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정의란
2.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3. 칸트의 정의론
4. 존 롤스의 정의론
5. 우리 사회의 정의
6. 우리 사회의 정의 존재의 근거
7. 우리 사회의 도덕성, 윤리성의 재정립
Ⅲ. 결론
참고문헌
Ⅱ. 본론
1. 정의란
2.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3. 칸트의 정의론
4. 존 롤스의 정의론
5. 우리 사회의 정의
6. 우리 사회의 정의 존재의 근거
7. 우리 사회의 도덕성, 윤리성의 재정립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선수를 독점함으로써 팀간 실력차가 너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유명선수들은 계약자유의원칙을 규정한 기본권 침해라고 반대하고 있다. 국내 프로농구의 경우 매 시즌마다 물가인상 등을 고려하여 총액을 바꿀 수 있으며, 후보 선수들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하여 최저 연봉액을 정하였다. 재계약시 인상폭은 제한하지 않으나 삭감폭을 10% 이내로 한정하여 선수들의 불안감을 줄였다. 연봉총액에는 외국인 용병선수 2명의 연봉액도 포함되며 국내선수 보호를 위하여 용병의 최고연봉이 국내선수 최고연봉을 넘지 않도록 하였다.
제도를 생각해 보면 되겠다. 이는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것을 제공하고 나머지를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준다는 롤스의 배분적 정의가 잘 나타나는 제도이다.
5. 우리 사회의 정의
우리는 지금 정의에 대해 갈망하고 비하적으로 말하면 정의에 환장하고 있다고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마이클 샌델의 열풍을 볼 수 있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은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책을 정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실제로 주변 사람에게 마이클 센델이 책을 읽었는지 물어봤을 때 책을 사놓고 읽지 못했다는 대답을 많이 들을 수 있다. 이는 정의에 관한 관심은 많지만,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어려운 책과 골치 아픈 이야기까지 들을 여유는 없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유행한 레미제라블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과 고루한 이야기, 생소한 형식의 영화지만 이 영화는 우리 사회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이는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 안에 우리에게 없는 정의에 관한 이야기가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최근 우리 사회에 일어난 몇몇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고 책이나 영화를 통해 힐링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최근 실시한 ‘당신은 대한민국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설문에 놀랍게도 70% 이상이 ‘아니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똑같은 질문을 미국인에게 했을 때 60% 이상의 미국인이 ‘정의롭다’라고 대답한 것을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사람들 절대다수가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무엇이 정의롭지 못한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약자에게 너무 가혹한 세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자에게 관용적이고 윤리 도덕 법을 어겨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없는 사람들은 조금만 실수해도 큰 징벌이 내려지는 것들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또는 실직을 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들은 너무나 힘들게 사는 반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소비하는 것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2008년 UCLA에서 실험한 결과 동물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줬을 때 대뇌가 활성화되지만 인간에게는 음식이 아닌 정의로운 모습을 볼 때, 또는 공평한 모습을 볼 때 대뇌가 제일 활발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만큼 인간에게 정의는 생명과 같이 중요한 의미이며 정의롭지 않은 것을 참지 못하고 자살까지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처럼 정의는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이념이고 갈망하고 환장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몇 해 전 우리나라는 박근혜와 문재인 후보의 대통령 선거를 두고 정의의 한판 대결이 있었다.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롭다고 주장했으며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비난했다. 좌파, 종국이란 용어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반면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을 정의롭지 못하다 비난했다. 수국 꼴통이란 용어를 써가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정의가 승리한 것일까? 아니면 정의가 패배한 것일까?
이러한 정의와 정의가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상황에 필요한 것은 바로 절차일 것이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절차적 정의 존 롤스: 공정한 게임의 법칙, 절차적 정의 소수자와 약자가 정당하다고 여긴다면 정의로운 사회일 것이다. 또한, 정당한 불평등을 허용할 수 있는 방법이 절차적 정의이다. 게임이 법칙 즉 절차가 공정하다면 그 결과도 공평하다.
, 즉 절차만 공정하다면 결과는 정의로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박근혜후보가 당선되든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든 그 과정만 공정하다면 자신의 이념과 신념에 맞는 공약을 내세우고 우리 국민 다수가 선택한 공약이 정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가 끝났을 때 우리는 패자에게는 위로를 승자에게는 박수를 쳐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를 불의라고 보기 때문에 박수 쳐 줄 수 없으며 위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국정원 게이트 2017년 밝혀진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 및 이명박 정부부터의 국가정보원 대북공작금 유용 사건
를 보자. 절차적 정의의 측면에서 본다면 누가 반칙을 하고 누가 잘못을 했는지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은 심판으로서 경기가 공정하게 진행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 경기가 공평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아주 핵심적인 반칙이 이루어 졌음에도 패널티가 없이 그냥 지나가 버린다면 우리는 분노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워터게이트사건을 보자. 이 사건을 하나로 재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은 스스로 사임하고 물러났다. 그렇지만 이후 미국의 공화당과 보수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는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들어내고 밝혀 주는 것이 후대를 위해서 공정하다는 인식을 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6. 우리 사회의 정의 존재의 근거
무엇이 우리 사회의 정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정의의 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정의의 신은 무죄의 장막 뒤에서 자신이 결정으로 무엇을 얻게 될지, 나의 결정이 내 주위의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택해야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검사는 자신의 동료인 검사의 비리를 조사하고 판사는 자신의 동료인 판사의 비리를 처벌한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친인척을 감싸려 한다.
