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시대개관
1) 정치 2) 경제 3) 문학사
2. 시문학
3. 소설
4. 희곡, 비평
5. 참고문헌
1) 정치 2) 경제 3) 문학사
2. 시문학
3. 소설
4. 희곡, 비평
5.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다. 이들이 주로 활동하던 극단은 [호화선, 황금좌, 고협, 아랑, 예술좌, 현대극장]등으로 대부분 신파연극을 주로 하는 극단이었다.
광복 후 해방소식이 전해지자 극작가, 연극인들은 재빨리 변화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8일 `조선문학건설본부`가 결성되었고 연극건설본부 또한 같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 공산 진영에 가담하기를 꺼리는 유치진, 이서구 등은 그들에게 배척되었고 이로써 연극계는 자연스럽게 좌익과 우익 진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특별히 좌익 진영에서도 극렬주의에 속하던 나웅 ,강호, 김욱등은 그 진영을 떠나 별도로 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을 결성한다. 이로써 연극계는 세 갈래로 분열상을 띄게 되었다. (좌익, 우익, 프롤레타리아)
2) 희곡의 일반적 경향
이 시기에 작품을 발표한 극작가를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첫 번째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의식적으로 폭로하며 민족적 울분을 발산시키려는 적극적 울분파가 있었고 두 번째는 자신의 친일적 작가 경력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없애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하려는 편승파.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지금까지의 무명 시대에서 도약하여 새로운 실권자가 되기 위한 영웅주의자가 존재했다.
이처럼 해방직후부터 일이 년 사이의 전반기 희곡은 그 대부분이 일본 제국주의의 죄악상을 폭로하거나 어두웠던 독립운동의 이면사를 그리는 과정에서 절규하는 작품 또는 회고적이거나 감상주의적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역사극이 대부분이다. 많은 희곡작품이 탄생했지만 작품들의 경향이 단적으로 감격과 흥분 단순히 감정의 분출 또는 일제에 대한 복수 감정이나 회고적이며 피해의식을 되도록 미화하고 그것으로 자기만족을 이룩하려 했던 당시 극작가들의 속성을 엿볼 수 있다.
또 이런 상황 속 줄곧 침묵을 지켜왔던 유치진이 연극계의 조직화된 우익 세력을 탄생시키게 되는데 이는 해방 전 극단에서 친일적인 작품(북진대, 흑룡강)을 발표했던 죄책감으로 침묵을 지켜왔던 그가 주변의 사태와 정치적 판도에서 민족진영 연극 진영 확보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에 연극동맹 세력과 정면으로 대결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이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에 남로당 등 좌익정당이 불법화 되자 많은 좌익 예술가, 작가들은 월북 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해방 이후 극작가의 활동 상황도 모습을 달리하였는데 활발한 활동을 보인 인물로는 유치진, 주로 시사성을 꾸미던 김영수, 민족정신 정취나 한국적 해학성을 성공적으로 구축한 오영진, 신파연극을 대표하던 김춘광이 있다.
5년간 발표된 작품들에 대한 종합적 평가로는
(1) 해방에 대한 기쁨이 너무 커 즉흥적인 발상이나 정리되지 않은 상태의 감정만 표현했다는 의견
(2) 약소민족이라는 우리 취약점을 오히려 미화시키고 당연시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했다는 의견
(3) 복수, 절규 등 일차원적인 소재 나열에만 그친 점
(4) 40년만에 찾아온 자유, 민주주의를 관념적인 우희나 남용으로 상식화 해 버린점
(5) 전근대적인 초기 자연주의적 표현에 급급한 나머지 새로운 역사의식에 대해 자각을 하지 못한 점
(6) 역사의식 사회의식에 눈을 못뜬 채 대본 작성에 한계를 두었던 점
소설, 시와 다르게 관객과 마주할 수 있는 희곡이란 장르 속에서 진솔한 민족적 목소리를 내지 못한 점이 해방 후의 희곡문학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3) 해방 문단의 비평사
(1) 해방 1기 좌익 전횡기 (1945.8~1947.2)
임화, 김남천 등이 조직한 조선문학건설본부 즉 문건과 이기영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예맹은 서로 공산당의 승인을 획득하기 위해 암투를 계속했는데 그러던 중 문건이 예맹을 흡수하면서 1946년 2월 문학가동맹 즉 문맹이 결성되었다.
