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서론
II. 본론
허난설헌 생가
1. 허난설헌
2. 허난설헌 생가
3.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4. 허난설헌 시비
5. 허난설헌의 작품
6. 허난설헌에 대한 평가
7. 허난설헌 문학의 문학사적 의의
8. 허난설헌과 사임당
III. 결론(의견)
참고 자료
II. 본론
허난설헌 생가
1. 허난설헌
2. 허난설헌 생가
3.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4. 허난설헌 시비
5. 허난설헌의 작품
6. 허난설헌에 대한 평가
7. 허난설헌 문학의 문학사적 의의
8. 허난설헌과 사임당
III. 결론(의견)
참고 자료
본문내용
내지 못했다고 하였다.
사임당은 열아홉 살에 덕수 이씨 이원수와 결혼했는데 결혼 후에도 남편의 동의하에 친정에서 지내다가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 후에 서울로 올라갔다. 남편 복도 있었다. 남편인 이원수는 아내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고 친구들에게도 자랑할 정도였다고 하며 부부간의 대화를 통해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임당이 활동했던 시기는 조선 화단이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그녀의 그림으로는 초충도가 가장 유명한데 워낙 전칭작(傳稱作, 해당 작가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이 많아 진위가 의심스러운 가운데 그래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충도는 후손인 신경과 근세의 서화가인 오세창의 발문이 있어 믿음이 간다.
사임당은 나비와 매미, 메뚜기에서 여치, 맨드라미, 붓꽃 등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식물
과 곤충 등을 그렸는데 여기서 그녀의 우리 풍토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소박한 소재를 택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고 우아한 품격을 창조했다.
현재 전해지는 몇 점 안 되는 작품을 통해 사임당의 회화세계를 들여다보면 잔잔하고 조용한 여성스런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단정하면서도 율동감이 느껴지는 필선을 사용해 섬세하면서도 수려한 느낌을 준다. 잎을 그릴 때도 잎의 앞면은 진하게 뒷면은 연하게 처리하는가 하면 가지를 그릴 때에도 똑바로 선가지가 아니라 구부러진 가지를 그려 율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꽃을 그릴 때도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자연스러움과 다양한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성보다는 작가의 뜻을 내포하는 사의적 그림의 경향이 짙던 당시 화단에서 사임당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다루어 한국적 자연관을 표현하였고 또 다양한 풀과 벌레의 생명력을 회화로 잘 표현하였다. 매우 장식적이고 실용적인 그림이라 여겨지던 초충도를 격조 있고 서정성 풍부한 그림으로 살려냈다. 우리 실경을 그린 진경산수화처럼 우리 주변의 소재를 통해 한국적인 초충도와 화조화를 보여준 것이다.
화가로서 사임당의 우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모양처 신사임당이 율곡의 어머니이자 또한 화가로서 그 명성이 우리에게 전해진 몇 안 되는 조선의 예술가였다.
2)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의 공통된 운명
신사임당이 살았던 시대상황에 비하면 허난설헌의 삶은 너무도 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사임당 역시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부당함으로부터 피해갈 수는 없었다. 신사임당은 남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남편 이원수는 출중한 아내와 지적인 교감을 나눌 만큼 학문적이지도, 뛰어나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이원수는 주막집 여
인 권씨와 딴살림을 차렸고, 남편의 외도로 인해 신사임당은 뜻하지 않은 시련과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는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를 두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남성 중심의 사회가 만들어낸 흔한 비극이었다. 사임당 신씨는 예법과 자녀 교육을 들어 남편의 외도나 재혼을 강력히 반대하고 당부했지만 그가 죽은 뒤, 남편은 권씨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이 살았던 조선시대는 유교가 통치이념이 되면서 강력한 남성중심의 사관과 함께 부계적 가족제도인 종법제도가 확립된 시기였다. 이 제도 아래서의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라 하여 남성들에 의존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고, 이름조차도 없이 단지 누구씨 부인이거나 기껏해야 \'호\'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림의 경우 작가를 판명하는 일차적 기준이
\'낙관\'이나 \'관지\'인데, 이름도 알려지지 않아 성씨만을 쓰던 조선시대 여성들의 그림에는 \'호\'가 적혀 있는 경우도 찾기 보기 어렵다.
