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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8월 30일~31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개최. 원래 회의 의제는 동유럽 방문에 대한 정부대표단의사업 총결 등이었으나 윤공흠이 예정에도 없던 발언권을 요청, 김일성의 과오를 비판함. 최용건 등이 윤공흠의 발언을 저지하는 등의 소동이 일어남.
-하지만 대부분 중앙위원이 김일성을 옹호. 반대파를 비난함. 당내 김일성 반대파는 일거에 붕괴. 후속조치도 취해짐. 대표단이 도착하기 전 이미 상황 정리.
-김일성 반대파 4명의 중국방명은 중국과 소련에 대한 김일성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지만 대내적으로는 김일성 반대파의 명분을 박탈해 입지 강화.
-김일성은 본격적으로 9월 전원회의 결정을 뒤집는 작업에 착수. 11월 중순부터 최창익, 윤공흠, 리필규, 서휘를 반당종파분자로 공격하기 시작. 리상조는 소련으로 망명.
-8월 종파사건에 대한 수습 및 후속조치가 진행되던 1956년 말부터 57년 초에 걸쳐 지방에서 부농, 중농층이 농업협동조합으로부터 이탈하는 사태 발생.
Ⅱ. 3~4장의 포인트 및 새롭게 알게 된 점과 의문점
-3장과 4장의 핵심은 전쟁 발발 과정에서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 양 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전략을 구사했는지와 전쟁이 끝난 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세력관계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6.25전쟁 발발 시 의사결정 과정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부분과 관련해 필자가 주장한 대로 선제공격 명령이 내각과 당의 공식 의사결정 과정과 동떨어진 별도의 의사결정이었다고 한다면 이 부분은 북한의 군사작전상 성격 뿐 아니라 당과 군의 관계 등에 대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파악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는 그 자체만으로 상당히 비밀스러운 과정이 전제됐음을 알 수 있다. 전쟁과 관련한 전반적인 과정이 김일성 개인의 리더십에 의한 일종의 산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였고 패배로 이끈 책임자였지만 자신의 책임에 논란을 교묘하게 피해간 대목에서 권력자의 비겁함도 엿보였다. 이는 1~2장에서 보였던 김일성의 자신만만했던 모습과는 좀 대조적인 모습으로도 생각된다. 전쟁을 오히려 당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대목에서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술수가 돋보였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전쟁 후 소련과 중국의 전쟁실패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는 점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한 차원에서 남로파 숙청을 단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드러난대로, 김일성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도 있었겠지만 중국과 소련의 조종(?) 하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아쉬운 대목은 김일성이 당내 기반을 확고히 하는 과정에서 소련과 같이 농민 등 인민의 희생이 수반됐다는 점이다. 솔직히 이 부분은 제대로 잃지를 못했지만 토지개혁 등이 계급투쟁과 연계되면서 인민을 통솔하고 억압하는 기재로 활용한 당 지도부의 교활함이 엿보였다.
-8월 30일~31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개최. 원래 회의 의제는 동유럽 방문에 대한 정부대표단의사업 총결 등이었으나 윤공흠이 예정에도 없던 발언권을 요청, 김일성의 과오를 비판함. 최용건 등이 윤공흠의 발언을 저지하는 등의 소동이 일어남.
-하지만 대부분 중앙위원이 김일성을 옹호. 반대파를 비난함. 당내 김일성 반대파는 일거에 붕괴. 후속조치도 취해짐. 대표단이 도착하기 전 이미 상황 정리.
-김일성 반대파 4명의 중국방명은 중국과 소련에 대한 김일성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지만 대내적으로는 김일성 반대파의 명분을 박탈해 입지 강화.
-김일성은 본격적으로 9월 전원회의 결정을 뒤집는 작업에 착수. 11월 중순부터 최창익, 윤공흠, 리필규, 서휘를 반당종파분자로 공격하기 시작. 리상조는 소련으로 망명.
-8월 종파사건에 대한 수습 및 후속조치가 진행되던 1956년 말부터 57년 초에 걸쳐 지방에서 부농, 중농층이 농업협동조합으로부터 이탈하는 사태 발생.
Ⅱ. 3~4장의 포인트 및 새롭게 알게 된 점과 의문점
-3장과 4장의 핵심은 전쟁 발발 과정에서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 양 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전략을 구사했는지와 전쟁이 끝난 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세력관계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6.25전쟁 발발 시 의사결정 과정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부분과 관련해 필자가 주장한 대로 선제공격 명령이 내각과 당의 공식 의사결정 과정과 동떨어진 별도의 의사결정이었다고 한다면 이 부분은 북한의 군사작전상 성격 뿐 아니라 당과 군의 관계 등에 대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파악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는 그 자체만으로 상당히 비밀스러운 과정이 전제됐음을 알 수 있다. 전쟁과 관련한 전반적인 과정이 김일성 개인의 리더십에 의한 일종의 산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였고 패배로 이끈 책임자였지만 자신의 책임에 논란을 교묘하게 피해간 대목에서 권력자의 비겁함도 엿보였다. 이는 1~2장에서 보였던 김일성의 자신만만했던 모습과는 좀 대조적인 모습으로도 생각된다. 전쟁을 오히려 당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대목에서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술수가 돋보였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전쟁 후 소련과 중국의 전쟁실패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는 점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한 차원에서 남로파 숙청을 단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드러난대로, 김일성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도 있었겠지만 중국과 소련의 조종(?) 하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아쉬운 대목은 김일성이 당내 기반을 확고히 하는 과정에서 소련과 같이 농민 등 인민의 희생이 수반됐다는 점이다. 솔직히 이 부분은 제대로 잃지를 못했지만 토지개혁 등이 계급투쟁과 연계되면서 인민을 통솔하고 억압하는 기재로 활용한 당 지도부의 교활함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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