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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목차
1. 악장의 개념과 명칭
2. 악장의 성립과 전개과정
3. 악장의 형태와 분류
4. 주요 작가와 작품
- 주요작가와 작품들
- 용비어천가
- 월인천강지곡
5. 부 록
6. 참고 문헌
2. 악장의 성립과 전개과정
3. 악장의 형태와 분류
4. 주요 작가와 작품
- 주요작가와 작품들
- 용비어천가
- 월인천강지곡
5. 부 록
6. 참고 문헌
본문내용
차용원(借用源)을 민속칭송지사(民俗稱頌之詞)로 밝혀 내용의 비작위성을 강조햐였고 결과적으로 기존의 조묘악가와는 구분된다고 명시한 점이다.
첫째 이유를 살펴보자. 이 작품의 국문시와 한문시가 원시와 번역시의 관계로 맺어지든 아니면 그 역이든, 악장의 측면에서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가사를 두 갈래로 제시해 놓은 것이 단순히 의미전달의 목적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문가사 전체는, 수장(首章)과 110장~125장을 제외하고, 4언 8구로서 기존 정격악장(한문악장)의 형태를 완벽하게 지키고 있다. 하지만 국문가사의 경우에는 학자들이 이견을 보일 만큼 외견상 새로운 형태의 변격임에 틀림없다. 세종의 입장에서는 동양적 예악 전통의 계속성을 단절 시킬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중국계 아악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한 것과 같은 차원에서 악장도 조선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반되는 성격의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한문악장과 국문악장의 병치 구조였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자. 용비어천가가 완성된 후 작자들은 이에 대하여 민속의 창송하는 말을 캐 놓은 것 일 뿐이며 감히 조묘의 악가에 비길 수 없다고 겸양하였다. 민속의 칭송을 단순히 나열 한 것은 아니겠지만, 소재드를 민간으로부터 수집한 것은 세종의 명이었다. 민속의 칭송을 강조함으로서 왕조에 대한 민심의 호응을 기대 한 것이 1차적 목적이었겠지만, 위에 나오는 감히 조묘의 악가에 비길 수 없다는 언급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면 악장의 현실적 수요 또한 주된 요인 중의 하나였음을 간과 할 수 없다. 조묘의 악가가 다소 의례적이고 작위적인 내용을 지닌 반면 용비어천가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진실에 입각한 사적의 실재성을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은근히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용비어천가가 정격(한문악장)과 변격(국문악장)을 담아 악장으로서 포괄적인 특성을 보여주었다면, 뒤를 이어 등장한 <월인천강지곡>은 완벽하게 조선적인 것만 선별적으로 갖춘 작품이다. 즉 4언체 한시로 된 정격악장의 계속성을 보여줄 필요도 없었고,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의 증거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용비어천가>와 같이 완전하긴 하지만 구차한 방법을 쓰지는 않았던 것이다.더구나 정책적으로도 배척당하는 입장에 있었던 만큼 최소한의 표현법만 도입하여 쓰는 데 그쳤다고 생각된다.
4. 악장의 소멸
조선 전기의 교술문학은 악장, 경기체가, 가사로 이야기 될 수 있다. 이 중에 악장이 가장 먼저 자취를 감추어, 조선이 건국한 14C말에서 15C초에 발생하여 15C중엽 정도까지 존재했던 매우 특이한 성격을 지니는 장르가 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4가지로 귀결 될 수 있다.
첫째로 악장의 정치성이다. 악장의 개별작품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악장은 조선 건국 초기에 왕실이나 정권의 정당성을 세상에 널리 알려 민심의 동요를 막는 것을 목적으로 창작되었다. 세월이 지나 정치가 안정이 되어 태평성대를 누리고 조선의 제도 문물이 완전히 갖추어지자, 악장은 그 정치성을 잃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둘째로 악장의 목적성에 있다. 악장은 나라에서 거행하는 공식적인 행사에 소용되는 노래이다. 목적으로 하는 바나 나타내는 내용은 아주 뚜렷하지만, 독자적인 형식을 형성하는데 이르지 못했으며 자연스럽게 지속 될 수도 없었다. 이는 첫째 이유와 결부되어 악장이 정치적인 기능을 잃었을 때 다른 내용으로의 변화를 어렵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셋째로 악장의 음악성에 있다. 악장은 그 이름과 그 근원(악부)에서 알 수 있듯이 음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장르이다. 물론 악장*경기체가*가사 모두 노래로 부르는 시이고 음악이면서 문학이다. 그런데 음악으로서의 구실과 문학으로서의 구실을 견주어 보면 악장이 월등히 음악쪽으로 치우친 것을 알 수 있다. 악장은 조선왕조의 창업과 더불어 통치질서의 상징인 예악을 정비하고자 해서 새로 지은 노래이다. 노래 사설은 음악이나 춤이 무엇이 뜻하는가 설명하는 구실이나 맡았다 하겠으며 그 자체로서 문학적인 형식을 갖출 필요는 없었다.사대부 문화로서 지속적인 의의를 가지고 거듭 창조된 것은 음악이 아니고 문학이었다.