실제로 많은 작품을 남긴 신사임당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종법제도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호주제도로 정착되어 오늘날의 여성들에게까지 족쇄를 채우고 있다. 여성을 삼종의 예와 칠거지악으로 매어놓는 험난한 세월 속에서도 그 시대가 강요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던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삶을 들여다보며 여성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부당한 억압에 저항하여 독립된 자아를 추구했던 여성들의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3)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의 차이점
27살의 나이로 숱한 그리움에 주옥같은 시들이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면 그의 삶은 더 많은 업적들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았을 것이다. 두 삶이 매우 대비가 되는데 그것은 공통점도 있다. 따지자면 여자이고 1500년대 사람들이고 어린 시절이 유복했으며 시를
사임당은 열아홉 살에 덕수 이씨 이원수와 결혼했는데 결혼 후에도 남편의 동의하에 친정에서 지내다가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 후에 서울로 올라갔다. 남편 복도 있었다. 남편인 이원수는 아내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고 친구들에게도 자랑할 정도였다고 하며 부부간의 대화를 통해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임당이 활동했던 시기는 조선 화단이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그녀의 그림으로는 초충도가 가장 유명한데 워낙 전칭작(傳稱作, 해당 작가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이 많아 진위가 의심스러운 가운데 그래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충도는 후손인 신경과 근세의 서화가인 오세창의 발문이 있어 믿음이 간다.
사임당은 나비와 매미, 메뚜기에서 여치, 맨드라미, 붓꽃 등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식물
과 곤충 등을 그렸는데 여기서 그녀의 우리 풍토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소박한 소재를 택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고 우아한 품격을 창조했다.
현재 전해지는 몇 점 안 되는 작품을 통해 사임당의 회화세계를 들여다보면 잔잔하고 조용한 여성스런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단정하면서도 율동감이 느껴지는 필선을 사용해 섬세하면서도 수려한 느낌을 준다. 잎을 그릴 때도 잎의 앞면은 진하게 뒷면은 연하게 처리하는가 하면 가지를 그릴 때에도 똑바로 선가지가 아니라 구부러진 가지를 그려 율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꽃을 그릴 때도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자연스러움과 다양한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성보다는 작가의 뜻을 내포하는 사의적 그림의 경향이 짙던 당시 화단에서 사임당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다루어 한국적 자연관을 표현하였고 또 다양한 풀과 벌레의 생명력을 회화로 잘 표현하였다. 매우 장식적이고 실용적인 그림이라 여겨지던 초충도를 격조 있고 서정성 풍부한 그림으로 살려냈다. 우리 실경을 그린 진경산수화처럼 우리 주변의 소재를 통해 한국적인 초충도와 화조화를 보여준 것이다.
화가로서 사임당의 우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모양처 신사임당이 율곡의 어머니이자 또한 화가로서 그 명성이 우리에게 전해진 몇 안 되는 조선의 예술가였다.
2)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의 공통된 운명
신사임당이 살았던 시대상황에 비하면 허난설헌의 삶은 너무도 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사임당 역시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부당함으로부터 피해갈 수는 없었다. 신사임당은 남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남편 이원수는 출중한 아내와 지적인 교감을 나눌 만큼 학문적이지도, 뛰어나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이원수는 주막집 여
인 권씨와 딴살림을 차렸고, 남편의 외도로 인해 신사임당은 뜻하지 않은 시련과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는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를 두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남성 중심의 사회가 만들어낸 흔한 비극이었다. 사임당 신씨는 예법과 자녀 교육을 들어 남편의 외도나 재혼을 강력히 반대하고 당부했지만 그가 죽은 뒤, 남편은 권씨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이 살았던 조선시대는 유교가 통치이념이 되면서 강력한 남성중심의 사관과 함께 부계적 가족제도인 종법제도가 확립된 시기였다. 이 제도 아래서의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라 하여 남성들에 의존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고, 이름조차도 없이 단지 누구씨 부인이거나 기껏해야 \'호\'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림의 경우 작가를 판명하는 일차적 기준이
\'낙관\'이나 \'관지\'인데, 이름도 알려지지 않아 성씨만을 쓰던 조선시대 여성들의 그림에는 \'호\'가 적혀 있는 경우도 찾기 보기 어렵다.
실제로 많은 작품을 남긴 신사임당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종법제도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호주제도로 정착되어 오늘날의 여성들에게까지 족쇄를 채우고 있다. 여성을 삼종의 예와 칠거지악으로 매어놓는 험난한 세월 속에서도 그 시대가 강요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던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삶을 들여다보며 여성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부당한 억압에 저항하여 독립된 자아를 추구했던 여성들의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3)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의 차이점
27살의 나이로 숱한 그리움에 주옥같은 시들이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면 그의 삶은 더 많은 업적들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았을 것이다. 두 삶이 매우 대비가 되는데 그것은 공통점도 있다. 따지자면 여자이고 1500년대 사람들이고 어린 시절이 유복했으며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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