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노신의 생애.
3. 노신의 작품 세계
4. 주요 작품 소개 및 분석
제 1소설집: 납함
제 2소설집: 방황
제 3소설집: 고사신편
5. 노신의 사상과 문학의 성격
6. 답사 과정 및 감흥
7. 답사 후기
답사사진
참고문헌
2. 노신의 생애.
3. 노신의 작품 세계
4. 주요 작품 소개 및 분석
제 1소설집: 납함
제 2소설집: 방황
제 3소설집: 고사신편
5. 노신의 사상과 문학의 성격
6. 답사 과정 및 감흥
7. 답사 후기
답사사진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는 들끓는 가슴 속의 말을 표현 하지 않고서는 마음 깊은 구석의 고독과 슬픔을 달랠 수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 열정과 용기가 타인에게 어떠한 시선으로 비춰질지에 대해서는, 즉 외부의 압력과 평가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진실한 목소리이고, 부조리한 역사적 현실에 맞서 끊임없이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진정한 용기일 뿐이다.
나는 이 시대의 난제에 대해 비평하고 싶은 사람도 아니고, 노신처럼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국가를 걱정하는 애국자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단지 한 인간의 외로움과 슬픔에 공감했고 그의 깊은 내면에 폭발할 듯 잠겨 있는 급박한 외침, 정직한 표현의 힘에 열정을 느낀 것뿐이다. 그런 그의 힘이 내게는 지루하게 반복된 텁텁한 일상과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다시금 설레게 하는, 뛰게 하는, 가슴 뭉클하게 울리게 하는 그 무언가의 에너지를 일깨워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숨이 찼고, 기뻤다. 힘에 빠진 나에게 박카스 한 병 따먹은 듯 한 상쾌함 그 이상, 혹은 그 몇 십 배의 활력을 느끼게 된 구절이다!
나는 나의 내면에 축적된 심현한 외로움과 슬픔, 그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생의 들끓는 열정과 에너지로 기운 진작시키는 그의 말들이 좋다. 젊은이라면 응당 비닐하우스에 곱게 길들여진 장미꽃 같기 보다는 들바람에 휘날려도 수수한 국화꽃이라야 한다. 비록 들국화가 장미보다 곱지는 않아도, 모든 이가 아름답다고 칭찬하지는 않아도, 혹은 어떤 이는 풋내 나고 촌스럽다 불평한다 할지라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배포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나에겐 그렇게 멋져 보이던 이 모든 가치가 이 시대가 선망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님을 인정해야 하는 비굴함에 무너져 가고 있다. 그런 나에게 있어 노신의 외침은 가슴을 후벼 판다. 적어도 이 곳, 소흥에서만은 그런 그의 메시지를 가슴에 품은 채 있고 싶다. 아니, 내가 속한 밥벌이 공간으로 돌아왔을 때라도 가끔은 생각났으면 한다. 때로는 내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다, 느껴야 한다.
이렇게 노신의 <납함>과 <방황> 그리고 <야초>와의 재회는 노신을 추억하고, 나의 가장 열정어린 시절과 상봉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내가 노신에 대한 아는 것은 손톱의 끝자락만이고, 내가 노신을 동경했던 것도 나 개인이 보고자 했던 건만 골라 보며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중국 문학계에는 노신만 평생 연구하며 생을 마감하는 수 천, 수 만 명의 학자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신 답사의 과정 중에서 그의 후기 작품집에 속하는 <고사신편>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또한 그의 기념관을 장식했던 수많은 판화들은 그가 만년에 몰두했다던 판화운동에 대한 인식도 재점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머리를 쥐고 고뇌하고 있던 한 중국인의 모습을 새겨 놓았던 판화의 모습은 시대를 절규하는 형상이었겠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청년, 혹은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반추할 수 있는 귀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생경한 중국이란 곳에서, 어쩌면 영원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을 중국인들의 틈바귀 속에서 나는 노신이란 중국인을, <납함>과 <야초>라는 중국 문학을, 그의 사상과 글귀들을 동경해 왔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이 상황이 나의 뇌를 또다시 건드린다. 과연 한국인으로서, 한국 문학은, 한국 작가는 이토록 가슴 뛰게 흠모해 보았던 적이 있는가? 은희경의 소설이 재미나더라, 윤동주의 시는 언제 읽어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더라는 등 단편적인 감정들의 소비는 있어 왔어도 진정으로 어느 한 분을, 어느 한 작품을 진심어린 마음으로 탐구해 보거나 깊이 고민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또다시 두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얹고 반성이라는 시간을 가져 본다.
