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945~1961 3-4장 - 서동만 - 전시체제 사회주의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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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945~1961 3-4장 - 서동만 - 전시체제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도 그대로 유지.
4. 전후 경제 건설에서 중공업중시 노선의 추이와 성장속도 문제
남로계의 숙청, 소련계 허가이의 자살, 연안예 박일우의 좌천 등 당내 세력 관계 변화에 따라 휴전 직후 53년 8월 당중앙위 제 6차 전원회의에서는 새로운 당지도부진용이 짜여짐.
당내에는 전후 경제복구 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생겨나기 시작.
전원회의동안 중공업중시노선과 농업집단회 추진 등을 놓고 격론이 오감.
전원회의에서 제시된 중공업중시 노선의 주된 자금원은 소련이 약속한 10억루블의 원조.
김일성을 단장으로하는 정부 대표단은 경제원조를 끌어내기위해 중국과 동유럽 5개 나라를 순방.
1956년 12월 , 당중앙위전원회의 개최, 57년도 인민경제계획에 관한 결정 채택.
57년을 제 1차 5개년 계획 실행의 첫 해로 삼으면서도 일단 5개년 계획 보류, 1년 계획만 작성.
5개년 계획 작성의 지연 이유; 원조액 삭감으로 자금원을 주로 국내에 의존케 되고 명목임금 상승에 의한 화폐구매력의 증대에 상응하도록 소비품 공급을 보장해야하는 상황에 처함.
1959년 3월 개시된 천리마 운동의 단서는 56년 2월 당중앙위전원회의.
천리마 운동은 정치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대중을 경제 건설에 동원했다는 평가얻음.
▶ 3~4장 새롭게 알게 된 점과 의문점
김일성은 6.26 전쟁 실패에 따른 책임을 맨 처음 각 정파의 간부 및 지휘자들에게 지운다. 이때 전쟁개시를 모의한 박헌영도 함께 구제해주는데, 얼마못가 그에게 ‘미제 첩자’의 죄명을 씌워 숙청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김일성이 간부급을 추궁,처벌할 때는 책임 회피에 따른 위험부담을 나눌 목적으로 박헌영을 구제한 것인가가 그 첫 번째다.이 경우 간부급의 처벌 뒤에도 쉬이 사그라지지 않는 전쟁 실패의 책임마저 일소하기 위해 결국 박헌영을 숙청하거나 ,일차적인 구제 뒤에 소용이 없어진 박헌영을 잠재적 도전의 싹을 자르는 차원에서 마저 숙청했을 거라는 추측을 해보았다.
또 하나는 애초 전쟁을 공동 모의한 다시 말하면 김일성과 대등한 위치에 서 있는 박헌영을 전쟁 실패 책임 추궁을 빌미로 처음부터 목표 삼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이 경우에는 간부급 추궁이 박헌영 제거를 위한 일종의 단계적 처벌이 될 것이다.
“피점령과 탈환을 통해 북조선 정권과 주민은 토지개혁 당시 맛볼 수 없었던 ‘반혁명’상황에 직면함” 이라는 대목에 관하여.
주민들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반혁명’상황이 유엔군에 대한 반감과 거부감의 차원을 넘어서 북조선체제에 대한 이탈로 이어졌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필자의 설명에 따르면 주민들은 유엔군 점령 당시 겪은 무자비한 상황과 부역행위에 대한 사후 처벌 등이 두려워 ‘반혁명’상황에 직면했다고 한다. 특히 유엔군이 무차별 폭격으로 인적ㆍ물적 피해를 입었다면 오히려 북조선 혁명에 더 깊이 동화할 것이라 판단한 것과 전혀 다른 결과이다. ‘반혁명’ 북조선 체제에 대한 ‘저항’이 아닌 생존 본능적 도피의 성격이 짙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는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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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9
  • 저작시기2019.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83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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