<문학, 문학전선 신문학 예술신문 상아탑>등을 지휘하는가 하면 또 전국문학자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동안 문맹이 문단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이태준, 정지용, 이병기 등 좌익에 반대하던 문인들이 문맹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좌익의 활발한 활동에 초조함을 느낀 우익은 김동리 서정주 조지훈을 중심으로 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했으나 대세는 좌익이였다. 결론적으로 해방 1기 시대 주된 관심 테마는 해방 문단의 당면 문제를 규정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였다.
(2) 해방 2기 좌우익 논쟁기 (1947.2~1948.8)
문맹의 구성원에 구 문건파가 특세함에 구 예맹파의 이기영 한설야 한효 등은 월북하여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을 결성한다. 이어 이태준, 임화, 오장환 마저 월북을 하면서 좌익 진영의 세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많은 신문과 잡지들이 아직 문맹의 지휘 하에 존재했지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 사실되면서 문맹에 가담했었던 정지용 김기림 등 마저 전향 성명을 발표하면서 좌익 세력의 혼란된 모습이 계속됐다. 좌우익의 논쟁은 갈수록 치열해져 가고 그 양상 또한 복잡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듯 해방 2기 시대는 좌익과 우익의 대결 구도로 이루어진 시대라고 볼 수 있겠다.
(3) 해방 3기 우익 정착기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 좌익 인물들의 대거 월북, 전향 등으로 인해 좌익의 기세는 현저히 약화되어가고 있었다. 세계관과 문학관을 위해서 활발했던 해방 이후의 비평 활동은 이 무렵 논쟁의 열기를 읽고 기초적인 문제로 귀향하게 되는데 좌익이 약해지면서 상대적으로 강해진 우익은 문화적 최우선 과제를 공산주의 박멸에 두고 그 구체적 방안으로 선전 계몽 정책의 수립 조직의 간소화 법령의 정비 등의 방안을 제시하게 된다.위와 같이 해방 3기 시대는 앞선 1기 2기와 다르게 우익 세력들이 핵심으로 정착하게 되며 새로운 방향으로 문학사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5. 참고문헌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2, 인물과 사상사, 2008
권영민, 「한국 현대문학사」, 민음사, 2002
김윤식, 「한국 현대문학사」, 현대문학, 1989
이건제, 「한국 근현대 문학의 모더니티」, 선인, 2014
한강희, 「우리 근현대 문학의 맥락과 쟁점」, 태학사, 2011
정찬영, 「한국 근현대문학의 재인식」, 세종, 2011
송희복, 「문학의 미시담론」, 푸른사상, 2014
광복 후 해방소식이 전해지자 극작가, 연극인들은 재빨리 변화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8일 `조선문학건설본부`가 결성되었고 연극건설본부 또한 같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 공산 진영에 가담하기를 꺼리는 유치진, 이서구 등은 그들에게 배척되었고 이로써 연극계는 자연스럽게 좌익과 우익 진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특별히 좌익 진영에서도 극렬주의에 속하던 나웅 ,강호, 김욱등은 그 진영을 떠나 별도로 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을 결성한다. 이로써 연극계는 세 갈래로 분열상을 띄게 되었다. (좌익, 우익, 프롤레타리아)
2) 희곡의 일반적 경향
이 시기에 작품을 발표한 극작가를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첫 번째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의식적으로 폭로하며 민족적 울분을 발산시키려는 적극적 울분파가 있었고 두 번째는 자신의 친일적 작가 경력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없애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하려는 편승파.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지금까지의 무명 시대에서 도약하여 새로운 실권자가 되기 위한 영웅주의자가 존재했다.
이처럼 해방직후부터 일이 년 사이의 전반기 희곡은 그 대부분이 일본 제국주의의 죄악상을 폭로하거나 어두웠던 독립운동의 이면사를 그리는 과정에서 절규하는 작품 또는 회고적이거나 감상주의적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역사극이 대부분이다. 많은 희곡작품이 탄생했지만 작품들의 경향이 단적으로 감격과 흥분 단순히 감정의 분출 또는 일제에 대한 복수 감정이나 회고적이며 피해의식을 되도록 미화하고 그것으로 자기만족을 이룩하려 했던 당시 극작가들의 속성을 엿볼 수 있다.
