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을 끝으로 영원할 줄 알았던 구로사와-미후네의 동반자 관계는 끝났다. 어느 인터뷰에서 미후네 도시로는 자신의 명성을 있게 해준 거인을 회상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출연한 120여 편 가운데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을 제외하면 자랑할 만한 영화는 하나도 없습니다.” 라고...
미후네 도시로는 1997년 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구로사와 아키라도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구로사와가 연출을 준비하고 있었던 영화 <비 온 후>는 남은 스탭들의 힘으로 완성됐다. <비 온 후>에는 미후네 도시로의 아들이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2) 음악의 하야사카 후미오.
① 주정뱅이 천사 : 갱스터인 미후네가 절망적 표정으로 암시장 지역을 걸어가는 신에서 울려나오는 뻐꾸기 왈츠는 일본영화에서 최초로 시도된 사운드-이미지의 대위법이다.
② 라쇼몽 : 라쇼몽의 볼레로도 이미지와 사운드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대표적인 영화.
구로사와와 함께 한 하야사카의 후속 작업은 일본영화에 가장 기억할 만한 음악들을 만들어낸다. 하야사카가 (산 자의 기록) 작곡 뒤 죽자 그의 제자 사토 마사루로 뒤를 이었다. 그도 헌신적으로 구로사와의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사토의 작품으로는 (요짐보)의 코믹한 곡들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이데 마사토, 오구니 히데오, 기쿠시마 류조, 하시모토 시노부, 히사이타 에이지로 등으로 구성된 시나리오팀, 촬영감독 나카이 아사카즈가 구로사와의 단골 스탭들이다.
(3) 과감한 편집기법
구로사와는 존 포드와 윌리엄 와일러가 발전시킨 할리우드 고전양식을 받아들였지만 그 나름의 스타일로 이 양식을 현대화시켰다. 롱 쇼트와 극단적인 클로즈 업을 이어붙이거나 망원렌즈로 찍은 평평한 느낌의 화면과 광각렌즈로 담은 깊이감 있는 화면을 한편의 영화 안에 무리 없이 공존시킨다. 화면을 차근차근 정교하게 이어붙이는 것 같으면서도 강세를 주기 위한 튀는 편집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고전적인 편집기법에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원리를 과감하게 응용해 발전시킨 수법이다. 장면 곳곳에 미세하지만 강력한 충돌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2. 라쇼몽과 7인의 사무라이
1)그의 영화의 특징
2) 라쇼몽
(1) 시대적 배경
헤이안시대
후지와라씨가 수도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지방에서는 무사(武士)들이 세력을 넓혀 갔다. 무사는 유력한 호족을 중심으로 하여 무리를 이루었으나 그 중에서 특히 힘이 강했던 것이 겐지(源氏)와 다이라(平氏)였다.
11세기 중반이 지나, 후지와라씨의 독점적인 힘이 약해지게 되었고, 시라카와(白河)천황은, 천황의 자리에서 내려와서도 상황(上皇)이 되어, 원(院)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원정(院政)을 계속하며,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섭정이나 관백은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다.
12세기 중엽, 상황과 천황의 대립이 일어나고, 그것이 후지와라씨 일족의 싸움과 연결되어, 각각 겐지씨와 다이라씨의 무사를 자기편으로 하여 수도를 중심으로 싸우게 된다. 이를 호우겐·다이지의 난(1156, 1159 保元·平治の亂)이라고 하며, 이때부터 무사들은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2) 아쿠타가와류노스케의 소설『の中』를 영화화한 \"라쇼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동경대 재학 중에 동인잡지「신사조」에 발표했던 『코』를, 소세키가 격찬해 문단에서 활약하게 된다. 왕조, 근세 초기의 크리스찬 문학, 에도시대의 인물·사건, 메이지의 문명개화기 등, 다양한 시대의 역사적 문헌에 소재를 취해, 스타일이나 문체를 구사한 많은 단편소설을 썼다. 체력의 쇠약과 「희미한 불안」으로부터 자살. 그 죽음은 다이쇼 시대 문학의 임종과 겹치고 있다. 대표작으로 「라쇼몽」「지옥변」「코」「토시
미후네 도시로는 1997년 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구로사와 아키라도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구로사와가 연출을 준비하고 있었던 영화 <비 온 후>는 남은 스탭들의 힘으로 완성됐다. <비 온 후>에는 미후네 도시로의 아들이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2) 음악의 하야사카 후미오.
