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사회정책론]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 (인민위원회 인민민주주의국가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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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의 사회정책론]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 (인민위원회 인민민주주의국가 625 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1장 해방과 인민위원회(1945~1946)
1. 인민위원회와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1) 분할점령과 공산당의 남북분립
2) 인민위원회와 사회단체의 남북분립
3)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
4) 보론: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창설에 관하여

2. 초기의 산업관리체제
1) 인민위원회와 공장위원회
2) 노동조합과 직업동맹

3. 초기의 지방인민위원회와 농민위원회
1)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농민위원회
2) 전국농민조합총연맹
3) 식량문제

4. 소결

제2장 ‘인민민주주의국가’ 수립과 ‘당=국가’(1946~1950)
1. 중앙집권화와 당의 성장
1)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수립
2) 토지개혁과 당조직의 확대 ∙ 정비
3)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결성과 북조선로동당 창립

2. 정부 수립과 ‘당=국가’
1)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인민회의의 수립
2)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3) ‘당=국가’ 및 당∙ 정관계의 특질

3. 인민군의 창설과 당∙ 군관계
1) 조선인민군과 항일무장투쟁의 전통
2) 창군 당시 당∙군관계의 특질
3) 인민위원회와 인민군

4. 당과 산업부문, 노동계급
1) 직업동맹의 성격과 위치
2) 산업부문의 당
3) 경제전문가, 기술자, 노동자 출신의 정치적 진출
5. ‘유일관리제’의 실시
1) 공업관리체계의 중앙집권화과정
2) 유일관리제와 당의 행정대행
3) ‘증산경쟁운동’과 공장관리체계

6. 토지개혁과 당∙ 인민위원회 ∙ 농민위원회
1) 토지개혁의 의사결정과정
2)토재개혁의 실시과정
3) 북조선로동당의 창립과 농촌통치체제
4) 농업생산체제의 변화

7. 소결

제3장 6∙25전쟁과 전시체제(1950-1953)

1. 6∙25전쟁과 정치세력관계의 변화
1) 군사지휘체제와 선제공격에 관한 의사결정과정 문제
2) 무력통일의 실패와 전쟁의 중간총괄
3) 허가이의 실각

2. 6∙25전쟁과 당∙군관계
1) 당내 군사적 비중 증대와 여러 군사적 구성요소
2) 전쟁 발발 전후 군내 정치조직의 변화
3) 인민군 내 정치기관 및 당단체의 설치
4) 김일성의 반격과 박일우의 탈락

3. 전쟁의 정치 ∙ 군사적 귀결
1) 군사이데올로기의 추이
2) 김일성의 권력기반 강화
3) 6∙25전쟁의 책임문제와 박헌영 및 남로당파 숙청

4. 전시생산체제와 지방통치체제의 변화
1) 전시산업체제로의 이행과 전시노동입법
2) 전시농업생산체제
3) 농민 시장과 농업집단화의 맹아
4) 체제의 동요와 지방통치체제 개편
5) 전후 사회주의 건설에의 함의