또 이런 상황 속 줄곧 침묵을 지켜왔던 유치진이 연극계의 조직화된 우익 세력을 탄생시키게 되는데 이는 해방 전 극단에서 친일적인 작품(북진대, 흑룡강)을 발표했던 죄책감으로 침묵을 지켜왔던 그가 주변의 사태와 정치적 판도에서 민족진영 연극 진영 확보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에 연극동맹 세력과 정면으로 대결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이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에 남로당 등 좌익정당이 불법화 되자 많은 좌익 예술가, 작가들은 월북 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해방 이후 극작가의 활동 상황도 모습을 달리하였는데 활발한 활동을 보인 인물로는 유치진, 주로 시사성을 꾸미던 김영수, 민족정신 정취나 한국적 해학성을 성공적으로 구축한 오영진, 신파연극을 대표하던 김춘광이 있다.
5년간 발표된 작품들에 대한 종합적 평가로는
(1) 해방에 대한 기쁨이 너무 커 즉흥적인 발상이나 정리되지 않은 상태의 감정만 표현했다는 의견
(2) 약소민족이라는 우리 취약점을 오히려 미화시키고 당연시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했다는 의견
(3) 복수, 절규 등 일차원적인 소재 나열에만 그친 점
(4) 40년만에 찾아온 자유, 민주주의를 관념적인 우희나 남용으로 상식화 해 버린점
(5) 전근대적인 초기 자연주의적 표현에 급급한 나머지 새로운 역사의식에 대해 자각을 하지 못한 점
(6) 역사의식 사회의식에 눈을 못뜬 채 대본 작성에 한계를 두었던 점
소설, 시와 다르게 관객과 마주할 수 있는 희곡이란 장르 속에서 진솔한 민족적 목소리를 내지 못한 점이 해방 후의 희곡문학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3) 해방 문단의 비평사
(1) 해방 1기 좌익 전횡기 (1945.8~1947.2)
임화, 김남천 등이 조직한 조선문학건설본부 즉 문건과 이기영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예맹은 서로 공산당의 승인을 획득하기 위해 암투를 계속했는데 그러던 중 문건이 예맹을 흡수하면서 1946년 2월 문학가동맹 즉 문맹이 결성되었다.
<문학, 문학전선 신문학 예술신문 상아탑>등을 지휘하는가 하면 또 전국문학자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동안 문맹이 문단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이태준, 정지용, 이병기 등 좌익에 반대하던 문인들이 문맹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좌익의 활발한 활동에 초조함을 느낀 우익은 김동리 서정주 조지훈을 중심으로 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했으나 대세는 좌익이였다. 결론적으로 해방 1기 시대 주된 관심 테마는 해방 문단의 당면 문제를 규정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였다.
(2) 해방 2기 좌우익 논쟁기 (1947.2~1948.8)
문맹의 구성원에 구 문건파가 특세함에 구 예맹파의 이기영 한설야 한효 등은 월북하여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을 결성한다. 이어 이태준, 임화, 오장환 마저 월북을 하면서 좌익 진영의 세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많은 신문과 잡지들이 아직 문맹의 지휘 하에 존재했지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 사실되면서 문맹에 가담했었던 정지용 김기림 등 마저 전향 성명을 발표하면서 좌익 세력의 혼란된 모습이 계속됐다. 좌우익의 논쟁은 갈수록 치열해져 가고 그 양상 또한 복잡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듯 해방 2기 시대는 좌익과 우익의 대결 구도로 이루어진 시대라고 볼 수 있겠다.
(3) 해방 3기 우익 정착기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 좌익 인물들의 대거 월북, 전향 등으로 인해 좌익의 기세는 현저히 약화되어가고 있었다. 세계관과 문학관을 위해서 활발했던 해방 이후의 비평 활동은 이 무렵 논쟁의 열기를 읽고 기초적인 문제로 귀향하게 되는데 좌익이 약해지면서 상대적으로 강해진 우익은 문화적 최우선 과제를 공산주의 박멸에 두고 그 구체적 방안으로 선전 계몽 정책의 수립 조직의 간소화 법령의 정비 등의 방안을 제시하게 된다.위와 같이 해방 3기 시대는 앞선 1기 2기와 다르게 우익 세력들이 핵심으로 정착하게 되며 새로운 방향으로 문학사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5. 참고문헌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2, 인물과 사상사, 2008
권영민, 「한국 현대문학사」, 민음사, 2002
김윤식, 「한국 현대문학사」, 현대문학, 1989
이건제, 「한국 근현대 문학의 모더니티」, 선인, 2014
한강희, 「우리 근현대 문학의 맥락과 쟁점」, 태학사, 2011
정찬영, 「한국 근현대문학의 재인식」, 세종, 2011
송희복, 「문학의 미시담론」, 푸른사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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