① 주정뱅이 천사 : 갱스터인 미후네가 절망적 표정으로 암시장 지역을 걸어가는 신에서 울려나오는 뻐꾸기 왈츠는 일본영화에서 최초로 시도된 사운드-이미지의 대위법이다.
② 라쇼몽 : 라쇼몽의 볼레로도 이미지와 사운드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대표적인 영화.
구로사와와 함께 한 하야사카의 후속 작업은 일본영화에 가장 기억할 만한 음악들을 만들어낸다. 하야사카가 (산 자의 기록) 작곡 뒤 죽자 그의 제자 사토 마사루로 뒤를 이었다. 그도 헌신적으로 구로사와의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사토의 작품으로는 (요짐보)의 코믹한 곡들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이데 마사토, 오구니 히데오, 기쿠시마 류조, 하시모토 시노부, 히사이타 에이지로 등으로 구성된 시나리오팀, 촬영감독 나카이 아사카즈가 구로사와의 단골 스탭들이다.
(3) 과감한 편집기법
구로사와는 존 포드와 윌리엄 와일러가 발전시킨 할리우드 고전양식을 받아들였지만 그 나름의 스타일로 이 양식을 현대화시켰다. 롱 쇼트와 극단적인 클로즈 업을 이어붙이거나 망원렌즈로 찍은 평평한 느낌의 화면과 광각렌즈로 담은 깊이감 있는 화면을 한편의 영화 안에 무리 없이 공존시킨다. 화면을 차근차근 정교하게 이어붙이는 것 같으면서도 강세를 주기 위한 튀는 편집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고전적인 편집기법에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원리를 과감하게 응용해 발전시킨 수법이다. 장면 곳곳에 미세하지만 강력한 충돌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2. 라쇼몽과 7인의 사무라이
1)그의 영화의 특징
2) 라쇼몽
(1) 시대적 배경
헤이안시대
후지와라씨가 수도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지방에서는 무사(武士)들이 세력을 넓혀 갔다. 무사는 유력한 호족을 중심으로 하여 무리를 이루었으나 그 중에서 특히 힘이 강했던 것이 겐지(源氏)와 다이라(平氏)였다.
11세기 중반이 지나, 후지와라씨의 독점적인 힘이 약해지게 되었고, 시라카와(白河)천황은, 천황의 자리에서 내려와서도 상황(上皇)이 되어, 원(院)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원정(院政)을 계속하며,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섭정이나 관백은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다.
12세기 중엽, 상황과 천황의 대립이 일어나고, 그것이 후지와라씨 일족의 싸움과 연결되어, 각각 겐지씨와 다이라씨의 무사를 자기편으로 하여 수도를 중심으로 싸우게 된다. 이를 호우겐·다이지의 난(1156, 1159 保元·平治の亂)이라고 하며, 이때부터 무사들은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2) 아쿠타가와류노스케의 소설『の中』를 영화화한 \"라쇼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동경대 재학 중에 동인잡지「신사조」에 발표했던 『코』를, 소세키가 격찬해 문단에서 활약하게 된다. 왕조, 근세 초기의 크리스찬 문학, 에도시대의 인물·사건, 메이지의 문명개화기 등, 다양한 시대의 역사적 문헌에 소재를 취해, 스타일이나 문체를 구사한 많은 단편소설을 썼다. 체력의 쇠약과 「희미한 불안」으로부터 자살. 그 죽음은 다이쇼 시대 문학의 임종과 겹치고 있다. 대표작으로 「라쇼몽」「지옥변」「코」「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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