5. 소결

본문내용

설을 제시함.(p.96)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중앙국을 창설하여 혁명적 당 창건에 착수함. 이와 같은 변화는 1956년 4월 제3차 당 대회에서 김일성이 한 당사업총결보고에서 더욱 큰 변화를 예고하는 것임.(p.97-98)
- 김일성은‘조선공산당북조선조직위원회가 1945년 10월에 결성되었다’고 주장하여 ‘북조선분국’이란 명칭이 당 역사에서 사라지게 함.(P.98)
제3차 당대회는 1948년의 제2차 당대회 이후 8년만의 대회로서 남로당계 숙청을 총결하는 장이며, 당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쓰는 의미를 갖고 있음.(P.98)
남로당은 완전히 부정되었고, 최창익, 박창옥 등이 숙청되는 시점이었음. 김일성이 북조선에 당중앙기관을 창설한다고 보고하고 분파주의 반대를 분쇄하여 자기노선을 관철시켰지만 대회 날짜는 여전히 모호하게 처리되었고 조직의 명칭은 ‘조선공산당북조선조직위원회’만이 통용 되었음.(P.99)
1958년 이후 공식설명의 구체화에 심한 변동이 일어남. 당내 연안계와 소련계 숙청이 일단락되고 있던 시점에 근로자(1958년 1월호)에 게재된 박연백의 [조선로동당투쟁사연구자료-조선공산당북조선조직위원회 창건과 그 력사적 의의]라는 대회자체를 직접 다룬 최초의 논문으로 출간됨.(P.99)
그러면 무엇 때문에 13일 개최, 김일성의 당조직 문제보고, 그리고 북조선조직위원회 설치 라는 이 시점에
공인된 사실을 굳이 변경했는지에 대한 북조선의 공식입장을 박연백의 논문에 이르기까지 내용을 정리해보면:
첫: 김일성이 조직문제 보고를 행했다고 하는 ‘새로운 사실\'이 삽입된점.
둘: 북조선분국이 북조선조직위원회로 명칭이 바뀐점.
셋: 10월 13일 개최가 ‘10월 경 개최’라는 모호한 시점이 되었다가 다시 ‘13일 개최’로 되돌아 간 점.
☞ 이것은 김일성이 조직문제 보고자였다는 사실의 등장을 늦추게 하기 위한 주된 이유였음. 즉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창건자가 되어야 하는데, ‘분국’이라는 명칭이나 성격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서울중앙’ 박헌영이 먼저 창건자로 되어있는 사실을 부정할수 없게 되는것. 따라서 김일성이 당조직문제 보고자로 명시되기 시작한것은 ‘북조선조직위원회’라는 명칭이 확립되는 것과 결부되어 있었음.(P.100)
- 논문에서는 김일성 동지는 당조직 문제에 관한 중요 보고를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회날짜를 10월 13일로 잡고 있음.(P.99)
북조선의 공식설명에서 분국설립을 결정하는 단계부터 모든 과정에서 소련의 의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이 점이 북조선의 공식설명에 의해 사실을 정리한 글의 한계이기도 함.(p.110)
시기
명칭
보고자
대회일자
1945~59년
북조선분국
?
10월 13일
1948년 3월
북조선중앙국, 분국
?
10월 중순
1955년 10월
북조선분국(당중앙)
?
10월
1956년 3월
북조선중앙국
?
10월
1956년 4월
북조선조직위원회
?
10월
1956년 12월
북조선조직위원회
김일성
10월
1958년 1월
북조선조직위원회
김일성
10월 13일
1958년 9월
북조선조직위원회
김일성
10월 10일
1959년 10월
북조선조직위원회
김일성
10월 10일~12일
1961년 5월
북조선조직위원회
김일성
10월 10일
1964년
북조선조직위원회
김일성
5일 예비회담, 10~13일대회
1968년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김일성
5일예비회담, 10~13일대회
<표 - 북조선 공식설명의 변화과정> p.108
2. 초기의 산업관리체제
1) 인민위원회와 공장위원회
북조선지역은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력자원 등의 자연적 조건, 대륙과 인접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1930년대 일제에 의해 중화학공업기지로 집중 개발됨.(p.111)
- 흥남, 성진, 청진지역, 평양, 진남포지역, 원산지역 등은 전 조선의 공업중심지였고 해방직후 공업지대의 공장운영은 소련군뿐 아니라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있었음.(p.111)
- 전국 각지에서 주민들에 의해 치안유지와 민생안정을 위한 인민위원회가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고, 각 기업, 공장에서는 종업원 자신에 의한 접수가 이루어져 ‘공장위원회’ 통칭‘공장위원회’라고 불린 이러한 조직은 지방에 따라 자치위원회, 운영위원회, 관리위원회, 경영위원회라고 불렸음.
라고 불리는 생겨남.(p.111)
소련군이 북조선을 점령하고 나서 이미 조직되어 있던 각 도 인민위원회에 통치권을 맡겼고 인민위원회는 일본인 소유이던 공장, 기업소, 건물, 재산 등을 접수하여 국유로 규정하였음.(p.112)
해방직후에 조직된 공장관리위원회의 움직임을 첫째로 노동자에 의해 접수되어 지방인민위원회 이관된 기업에서 조직된 것, 둘째로 초보적이지만 인민의 손에 장악된 기업의 관리조직 형태로서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 등 점에서, 10월 혁명 직후 소련에서 실시된 사적 기업에 대한 ‘노동자통제’와는 구별하고 있음.(p.112-113)
인민위원회에는 노동자 대표가 포함되어있었던 만큼 인민위원회와 공장관리위원회는 인적, 조직적 결합을 통한 협조관계이며, 노동조합에 의거하여 공장위원회가 성립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분화상태였다고 할 수 있음.(P.113)
2) 노동조합과 직업동맹
자연발생적으로 노동조합의 조직이 추진되었고 8.15직후 흥남, 함흥, 원산지역에서는 출옥자를 중심으로 인민위원회나 공산당조직과 함께 노동조합도 결성되어 감.(P.114)
- 1945년 9월 7일 황해도 노동조합 결성을 시초로 탄광노동조합, 광산노동조합, 철도노동조합이 잇달아 결성됨.(P.114)
- 특히 적색노동조합운동이 강했던 곳에서 활발하였고, 흥남, 원산지역은 북조선 최대의 노동자층 집결지이며 일제 시대에 적색노조운동의 중심지로서 노동조합활동도 가장 활발했음.(P.115)
서울에서 10개 산별노조 대표 51명이 1945년 11월 5~6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 결성함. 전평은 서울 조선공산당중앙의 영향아래 있었고 위원장은 박헌영 측근으로 나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초대 노동상이 되는 허성택이었음.(P.115)
- 기존의 ‘노동조합’과는 별도로 인텔리, 사무원들을 ‘직업동맹’이 라는 조직적 틀로 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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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9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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