넷째로 악장의 공적 성격이다. 사대부 문학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공적인 문학은 왕조의 사업에서 긴요한 구실을 한다면, 사적인 문학은 작가가 자기 생활을 표현하며 스스로 즐기는데 소용되었다. 이런면에서 악장은 공적이기만 한 문학이고, 경기체가에는 두가지가 다 있으며, 가사는 시조와 함께 사적이기만 한 문학이다. 공적인 문학에서는 통치질서가 확립되면 누구나 태평성대를 이룰것이라 했지만, 집권 사대부라 하더라도 공적인 문학에서 내세우는 것 만으로는 소망이나 고민을 해소 할 수 없었으므로 개인적인 창작이 따로 필요했다. 더구나 집권세력에서 밀려나 은거하거나 귀양살이 할 때에는 사적인 문학의 욕구가 간절해 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공적인 문학인 악장의 지위는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Ⅲ 악장의 형태와 분류
악장은 여타의 시가와는 다른 특이한 성격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형태나 표기수단에 의한 분류가 최선일 수밖에 없게 된다.
1. 형태에 의한 분류
작품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에 따라 나뉜 방법
1-1) 단장체 : 초기에 지어진 ‘납씨가’나 ‘신도가’ 같은 것들로 짧은 노래이다.
1-2) 연장체 : 세종 때에 만들어진 악장들로 ‘감군은’이나 ‘용비어천가’같은 작품들이 모두 이 형태를 띰
2. 표기 수단에 의한 분류
이 분류 방법은 한문과 국문이라는 문자 체계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 분류는 두 언어체계가 각기 시적 전총을 달리하기 때문에 악장의 형식적 연원을 체계적으로 살필 수 있는 이점과, 한글 창제 이후의 언문일치 현상이 악장에 미친 영향을 밝힐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한문악장, 국문악장, 현토악장으로 분류하는 것이 적합하다.
3. 단장체 악장
3-1) 한문악장
㈎ 한문악장은 중국의 악장과도 밀접한 연관을 지녔는데, 우리나라 악장은 중국에서 이루어진 예악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중국에서 만들어진 악장의 영향을
첫째 이유를 살펴보자. 이 작품의 국문시와 한문시가 원시와 번역시의 관계로 맺어지든 아니면 그 역이든, 악장의 측면에서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가사를 두 갈래로 제시해 놓은 것이 단순히 의미전달의 목적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문가사 전체는, 수장(首章)과 110장~125장을 제외하고, 4언 8구로서 기존 정격악장(한문악장)의 형태를 완벽하게 지키고 있다. 하지만 국문가사의 경우에는 학자들이 이견을 보일 만큼 외견상 새로운 형태의 변격임에 틀림없다. 세종의 입장에서는 동양적 예악 전통의 계속성을 단절 시킬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중국계 아악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한 것과 같은 차원에서 악장도 조선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반되는 성격의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한문악장과 국문악장의 병치 구조였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자. 용비어천가가 완성된 후 작자들은 이에 대하여 민속의 창송하는 말을 캐 놓은 것 일 뿐이며 감히 조묘의 악가에 비길 수 없다고 겸양하였다. 민속의 칭송을 단순히 나열 한 것은 아니겠지만, 소재드를 민간으로부터 수집한 것은 세종의 명이었다. 민속의 칭송을 강조함으로서 왕조에 대한 민심의 호응을 기대 한 것이 1차적 목적이었겠지만, 위에 나오는 감히 조묘의 악가에 비길 수 없다는 언급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면 악장의 현실적 수요 또한 주된 요인 중의 하나였음을 간과 할 수 없다. 조묘의 악가가 다소 의례적이고 작위적인 내용을 지닌 반면 용비어천가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진실에 입각한 사적의 실재성을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은근히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용비어천가가 정격(한문악장)과 변격(국문악장)을 담아 악장으로서 포괄적인 특성을 보여주었다면, 뒤를 이어 등장한 <월인천강지곡>은 완벽하게 조선적인 것만 선별적으로 갖춘 작품이다. 즉 4언체 한시로 된 정격악장의 계속성을 보여줄 필요도 없었고,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의 증거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용비어천가>와 같이 완전하긴 하지만 구차한 방법을 쓰지는 않았던 것이다.더구나 정책적으로도 배척당하는 입장에 있었던 만큼 최소한의 표현법만 도입하여 쓰는 데 그쳤다고 생각된다.