노신의 삶의 흔적을 밟기 위해 방문한 이번 소흥 여행은 이토록 많은 감정의 변화와 생각의 파편들을 내게 남겼다. 나는 노신이 쓰던 마호가니 책상을 보며 그의 유년기를 상상했고, 오봉선을 타면서 잡문(수필류)에 묘사된 경치를 떠올려 보았으며, 소흥주와 회향두를 먹으며 <공을기>의 한 장면을 연출해 보았고, ‘대우릉’에 올라 <고향>에 반영된 소흥의 이면을 되새겨 보았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소흥의 공기 속에서 노신의 한 숨결도 살짝 맡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와 독자가 글을 통해서 만나고, 다시 작가의 고장과 독자가 실제 현장에서 만나면서 작가와 독자는 점점 더 각별한 사이가 되어 간다. 무언가 둘만의 비밀이 생긴 것만 같아 우쭐하기까지도 한다. 내게 회상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 준 이번 답사 여행은 그래서 그 의미가 더욱 소중하다.
중국의 겨울바람이 이미 칼같이 서리다. 두꺼운 패딩 점퍼는 한국 바람이나 겨우 막을 수 있으려나 이 곳 동북지역의 내리꽂는 바람 덩이를 감당해 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뒤로 하고 겨울 방학이 오면 한국에 돌아가 윤동주 생가를 찾아보려 한다. 점점 야위고 늙어가는 어머니 손을 잡고 그의 삶의 흔적을 찾아 서울 한 구석을 조곤조곤 걷다보면 또다시 새로운 감흥에 젖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이번 과제는 나를 돌아보고 내 주위를 돌보게 만들었다. 앞만 보고 내달려가서 가끔은 가슴이 너무나 벅찬 나에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아름다운 것인지 되새겨 보게 만들었다. 나는 점점 잊혀져가는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더 이상 잃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고 있다
답사 사진
<납함(喊)> 서문을 새긴 비석 수향(水)의 도시 소흥의 풍경
소흥 오봉선(蓬船) 고헌정구(古亭口):
소설 <약()>의 소재 추근의 기념비와 함께
참고문헌
http://www.chinainkorea.co.kr
http://www.haochina.org
<노신과 중국현대문학의 이해>, 엄영욱, 전남대학교출판부, 2003.
<루쉰 소설전집>, 김시준 역,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야초>, 노신, 인민문학출판사, 2003.
나는 이 시대의 난제에 대해 비평하고 싶은 사람도 아니고, 노신처럼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국가를 걱정하는 애국자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단지 한 인간의 외로움과 슬픔에 공감했고 그의 깊은 내면에 폭발할 듯 잠겨 있는 급박한 외침, 정직한 표현의 힘에 열정을 느낀 것뿐이다. 그런 그의 힘이 내게는 지루하게 반복된 텁텁한 일상과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다시금 설레게 하는, 뛰게 하는, 가슴 뭉클하게 울리게 하는 그 무언가의 에너지를 일깨워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숨이 찼고, 기뻤다. 힘에 빠진 나에게 박카스 한 병 따먹은 듯 한 상쾌함 그 이상, 혹은 그 몇 십 배의 활력을 느끼게 된 구절이다!
나는 나의 내면에 축적된 심현한 외로움과 슬픔, 그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생의 들끓는 열정과 에너지로 기운 진작시키는 그의 말들이 좋다. 젊은이라면 응당 비닐하우스에 곱게 길들여진 장미꽃 같기 보다는 들바람에 휘날려도 수수한 국화꽃이라야 한다. 비록 들국화가 장미보다 곱지는 않아도, 모든 이가 아름답다고 칭찬하지는 않아도, 혹은 어떤 이는 풋내 나고 촌스럽다 불평한다 할지라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배포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나에겐 그렇게 멋져 보이던 이 모든 가치가 이 시대가 선망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님을 인정해야 하는 비굴함에 무너져 가고 있다. 그런 나에게 있어 노신의 외침은 가슴을 후벼 판다. 적어도 이 곳, 소흥에서만은 그런 그의 메시지를 가슴에 품은 채 있고 싶다. 아니, 내가 속한 밥벌이 공간으로 돌아왔을 때라도 가끔은 생각났으면 한다. 때로는 내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다, 느껴야 한다.
