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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1. 硏究史 정리
2. 경기체가 작품개관
Ⅱ. 본론
1. 경기체가 개관
2. 개별작품 연구Ⅰ~Ⅳ
1) 한림별곡
2) 관동별곡
3) 죽계별곡
4) 상대별곡
5) 불우헌곡 ~ 구월산별곡
6) 화산별곡 ~ 금성별곡
7) 오륜가 ~ 엄연곡
8) 미탄찬 ~ 기우목동가
Ⅲ. 결론
※참고문헌
1. 硏究史 정리
2. 경기체가 작품개관
Ⅱ. 본론
1. 경기체가 개관
2. 개별작품 연구Ⅰ~Ⅳ
1) 한림별곡
2) 관동별곡
3) 죽계별곡
4) 상대별곡
5) 불우헌곡 ~ 구월산별곡
6) 화산별곡 ~ 금성별곡
7) 오륜가 ~ 엄연곡
8) 미탄찬 ~ 기우목동가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2와 『죽계지(竹溪志)』에 실려 있다. 죽계는 지금의 경상북도 풍기에 있는 시내 이름이고, 풍기의 옛 지명인 순흥은 안축의 관향인 동시에 고향이다.
전체 5장으로, 1장은 죽계의 지역적 위치와 경관을 묘사하였고, 2장은 누대와 정자에 모여 유흥을 즐기는 모습이, 3장은 향교에서 공자를 추모하는 선비들이 봄에는 경서를 외고 여름에는 거문고를 뜯는 모습이, 4장은 천리 밖에서 작자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5장은 성대를 중흥해서 태평을 길이 즐기는 모습이 각각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고려 신흥 사대부들의 의욕에 넘치는 생활 감정이 잘 그려져 있다. 형식상으로 보면, 2~4장에서 비교적 정돈된 3ㆍ4ㆍ4, 3ㆍ3ㆍ4, 4ㆍ4ㆍ4조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5장은 앞 부분 전체가 4ㆍ4ㆍ4조로 일관되고, 1장은 4ㆍ3ㆍ4조의 파격을 보이며, 4장과 5장의 일부에서는 ‘경기하여’가 탈락되기도 한다. 동시에 이두의 사용이 빈번하다.
정돈된 형식과 정돈되지 않은 형식의 뒤섞임을 통해서 「죽계별곡」은 경기체가 장르의 형성과정을 보여준다. 고려 신흥 사대부의 의욕 넘치는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한림별곡」과 동일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자기 고향의 풍속과 자연 경관을 자랑스럽게 구현하여 작자의 애향심과 가문에 대한 긍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pp92~93)
<상대별곡>(霜臺別曲)
1. 작품 개관 및 작가 高麗歌謠의 硏究(李明九, 新雅社, 1973), 別曲體歌의 普遍的性格考察(金倉圭, 徐首生先生還甲紀念論叢, 198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상대(霜臺)란 사헌부의 별칭이다. 상대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새 국가 문물 제도의 훌륭함과 정연(整然)함을 칭송함으로써 창업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 노래는 한자어를 나열한 것과 3.3.4조의 운율, 후렴구가 경기체가의 형식이며, 전절과 후절로 나뉜 것도 경기체가와 같다. 악장 문학에 속하기도 하는데 사헌부는 새 왕조의 기강을 바로잡는 기관으로 서릿발 같은 기세로 새 왕조에 반대하는 세력을 규찰하고 엄격한 질서를 수립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았으니, 거기서 일하는 관원을 위의가 대단하고 자부심도 남다르다는 관점에서 이 작품을 살펴 보면 된다.
○권근(權 近 1352∼1409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학자. 자 가원(可遠)·사숙(思叔). 호 양촌(陽村). 시호 문충(文忠). 초명 진(晋). 1367년(공민왕 16)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이 되고, 우왕(禑王) 때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창왕(昌王) 때 좌대언(左代言)·지신사(知申事)를 거쳐 밀직사첨서사(密直司僉書事)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75년(우왕 1) 박상충(朴尙衷)·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같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였고, 89년(창왕 1) 윤승순(尹承順)의 부사(副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올 때 가져온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화근이 되어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가 영해(寧海)·흥해(興海)·김해(金海) 등지로 이배(移配)되었다. 90년(공양왕 2)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청주(淸州)에 옮겨졌다가 풀려났다.
