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우리글 - 사미인곡 용부가 시조 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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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말우리글 - 사미인곡 용부가 시조 판소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사미인곡
1-1.작가의 생애
1-2.작품 분석
1-3.작품 분석
Ⅱ. 용부가
2-1.작품 해석
2-2.당대 문학사의 특징
2-3.작품분석
2-4.시어,시구 풀이
2-5. 작품에 대한 의견,비평
Ⅲ. 시 조
3-1. 우 탁 <禹 倬>
3-2. 이 조 년 <李 兆 年>
3-3. 김 종 서 <金 宗 瑞>
3-4. 성 종 <成 宗>
3-5. 정 철 <鄭 澈>
3-6. 임 제 <林 弟>
3-7. 이 항 복 <李 恒 福>
3-8.박 태 보 <朴 泰 輔>
3-9.이 정 보 <李 鼎 輔>
3-10.황 진 이 <黃 眞 伊>
3-11.오 경 화 <吳 擎 華>
3-12.무명씨
3-13.장진주사
3-14.당대 시조의 특징
Ⅳ. 흥보가
4-1.작품 분석
4-2.작품 해석
4-3.작가의 생애

본문내용

신농씨 꿈에 보아 불끌 약 물어보니
충절과 강개로 난 불이니 끌 약 없다 하더라.
3-8-2.작가의 생애
본관 반남, 자 사원(士元), 호 정재(定齋), 시호 문열(文烈), 중추부판사 세당(世堂)의 아들이다. 1675년(숙종 1) 사마시를 거쳐, 1677년 알성문과에 장원, 전적(典籍)을 지냈다. 예조좌랑(佐郞)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하였다는 남인(南人)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80년 수찬(修撰)을 지내고 2년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거쳐 교리, 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를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서인(西人)을 대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廢位)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진도(珍島)에 유배 도중 노량진(鷺梁津)에서 죽었다.
학문과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으며, 비리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의리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영의정이 추증, 풍계사(豊溪祠)에 배향되었다. 문집 《정재집》 14권, 편서 《주서국편(周書國編)》, 글씨 〈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 〈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3-9.이 정 보 <李 鼎 輔>
3-9-1.현대어 수정
묻노라 불나비야 너의 뜻을 내 알 수 없구나.
한 나비가 죽은 후에 또 한 나비 연달아 따라오니
아무리 미물의 짐승인들 너 죽을 줄을 모른단 말이냐.
3-9-2.작가의 생애
본관 연안(延安). 자 사수(士受). 호 삼주(三洲) ·보객정(報客亭). 시호 문간(文簡). 1721년(경종 1) 진사에 합격하고 1732년(영조 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736년 지평(持平) 때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時務十一條)를 올려 파직되었다.
1737년 부수찬(副修撰)으로 재기용되어 부제학(副提學) ·대사간 ·대사성(大司成) ·승지(承旨)를 지냈고, 1750년 재차 탕평책을 반대하여 인천부사(仁川府使)로 좌천되었다. 그 후 우빈객(右賓客)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어 유림의 몰락을 한탄하고 김원행(金元行) ·송명흠(宋明欽) 등 선비를 기용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성균관지사(成均館知事) ·예조판서 등을 거쳐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가 되었다. 글씨와 한시(漢詩)에 능하고 시조의 대가로서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3-10.황 진 이 <黃 眞 伊>
3-10-1.현대어 수정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가운데를 베어내여
봄바람처럼 따듯한 이불 속에 차곡차곡 넣었다가
정든 님이 추위에 얼어 오시는 밤이면
굽이굽이 펼쳐내어 그 밤이 오래오래 새게 이으리라
3-10-2.작품해석
찬바람 휘몰아치는 동짓달 기나긴 밤 사모친 마음으로 님을 생각하며 애뜻한 연모의 정을 그리는 황진이의 애련연정가 이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황진이의 모습을 이 시조에서 볼 수 있다.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 그 날의 밤 시간 중에 한 허리를 칼로 벤다. 그것을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속에 넣어두었다가 님이 오신 밤이면 꺼낼 것이다. 님과 함께하는 밤이 얼마나 짧다는 생각이 들었겠는가. 그러니 가장 길다는 동지의 밤시간을 짤라 님과 함께하는 밤에 펼쳐 님과의 밤을 더욱 길게 만들겠다는 생각. 황진이다운 생각이다.
백호 임제가 과거에 급제하여 평양으로 벼슬살이 길을 가다 송도 어귀에서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 한잔을 따르며 노래했다고 한다.
3-10-3.작가의 생애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文人)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滿月臺懷古詩)》《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영초월시(初月詩)》 등이 있다.
※황진이(黃眞伊)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의 기생이었다.그러나 그녀의 정확한 생존연대 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녀가 1520년대에 나서 1560년대쯤에 죽었을 것이라는 것만, 진이 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또 진이의 출자(出自)가 황진사의 서녀라 고 전해져 있지만, 그녀는 개성의 아전진(陳)가에서 기녀의 몸을 빌어 태어났다는 것과 그녀의 기명이 명월(明月)인 것만은, 종실 벽계수(碧溪守)와의 수응에서 확실한 것 같다. 당시만 하 여도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 원칙의 불의 속에 서 태어나 관원 남성들의 노리개 거리로 존재한 해어화(解語花)인 진이가 왜 이렇게 유명하고 신화적(神話的) 조명까지 받아왔는가? 그 원리는 간단하다. 당시, 사랑을 할 수 있는 장(場)은 기방(妓房)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정신적인 세계에 머물지 않고 육감적(肉感的)인 한에 있어서는 그녀의 미모와 지성 은 그런 전설을 불러일으킨 진원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그런 것을 초월 해서 전국민의 애인이 되었는데, 그 한몫을 진이의 전설을 부연한 문인과 소설가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 다.
3-11.오 경 화 <吳 擎 華>
3-11-1.현대어 수정
꾀꼬리 우는 소리에 낮잠을 깨어 일어나 보니
작은 아들은 글을 읽고 며느리는 베를 짜는데 어린 손자는 꽃놀이를 한다.
때마침 아내는 술을 거르며 맛보라고 하더라
3-11-2.시어,시구 풀이
곡구롱 : 꾀꼬리 우는 소리
이러 보니 : 일어나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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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3.30
  • 저작시기2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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