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의 한 비유적 행동이다. 여기 글을 “쓴다”는 말은 단순히 쓰는 것이 아닌, “등록하다”(to register)의 뜻이며, “땅”은 “먼지”의 의미로 볼 수 있다. 당시 재판관 들은 선고를 하기 전 반드시 그 고소 내용을 문서에 기록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내용을 “땅”에 기록하신 것이다. 예레미야 17:13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그리하여 이는 예수께서 이들의 고소를 영원히 기록되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이 때 땅에 글을 쓰심으로 이 여인의 죄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의 고소를 무효화시키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않으시며, 예레미야를 통해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렘 31:34)고 하셨던 그 종ㅇ말의 때가 이미 예수를 통해 왔음을 보이신 것이다.
12: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시며, 신적인 지혜의 빛이다. 그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보는 것만이 아닌, 생명의 빛을 “얻는”축복을 받는다. 믿는 자가 가지는 이 내심(內心)의 빛은 흑암의 세상 길을 순력(巡歷)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넘어지지 않고 마치 대낮에 다니는 것처럼 다닐 수 있게 할 것이다.
21: 내가 가리니 요한복음의 예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는 예수다.(10:18)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진정한 메시야인 예수는 죽이고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은 일평생메시야를 기다리며 찾다가 그들의 죄를 사함받지 못한 채 죽을 뿐이다.
내가 가는 곳 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해서, 예수께서 가시는 천국에는 가지 못하는 것이다.
22:그가 자결 하려는가 전에는 “헬라인에게로 가려는가?” 라고 했는데(7:35), 지금은 “그가 자결하려는가?”라고 한다. 또 하나의 아이러니 이다. 조롱하면서 한 말이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나타낸다.
9장
7: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실로암(보냄을 받았다는 뜻) 못은 기혼샘(처녀의 우물)의 물을 끌어다가 만든 못으로, 길이가 53척, 넓이가18척, 깊이가 20척이 되었다. 그것은 초막절 때 제사장이 매일 물을 길었던 못으로, 요한복음의 예수는 바로 실로암(보냄 받은)예수였다. 생래적으로 죄인인 인간이 정결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실로암 되시는 예수께 와서 그 피에 죄를 씻는 일이다.
24: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가 그 소경을 고쳤음이 분명해졌는데도, 저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고 예수가 고친 것이 아니니,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라고 한다.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죄인은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기에, 이는 예수가 권능을 행사했음을 부인하는 말이다.
41: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자신들의 영적인 곤고함을 모르고 자만에 빠져 있으니, 그들의 죄는 그저 있는 것이다(계3:17). 병이 들었는데도 병든 줄을 모르면, 고칠 길이 없는 것이다.
10장
1-6: 목자와 양과의 관계 비유의 말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관계를 목자와 양과의 관계로 설명하신 것이다. 비유라 하지만, 엄격한 의미의 비유는 아니고, 우의적인 비유(알레고리)이다.
8:나보다 먼저 온 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같은 유대의 종교지도자 및 예수 이전에 온, 자신을 세상의 구주로 자처하는(5:43)모든 자를 가리킨다.
12:삯군 선한목자와 대조되는 자 이다. 그는 오로지 삯(자기 이익)에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 희생이나 고난을 거부한다.
17: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말씀의 뜻에 부합하는 정확한 번역은 “내가 목숨을 버리면, 내가 목숨을 다시 얻음이라”이다. 이는 그가 소유한 신적 능력을 강조한 것이고, 그의 자기 희생적인 순종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목숨을 버린다 해도 나는 다시 목숨을 얻게 된다(즉 부활케 된다)는 것이다.
18: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요한은 이를 특히 강조한다(5:30; 7:28; 8:28,42; 14:10). 그리하여 그는 공관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고뇌, 체포시 가룟 유다의 주도적 역할,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기운다는 언급들, 구레네 시몬이 대신 예수의 십자자가를 지고 감 등의 기사를 생략한다. 요한복음의 수난 예수의 의연하며(18:4-9), 왕자다운 예수이다. 그는 대제사장 앞에서도 의연하며(18:13-24), 빌라도 앞에서도 당당하다. 그는 운명의 순간 스스로 목숨을 아버지께 드리신다(19:30).
22:수전절 “새롭게 한 날”이란 뜻이다. 이는 “깨끗게 한 날”로도 불리운다.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는 성전에 제우스의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로 거기에 절하게 하였으며, 돼지를 잡아 그 피를 번제단에 바르는 등, 성전을 모독했다. 이에 마카비 형제들은 분기하여 수리아군을 격파하고 성전을 숙청하여 새롭게 한 뒤 하나님께 그 성전을 다시 봉헌했다.
11장
9: 실족하지 아니하고 예수께 저항하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초대교회는 예수를 걸림돌로 생각했다.(롬 9:22; 고전 1:23; 벧전 2:8). 예수께 저항하는 자는 예수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자 이다.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성서 중의 가장 짧은 절로서,그러나 이 절이 주는 의미는 깊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며, 인간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목마르셨고(4:7; 19:28), 피곤하셨으며(4:6), 주리셨고(마 4:2), 기뻐하셨으며(눅10:21), 근심하셨고(마3:5), 노여워하셨으며(막 3:5), 사랑하셨다(요 20:2).