조선이 개국되자 93년(태조 2) 예문춘추관학사(藝文春秋館學士)·대사성·중추원사(中樞院使) 등을 역임하고, 96년 표전문제(表箋問題)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불안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98년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문하부참찬사(文下府參贊事)를 거쳐 대사헌을 지내고, 사병(私兵)의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대사성·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거쳐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이사(貳師) 등을 역임하였고,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찬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경학(經學)에도 밝아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였다. 또한 그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였고, 시부사장(詩賦詞章)의 학을 실용면에서 중시하여 이를 장려하였으며,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의 양면을 조화시켰다. 문집 《양촌집(陽村集)》 외에 저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동현사략(東賢事略)》이 있고, 작품에 <상대별곡(霜臺別曲)>이 있다. (동아대백과사전)
2. 작품 원문과 현대역
제 1장
華山南 漢水北 千年勝地
廣通橋 雲鐘街 건나드러
落落長松 亭亭古栢 秋霜烏府
위 萬古淸風ㅅ景 긔 엇더니잇고
英雄豪傑 一時人才 英雄豪傑 一時人才
위 날조차 몃분니잇고
북한산의 남쪽, 한강의 북쪽, 옛날부터 이름난 경치 좋은 땅, 광교, 종로 건너 들어가
휘휘 늘어진 소나무, 우뚝 솟은 잣나무(사직의 원로 대신), 위엄 있는 사헌부
(위) 청렴한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엽) 영웅 호걸 당대의 인재들 영웅 호걸 당
대의 인재들
(위) 나를 위시하여 몇 사람입니까?
추상같은 사헌부의 위용
○화산남(華山南) : 삼각산(三角山)의 다른 이름. 서울의 북쪽에 있는 지금의 북한산. 백운대 인수봉 만수대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삼각산터라 함.
○한수(漢水) : 한강.
○광통교(廣通橋) : 조선 초 한양성 종루(현재의 보신각)의 남쪽에 있던 다리. 대광통교, 소광통교의 두 개의 다리가 있었음. 현재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있었던 다리.
○운종가(雲鐘街) : 조선 초 종루(鐘樓)를 중심으로 할때 서쪽의 거리.
○건나 들어 : 건너 들어가
○낙락(落落) : 가지가 죽죽 늘어진 것을 형용한 말.
○정정(亭亭) : 나무가 우뚝우뚝 높이 솟아 있는 것을 형용한 말.
○오부(烏符) : 사헌부의 별칭
○긔 어떠니잇고 : 그것이 어떠합니까
○날조차 몃부니잇고 : 나를 포함해서 몇 분입니까
제 2 장
旣鳴 天欲曉 紫陌長堤
大司憲 老執義 臺長御使
駕鶴鸞 前呵後擁 除左右
위 霜臺ㅅ景 긔 엇더니잇고
전체 5장으로, 1장은 죽계의 지역적 위치와 경관을 묘사하였고, 2장은 누대와 정자에 모여 유흥을 즐기는 모습이, 3장은 향교에서 공자를 추모하는 선비들이 봄에는 경서를 외고 여름에는 거문고를 뜯는 모습이, 4장은 천리 밖에서 작자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5장은 성대를 중흥해서 태평을 길이 즐기는 모습이 각각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고려 신흥 사대부들의 의욕에 넘치는 생활 감정이 잘 그려져 있다. 형식상으로 보면, 2~4장에서 비교적 정돈된 3ㆍ4ㆍ4, 3ㆍ3ㆍ4, 4ㆍ4ㆍ4조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5장은 앞 부분 전체가 4ㆍ4ㆍ4조로 일관되고, 1장은 4ㆍ3ㆍ4조의 파격을 보이며, 4장과 5장의 일부에서는 ‘경기하여’가 탈락되기도 한다. 동시에 이두의 사용이 빈번하다.
