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5장 종장) -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체제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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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5장 종장) -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체제 확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주요내용
제5장.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체제 확립
1. 만주파의 권력장악과 당의 일원적 지도체제
2. 만주파의 당·군 장악과 당·군 일체화
3. 사회주의대고조에서 [자력갱생]·[국방·경제 병진]
4. 공업부문에서 직업동맹 및 당사업체계의 전환
5. 농촌당제도의 전환
종장

Ⅱ. 평가 및 의견
1. 관심 포인트
2. 의문사항
3. 성과와 한계
4. 문제제기

본문내용

었다.
군내정치사업에 있어서의 전환은 세 단계로 추진되었다. 첫째로 교조주의 비판, 즉 소련 비판이었다. 이것은 당 정치사업 방식뿐만 아니라 부대의 조직편성, 전법 등 군사부문 전반에 걸쳐 소련식에 대한 청산을 의미하였다. 둘째 군내 정치사상교육, 즉 공산주의 교양, 계급 교양을 강화했다. 이는 전 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추진되는 가운데 군도 그 예외일 수 없음을 뜻하는 정책이었다. 지금까지 군사면을 중심으로 한 부대간 경쟁포상제도인 모범중대운동이 실시되어 왔지만 이것을 한계단 더 높은 공산주의 교양을 위주로 하는 운동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이었다. 셋째,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형명전통으로 승격시켜 소련식을 대체하는 공ㅅ한주의 교양의 정신적 내용으로 삼는 것이었다.1958년 초부터 총정치국에 대한 중앙의 검열을 기점으로 군내의 사상적 단속이 개시되었다. 김일성-로동당-항일무장투쟁-인민군을 하나로 잇는 기본도식이 만들어졌다. 또한, 1958년 8월에 농업집단화가 완료되자 전 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에 맞춰 인간의 정신적 개조를 위한 공산주의 교양을 강화하는 조치가 취해진다. 인미군 창군이념의 일부로 시작된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은 유일의 창군이념, 유일의 로동당 창당이념이 되었고 나아가 건국이념으로서 정식화되었다.
소련계와 연안계 숙청은 군내 세력을 재편하는데 2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다. 당내 숙청보다 인민군 내 숙청이 철저히 이루어졌는데 그 만큼 만주파의 군 장악도 철저한 것이었다. 이러한 추세와 병행하여 군민관계에서 군대의 사회에 대한 영향도 증재하고 있었다. 당과 군의 일체화는 민군관계에서 군대의 영향력 증대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군 주둔지역 내 지방당조직과 군당조직의 결합, 그리고 로동적위대 창설에 따른 민병조직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조선로동당에는 지방당에 의한 군통제에 관한 규정을 두지 않고 오히려 지방당 사업에 대한 군의 영향력 행사를 강조하였다. 전후 경제복구건설 과정에서 제대군인 뿐 아니라 군부대 자체의 노동력 동원이 노동력 부족을 타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일성은 군대가 주둔지역 주민에 대하여 끊임없이 영향을 주어야 하며 군대가 주민들의 락후한 영향을 받을 것이 아니라 군대가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2년 12월부터 도, 시, 군당위원회에 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해당 당위원장이 위원장, 현역 군인이 부위원장을 담당하도록 하여 당의 형식적 우위가 규정되었으나 이것은 지방당에 현역 군인이 파견되어 로동적위대 등 군 관련사업을 조정, 지도하도록 하는 조치였다. 이처럼 4대 군사노선에서 전 인민의 무장화라는 정책은 지방차원에서 당·군의 일체화를 꾀하기 위한 정책으로 나타났다.
사회주의대고조에서 [자력갱생]·[국방·경제 병진]으로
1958년 채택된 인민경제발전 제1차 5개년 계획안은 자립적 민족경제라는 표현을 처음 공식화하고, 사회주의 경제형태의 유일적 지배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김일성은 “당이 지금까지 견지하여온 방침, 다시 말하여 중공업을 위주로 하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방침을 계속 견지”해야 한다고 하며 “중공업이 없이는 경공업과 농업을 도저히 발전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시기의 높은 성장률은 외연적 성장 단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어서 성장에는 일정한 노동력 증가가 따라 주어야만 하였다. 김일성은 “각자는 능력대로 각자에게는 수요대로”라는 원칙이 실현되는 공산주의 사회가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가까운 장래의 일이라는 전망을 제시하였다. 김일성은 생산에서 대중적 열의를 동원하기 위한 새로운 대중운동, 즉 천리마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사회주의건설의 총노선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너무 높게 설정되어 실행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강재를 비롯하여 건재와 노동력 수급에 중대한 차질이 초래되기 시작했다. 1959년 8월에는 급속한 경제발전과정에서 생긴 부문 간 불균형을 시정하고 기존 시설을 정비하여 새로운 공장건설을 나열하지 않고 진행중인 건설을 완성시켜 기존 설비의 이용률을 높임으로써 성장을 보장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노동력 증가분의 상당수는 여성 종업원이지만 농촌에서도 상당수가 유입되어 거꾸로 3만명 정도는 노동력 사정이 긴장되어 있는 농촌으로 되돌려야만 했다. 1961년 4차 당대회에서는 인민경제발전 7개년 계획을 채택하고 중공업의 우선적 성장을 보장하면서 경공업과 농촌경리를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노선이 정해졌다. 이 계획에는 사회주의적 공업화와 전면적인 기술개건을 이룩한다는 위치가 부여되었다. 완충기 설정을 통하여 완화된 고성장노선은 다시 부활하였다. 그러나 경제성장을 위해 주어진 조건은 과거보다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었다. 내연하고 있던 중소분쟁이 이 대회를 계기로 공연히 폭발하여 알바이니아가 중국측에 동조함에 따라 소련과 알바니아와의 관계에도 심각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북조선은 소련에 동조하지 않고 표면상으로 중립을 지켰지만 내심으로는 중국과 알바니아를 지지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방소 보고에서 ‘자력갱생’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1962년도 공업생산 실적은 1961년도 대비 120%라고 발표되어 “대안의 사업체계의 위대한 생활력이 발양된 결과”로 설명되었다. 이것은 높은 성장률이기는 하지만 당초 계획목표에는 미달하는 것이었다.
1962년 12월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는 북조선의 경제발전에서 근본적 전환을 가져온 결정이 내려졌다. 즉, 경제발전에서 일부 제약을 받더라도 우선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른바 4대 군사노선이 나오고 경제건설과 군사력강화의 병진정책이 채택된 것은 6.25 전쟁 이래 경제우선 정책의 근본적 전환이었다.
공업부문에서 직업동맹 및 당사업체계의 전환
1956년 12월 전원회의 이후 [최대한의 절약과 증산]은 산업 전반을 지배하는 구호가 되어 1958년 직업동맹 내 숙청이 일단락되자 직업동맹 사업의 중심을 생산방면으로 돌리고 제1차 5개년 계획 이행을 위하여 대중적 열의를 동원하는 데 집중하려고 했다. 증산 과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일단 증산경쟁운동을 새롭게 전개하고, 경쟁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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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9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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