12장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역시 “발아래 여인” 다운 마리아의 행위이다. “나드”는 인도 북쪽 지역에서 자라는 나드 나무에서 축출한 향유로서, “순전한 나드”는 섞인 것이 없는 100% 나드임을 나타낸다. 그러한 나
12: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시며, 신적인 지혜의 빛이다. 그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보는 것만이 아닌, 생명의 빛을 “얻는”축복을 받는다. 믿는 자가 가지는 이 내심(內心)의 빛은 흑암의 세상 길을 순력(巡歷)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넘어지지 않고 마치 대낮에 다니는 것처럼 다닐 수 있게 할 것이다.
21: 내가 가리니 요한복음의 예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는 예수다.(10:18)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진정한 메시야인 예수는 죽이고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은 일평생메시야를 기다리며 찾다가 그들의 죄를 사함받지 못한 채 죽을 뿐이다.
내가 가는 곳 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해서, 예수께서 가시는 천국에는 가지 못하는 것이다.
22:그가 자결 하려는가 전에는 “헬라인에게로 가려는가?” 라고 했는데(7:35), 지금은 “그가 자결하려는가?”라고 한다. 또 하나의 아이러니 이다. 조롱하면서 한 말이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나타낸다.
9장
7: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실로암(보냄을 받았다는 뜻) 못은 기혼샘(처녀의 우물)의 물을 끌어다가 만든 못으로, 길이가 53척, 넓이가18척, 깊이가 20척이 되었다. 그것은 초막절 때 제사장이 매일 물을 길었던 못으로, 요한복음의 예수는 바로 실로암(보냄 받은)예수였다. 생래적으로 죄인인 인간이 정결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실로암 되시는 예수께 와서 그 피에 죄를 씻는 일이다.
24: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가 그 소경을 고쳤음이 분명해졌는데도, 저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고 예수가 고친 것이 아니니,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라고 한다.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죄인은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기에, 이는 예수가 권능을 행사했음을 부인하는 말이다.
41: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자신들의 영적인 곤고함을 모르고 자만에 빠져 있으니, 그들의 죄는 그저 있는 것이다(계3:17). 병이 들었는데도 병든 줄을 모르면, 고칠 길이 없는 것이다.
10장
1-6: 목자와 양과의 관계 비유의 말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관계를 목자와 양과의 관계로 설명하신 것이다. 비유라 하지만, 엄격한 의미의 비유는 아니고, 우의적인 비유(알레고리)이다.
8:나보다 먼저 온 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같은 유대의 종교지도자 및 예수 이전에 온, 자신을 세상의 구주로 자처하는(5:43)모든 자를 가리킨다.
12:삯군 선한목자와 대조되는 자 이다. 그는 오로지 삯(자기 이익)에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 희생이나 고난을 거부한다.
17: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말씀의 뜻에 부합하는 정확한 번역은 “내가 목숨을 버리면, 내가 목숨을 다시 얻음이라”이다. 이는 그가 소유한 신적 능력을 강조한 것이고, 그의 자기 희생적인 순종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목숨을 버린다 해도 나는 다시 목숨을 얻게 된다(즉 부활케 된다)는 것이다.
18: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요한은 이를 특히 강조한다(5:30; 7:28; 8:28,42; 14:10). 그리하여 그는 공관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고뇌, 체포시 가룟 유다의 주도적 역할,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기운다는 언급들, 구레네 시몬이 대신 예수의 십자자가를 지고 감 등의 기사를 생략한다. 요한복음의 수난 예수의 의연하며(18:4-9), 왕자다운 예수이다. 그는 대제사장 앞에서도 의연하며(18:13-24), 빌라도 앞에서도 당당하다. 그는 운명의 순간 스스로 목숨을 아버지께 드리신다(19:30).
22:수전절 “새롭게 한 날”이란 뜻이다. 이는 “깨끗게 한 날”로도 불리운다.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는 성전에 제우스의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로 거기에 절하게 하였으며, 돼지를 잡아 그 피를 번제단에 바르는 등, 성전을 모독했다. 이에 마카비 형제들은 분기하여 수리아군을 격파하고 성전을 숙청하여 새롭게 한 뒤 하나님께 그 성전을 다시 봉헌했다.
11장
9: 실족하지 아니하고 예수께 저항하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초대교회는 예수를 걸림돌로 생각했다.(롬 9:22; 고전 1:23; 벧전 2:8). 예수께 저항하는 자는 예수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자 이다.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성서 중의 가장 짧은 절로서,그러나 이 절이 주는 의미는 깊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며, 인간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목마르셨고(4:7; 19:28), 피곤하셨으며(4:6), 주리셨고(마 4:2), 기뻐하셨으며(눅10:21), 근심하셨고(마3:5), 노여워하셨으며(막 3:5), 사랑하셨다(요 20:2).
12장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역시 “발아래 여인” 다운 마리아의 행위이다. “나드”는 인도 북쪽 지역에서 자라는 나드 나무에서 축출한 향유로서, “순전한 나드”는 섞인 것이 없는 100% 나드임을 나타낸다. 그러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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