정돈된 형식과 정돈되지 않은 형식의 뒤섞임을 통해서 「죽계별곡」은 경기체가 장르의 형성과정을 보여준다. 고려 신흥 사대부의 의욕 넘치는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한림별곡」과 동일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자기 고향의 풍속과 자연 경관을 자랑스럽게 구현하여 작자의 애향심과 가문에 대한 긍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pp92~93)
<상대별곡>(霜臺別曲)
1. 작품 개관 및 작가 高麗歌謠의 硏究(李明九, 新雅社, 1973), 別曲體歌의 普遍的性格考察(金倉圭, 徐首生先生還甲紀念論叢, 198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상대(霜臺)란 사헌부의 별칭이다. 상대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새 국가 문물 제도의 훌륭함과 정연(整然)함을 칭송함으로써 창업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 노래는 한자어를 나열한 것과 3.3.4조의 운율, 후렴구가 경기체가의 형식이며, 전절과 후절로 나뉜 것도 경기체가와 같다. 악장 문학에 속하기도 하는데 사헌부는 새 왕조의 기강을 바로잡는 기관으로 서릿발 같은 기세로 새 왕조에 반대하는 세력을 규찰하고 엄격한 질서를 수립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았으니, 거기서 일하는 관원을 위의가 대단하고 자부심도 남다르다는 관점에서 이 작품을 살펴 보면 된다.
○권근(權 近 1352∼1409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학자. 자 가원(可遠)·사숙(思叔). 호 양촌(陽村). 시호 문충(文忠). 초명 진(晋). 1367년(공민왕 16)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이 되고, 우왕(禑王) 때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창왕(昌王) 때 좌대언(左代言)·지신사(知申事)를 거쳐 밀직사첨서사(密直司僉書事)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75년(우왕 1) 박상충(朴尙衷)·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같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였고, 89년(창왕 1) 윤승순(尹承順)의 부사(副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올 때 가져온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화근이 되어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가 영해(寧海)·흥해(興海)·김해(金海) 등지로 이배(移配)되었다. 90년(공양왕 2)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청주(淸州)에 옮겨졌다가 풀려났다.
조선이 개국되자 93년(태조 2) 예문춘추관학사(藝文春秋館學士)·대사성·중추원사(中樞院使) 등을 역임하고, 96년 표전문제(表箋問題)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불안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98년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문하부참찬사(文下府參贊事)를 거쳐 대사헌을 지내고, 사병(私兵)의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대사성·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거쳐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이사(貳師) 등을 역임하였고,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찬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경학(經學)에도 밝아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였다. 또한 그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였고, 시부사장(詩賦詞章)의 학을 실용면에서 중시하여 이를 장려하였으며,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의 양면을 조화시켰다. 문집 《양촌집(陽村集)》 외에 저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동현사략(東賢事略)》이 있고, 작품에 <상대별곡(霜臺別曲)>이 있다. (동아대백과사전)
2. 작품 원문과 현대역
제 1장
華山南 漢水北 千年勝地
廣通橋 雲鐘街 건나드러
落落長松 亭亭古栢 秋霜烏府
위 萬古淸風ㅅ景 긔 엇더니잇고
英雄豪傑 一時人才 英雄豪傑 一時人才
위 날조차 몃분니잇고
북한산의 남쪽, 한강의 북쪽, 옛날부터 이름난 경치 좋은 땅, 광교, 종로 건너 들어가
휘휘 늘어진 소나무, 우뚝 솟은 잣나무(사직의 원로 대신), 위엄 있는 사헌부
(위) 청렴한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엽) 영웅 호걸 당대의 인재들 영웅 호걸 당
대의 인재들
(위) 나를 위시하여 몇 사람입니까?
추상같은 사헌부의 위용
○화산남(華山南) : 삼각산(三角山)의 다른 이름. 서울의 북쪽에 있는 지금의 북한산. 백운대 인수봉 만수대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삼각산터라 함.
○한수(漢水) : 한강.
○광통교(廣通橋) : 조선 초 한양성 종루(현재의 보신각)의 남쪽에 있던 다리. 대광통교, 소광통교의 두 개의 다리가 있었음. 현재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있었던 다리.
○운종가(雲鐘街) : 조선 초 종루(鐘樓)를 중심으로 할때 서쪽의 거리.
○건나 들어 : 건너 들어가
○낙락(落落) : 가지가 죽죽 늘어진 것을 형용한 말.
○정정(亭亭) : 나무가 우뚝우뚝 높이 솟아 있는 것을 형용한 말.
○오부(烏符) : 사헌부의 별칭
○긔 어떠니잇고 : 그것이 어떠합니까
○날조차 몃부니잇고 : 나를 포함해서 몇 분입니까
제 2 장
旣鳴 天欲曉 紫陌長堤
大司憲 老執義 臺長御使
駕鶴鸞 前呵後擁 除左右
위 霜臺ㅅ景 긔 엇더니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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