이렇게 노신의 <납함>과 <방황> 그리고 <야초>와의 재회는 노신을 추억하고, 나의 가장 열정어린 시절과 상봉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내가 노신에 대한 아는 것은 손톱의 끝자락만이고, 내가 노신을 동경했던 것도 나 개인이 보고자 했던 건만 골라 보며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중국 문학계에는 노신만 평생 연구하며 생을 마감하는 수 천, 수 만 명의 학자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신 답사의 과정 중에서 그의 후기 작품집에 속하는 <고사신편>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또한 그의 기념관을 장식했던 수많은 판화들은 그가 만년에 몰두했다던 판화운동에 대한 인식도 재점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머리를 쥐고 고뇌하고 있던 한 중국인의 모습을 새겨 놓았던 판화의 모습은 시대를 절규하는 형상이었겠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청년, 혹은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반추할 수 있는 귀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생경한 중국이란 곳에서, 어쩌면 영원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을 중국인들의 틈바귀 속에서 나는 노신이란 중국인을, <납함>과 <야초>라는 중국 문학을, 그의 사상과 글귀들을 동경해 왔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이 상황이 나의 뇌를 또다시 건드린다. 과연 한국인으로서, 한국 문학은, 한국 작가는 이토록 가슴 뛰게 흠모해 보았던 적이 있는가? 은희경의 소설이 재미나더라, 윤동주의 시는 언제 읽어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더라는 등 단편적인 감정들의 소비는 있어 왔어도 진정으로 어느 한 분을, 어느 한 작품을 진심어린 마음으로 탐구해 보거나 깊이 고민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또다시 두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얹고 반성이라는 시간을 가져 본다.
노신의 삶의 흔적을 밟기 위해 방문한 이번 소흥 여행은 이토록 많은 감정의 변화와 생각의 파편들을 내게 남겼다. 나는 노신이 쓰던 마호가니 책상을 보며 그의 유년기를 상상했고, 오봉선을 타면서 잡문(수필류)에 묘사된 경치를 떠올려 보았으며, 소흥주와 회향두를 먹으며 <공을기>의 한 장면을 연출해 보았고, ‘대우릉’에 올라 <고향>에 반영된 소흥의 이면을 되새겨 보았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소흥의 공기 속에서 노신의 한 숨결도 살짝 맡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와 독자가 글을 통해서 만나고, 다시 작가의 고장과 독자가 실제 현장에서 만나면서 작가와 독자는 점점 더 각별한 사이가 되어 간다. 무언가 둘만의 비밀이 생긴 것만 같아 우쭐하기까지도 한다. 내게 회상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 준 이번 답사 여행은 그래서 그 의미가 더욱 소중하다.
중국의 겨울바람이 이미 칼같이 서리다. 두꺼운 패딩 점퍼는 한국 바람이나 겨우 막을 수 있으려나 이 곳 동북지역의 내리꽂는 바람 덩이를 감당해 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뒤로 하고 겨울 방학이 오면 한국에 돌아가 윤동주 생가를 찾아보려 한다. 점점 야위고 늙어가는 어머니 손을 잡고 그의 삶의 흔적을 찾아 서울 한 구석을 조곤조곤 걷다보면 또다시 새로운 감흥에 젖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이번 과제는 나를 돌아보고 내 주위를 돌보게 만들었다. 앞만 보고 내달려가서 가끔은 가슴이 너무나 벅찬 나에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아름다운 것인지 되새겨 보게 만들었다. 나는 점점 잊혀져가는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더 이상 잃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고 있다
답사 사진
<납함(喊)> 서문을 새긴 비석 수향(水)의 도시 소흥의 풍경
소흥 오봉선(蓬船) 고헌정구(古亭口):
소설 <약()>의 소재 추근의 기념비와 함께
참고문헌
http://www.chinainkorea.co.kr
http://www.haochina.org
<노신과 중국현대문학의 이해>, 엄영욱, 전남대학교출판부, 2003.
<루쉰 소설전집>, 김시준 역,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야초>, 노신, 인민문학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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