 한 번 그려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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