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920년대>
1. 시대개관
2. 문학적 특징
3. 대표 작가 및 작품 분석
4. 문학사적 의의
1. 시대개관
2. 문학적 특징
3. 대표 작가 및 작품 분석
4. 문학사적 의의
본문내용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성격 : 낭만적, 상징적, 저항적
* 제재 : 빼앗긴 땅에 찾아온 봄
* 특징 - 향토적 소재와 시어를 구사함
- 격정적인 호흡과 영탄적 어조를 사용함
- 시상의 흐름이 전후 관계에 따른 대칭구조를 보임
* 표현기법 : 상징(일제에 대한 우회적 고발 - 저항)
* 주제 : 봄의 환희 속에서 느껴지는 조국 상실의 비애, 조국 상실의 울분과 회복에의 염원, 국권 회복에의 염원과 의구심
* 출전 : 《개벽》(1926)
2) 박영희(朴英熙, 1901~?)-낭만주의시
호는 회월(懷月)송은(松隱). 서울 출생. 배재고보를 거쳐서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수학, 황석우와 함께 시동인지 의 《장미촌》을 발간하고(1921), 이듬해 《백조》동인이 되어 <미소의 허영시>,<환영의 황금탑>,<월광으로 짠 병실>등을 발표하여 낭만주의적인 탐미적 시인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곧 그러한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1925년에 《개벽》지에 단편소설 <사냥개>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속하게 되어 이 해에 김기진과 함께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를 조직,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 가담하여 그 지도적인 인물로서 극좌적 평론을 썼다.
그러나 1929년 이후 카프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기 시작, 카프 내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 대한 이론이 대립되자 1933년에 카프를 탈퇴하고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다시 예술주의로 복귀했다.
1939년에는 조선문인협회 간사가 된 후 일본 북지파견군(北支派遣軍)에 종군하고 요시무라라고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총무국장으로 친일문학 운동에 협력했다. 1950년에 납북된 이후 소식불명이다. 저서로는 《회월시초(懷月詩抄》(1937),《문학의 이론과 실제》(1947)가 있고 단편으로 <전투>,<피의 무대>,<사건>등이 있다.
3) 임화(林和, 1908~1953)-경향파 시
본명은 인식(仁植)이며, 서울 출생으로 보성고보에서 수학을 하였다. 1920년대 말기에 귀국. 학예사 주간을 거쳐 1925년 카프에 가입한 후 1935년까지 주요 맹원으로 활약. 카프 중앙위원회 서기장 역임. 문학의 예술성보다는 적극적인 현실성을 추구하여, 정치적 이념과 계급적 현실개혁에 문학을 복무시키고자 했다. 진보적 좌익의 이론 비평과 지도 비평에서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나, ‘우리 오빠와 화로’등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시작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광복 후 이태준, 오장환, 임학수 등과 함께 월북하여 문학가동맹, 조소문화협회 등에 관계하였으며, 남로당의 이승엽 등과 함께 간첩반당분자 혐의로 처형되었다. 시집으로는 《현해탄》,《찬가》,《회상시집》등이 있다.
작품 : <우리 오빠와 화로(火爐)>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 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 어린 몸을 잠그고 사 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야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우리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 웨--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밤에 /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 저는요 잘 알었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웨 그 날만 /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 천정을 향하야 기어올라가든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 그리하야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었을 동안에 /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 오빠--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의 일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뚫어트리고 /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 지금--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든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어요 /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모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었어요 /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 그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 저뿐이 사항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성격 : 낭만적, 상징적, 저항적
* 제재 : 빼앗긴 땅에 찾아온 봄
* 특징 - 향토적 소재와 시어를 구사함
- 격정적인 호흡과 영탄적 어조를 사용함
- 시상의 흐름이 전후 관계에 따른 대칭구조를 보임
* 표현기법 : 상징(일제에 대한 우회적 고발 - 저항)
* 주제 : 봄의 환희 속에서 느껴지는 조국 상실의 비애, 조국 상실의 울분과 회복에의 염원, 국권 회복에의 염원과 의구심
* 출전 : 《개벽》(1926)
2) 박영희(朴英熙, 1901~?)-낭만주의시
호는 회월(懷月)송은(松隱). 서울 출생. 배재고보를 거쳐서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수학, 황석우와 함께 시동인지 의 《장미촌》을 발간하고(1921), 이듬해 《백조》동인이 되어 <미소의 허영시>,<환영의 황금탑>,<월광으로 짠 병실>등을 발표하여 낭만주의적인 탐미적 시인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곧 그러한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1925년에 《개벽》지에 단편소설 <사냥개>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속하게 되어 이 해에 김기진과 함께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를 조직,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 가담하여 그 지도적인 인물로서 극좌적 평론을 썼다.
그러나 1929년 이후 카프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기 시작, 카프 내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 대한 이론이 대립되자 1933년에 카프를 탈퇴하고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다시 예술주의로 복귀했다.
1939년에는 조선문인협회 간사가 된 후 일본 북지파견군(北支派遣軍)에 종군하고 요시무라라고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총무국장으로 친일문학 운동에 협력했다. 1950년에 납북된 이후 소식불명이다. 저서로는 《회월시초(懷月詩抄》(1937),《문학의 이론과 실제》(1947)가 있고 단편으로 <전투>,<피의 무대>,<사건>등이 있다.
3) 임화(林和, 1908~1953)-경향파 시
본명은 인식(仁植)이며, 서울 출생으로 보성고보에서 수학을 하였다. 1920년대 말기에 귀국. 학예사 주간을 거쳐 1925년 카프에 가입한 후 1935년까지 주요 맹원으로 활약. 카프 중앙위원회 서기장 역임. 문학의 예술성보다는 적극적인 현실성을 추구하여, 정치적 이념과 계급적 현실개혁에 문학을 복무시키고자 했다. 진보적 좌익의 이론 비평과 지도 비평에서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나, ‘우리 오빠와 화로’등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시작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광복 후 이태준, 오장환, 임학수 등과 함께 월북하여 문학가동맹, 조소문화협회 등에 관계하였으며, 남로당의 이승엽 등과 함께 간첩반당분자 혐의로 처형되었다. 시집으로는 《현해탄》,《찬가》,《회상시집》등이 있다.
작품 : <우리 오빠와 화로(火爐)>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 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 어린 몸을 잠그고 사 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야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우리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 웨--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밤에 /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 저는요 잘 알었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웨 그 날만 /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 천정을 향하야 기어올라가든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 그리하야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었을 동안에 /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 오빠--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의 일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뚫어트리고 /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 지금--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든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어요 /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모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었어요 /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 그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 저뿐이 사항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