4. 악장의 소멸
조선 전기의 교술문학은 악장, 경기체가, 가사로 이야기 될 수 있다. 이 중에 악장이 가장 먼저 자취를 감추어, 조선이 건국한 14C말에서 15C초에 발생하여 15C중엽 정도까지 존재했던 매우 특이한 성격을 지니는 장르가 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4가지로 귀결 될 수 있다.
첫째로 악장의 정치성이다. 악장의 개별작품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악장은 조선 건국 초기에 왕실이나 정권의 정당성을 세상에 널리 알려 민심의 동요를 막는 것을 목적으로 창작되었다. 세월이 지나 정치가 안정이 되어 태평성대를 누리고 조선의 제도 문물이 완전히 갖추어지자, 악장은 그 정치성을 잃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둘째로 악장의 목적성에 있다. 악장은 나라에서 거행하는 공식적인 행사에 소용되는 노래이다. 목적으로 하는 바나 나타내는 내용은 아주 뚜렷하지만, 독자적인 형식을 형성하는데 이르지 못했으며 자연스럽게 지속 될 수도 없었다. 이는 첫째 이유와 결부되어 악장이 정치적인 기능을 잃었을 때 다른 내용으로의 변화를 어렵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셋째로 악장의 음악성에 있다. 악장은 그 이름과 그 근원(악부)에서 알 수 있듯이 음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장르이다. 물론 악장*경기체가*가사 모두 노래로 부르는 시이고 음악이면서 문학이다. 그런데 음악으로서의 구실과 문학으로서의 구실을 견주어 보면 악장이 월등히 음악쪽으로 치우친 것을 알 수 있다. 악장은 조선왕조의 창업과 더불어 통치질서의 상징인 예악을 정비하고자 해서 새로 지은 노래이다. 노래 사설은 음악이나 춤이 무엇이 뜻하는가 설명하는 구실이나 맡았다 하겠으며 그 자체로서 문학적인 형식을 갖출 필요는 없었다.사대부 문화로서 지속적인 의의를 가지고 거듭 창조된 것은 음악이 아니고 문학이었다.
넷째로 악장의 공적 성격이다. 사대부 문학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공적인 문학은 왕조의 사업에서 긴요한 구실을 한다면, 사적인 문학은 작가가 자기 생활을 표현하며 스스로 즐기는데 소용되었다. 이런면에서 악장은 공적이기만 한 문학이고, 경기체가에는 두가지가 다 있으며, 가사는 시조와 함께 사적이기만 한 문학이다. 공적인 문학에서는 통치질서가 확립되면 누구나 태평성대를 이룰것이라 했지만, 집권 사대부라 하더라도 공적인 문학에서 내세우는 것 만으로는 소망이나 고민을 해소 할 수 없었으므로 개인적인 창작이 따로 필요했다. 더구나 집권세력에서 밀려나 은거하거나 귀양살이 할 때에는 사적인 문학의 욕구가 간절해 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공적인 문학인 악장의 지위는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Ⅲ 악장의 형태와 분류
악장은 여타의 시가와는 다른 특이한 성격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형태나 표기수단에 의한 분류가 최선일 수밖에 없게 된다.
1. 형태에 의한 분류
작품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에 따라 나뉜 방법
1-1) 단장체 : 초기에 지어진 ‘납씨가’나 ‘신도가’ 같은 것들로 짧은 노래이다.
1-2) 연장체 : 세종 때에 만들어진 악장들로 ‘감군은’이나 ‘용비어천가’같은 작품들이 모두 이 형태를 띰
2. 표기 수단에 의한 분류
이 분류 방법은 한문과 국문이라는 문자 체계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 분류는 두 언어체계가 각기 시적 전총을 달리하기 때문에 악장의 형식적 연원을 체계적으로 살필 수 있는 이점과, 한글 창제 이후의 언문일치 현상이 악장에 미친 영향을 밝힐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한문악장, 국문악장, 현토악장으로 분류하는 것이 적합하다.
3. 단장체 악장
3-1) 한문악장
㈎ 한문악장은 중국의 악장과도 밀접한 연관을 지녔는데, 우리나라 악장은 중국에서 이루어진 예악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중국에서 만들어진 악장의 영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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