이러한 우리의 절차적 정의를 가로막고 있는 지역주의와 연고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우리 편이라서가 아니라 옳은 것을
제도를 생각해 보면 되겠다. 이는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것을 제공하고 나머지를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준다는 롤스의 배분적 정의가 잘 나타나는 제도이다.
5. 우리 사회의 정의
우리는 지금 정의에 대해 갈망하고 비하적으로 말하면 정의에 환장하고 있다고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마이클 샌델의 열풍을 볼 수 있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은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책을 정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실제로 주변 사람에게 마이클 센델이 책을 읽었는지 물어봤을 때 책을 사놓고 읽지 못했다는 대답을 많이 들을 수 있다. 이는 정의에 관한 관심은 많지만,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어려운 책과 골치 아픈 이야기까지 들을 여유는 없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유행한 레미제라블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과 고루한 이야기, 생소한 형식의 영화지만 이 영화는 우리 사회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이는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 안에 우리에게 없는 정의에 관한 이야기가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최근 우리 사회에 일어난 몇몇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고 책이나 영화를 통해 힐링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최근 실시한 ‘당신은 대한민국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설문에 놀랍게도 70% 이상이 ‘아니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똑같은 질문을 미국인에게 했을 때 60% 이상의 미국인이 ‘정의롭다’라고 대답한 것을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사람들 절대다수가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무엇이 정의롭지 못한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약자에게 너무 가혹한 세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자에게 관용적이고 윤리 도덕 법을 어겨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없는 사람들은 조금만 실수해도 큰 징벌이 내려지는 것들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또는 실직을 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들은 너무나 힘들게 사는 반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소비하는 것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2008년 UCLA에서 실험한 결과 동물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줬을 때 대뇌가 활성화되지만 인간에게는 음식이 아닌 정의로운 모습을 볼 때, 또는 공평한 모습을 볼 때 대뇌가 제일 활발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만큼 인간에게 정의는 생명과 같이 중요한 의미이며 정의롭지 않은 것을 참지 못하고 자살까지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처럼 정의는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이념이고 갈망하고 환장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몇 해 전 우리나라는 박근혜와 문재인 후보의 대통령 선거를 두고 정의의 한판 대결이 있었다.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롭다고 주장했으며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비난했다. 좌파, 종국이란 용어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반면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을 정의롭지 못하다 비난했다. 수국 꼴통이란 용어를 써가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정의가 승리한 것일까? 아니면 정의가 패배한 것일까?
이러한 정의와 정의가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상황에 필요한 것은 바로 절차일 것이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절차적 정의 존 롤스: 공정한 게임의 법칙, 절차적 정의 소수자와 약자가 정당하다고 여긴다면 정의로운 사회일 것이다. 또한, 정당한 불평등을 허용할 수 있는 방법이 절차적 정의이다. 게임이 법칙 즉 절차가 공정하다면 그 결과도 공평하다.
, 즉 절차만 공정하다면 결과는 정의로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박근혜후보가 당선되든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든 그 과정만 공정하다면 자신의 이념과 신념에 맞는 공약을 내세우고 우리 국민 다수가 선택한 공약이 정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가 끝났을 때 우리는 패자에게는 위로를 승자에게는 박수를 쳐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를 불의라고 보기 때문에 박수 쳐 줄 수 없으며 위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국정원 게이트 2017년 밝혀진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 및 이명박 정부부터의 국가정보원 대북공작금 유용 사건
를 보자. 절차적 정의의 측면에서 본다면 누가 반칙을 하고 누가 잘못을 했는지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은 심판으로서 경기가 공정하게 진행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 경기가 공평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아주 핵심적인 반칙이 이루어 졌음에도 패널티가 없이 그냥 지나가 버린다면 우리는 분노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워터게이트사건을 보자. 이 사건을 하나로 재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은 스스로 사임하고 물러났다. 그렇지만 이후 미국의 공화당과 보수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는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들어내고 밝혀 주는 것이 후대를 위해서 공정하다는 인식을 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6. 우리 사회의 정의 존재의 근거
무엇이 우리 사회의 정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정의의 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정의의 신은 무죄의 장막 뒤에서 자신이 결정으로 무엇을 얻게 될지, 나의 결정이 내 주위의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택해야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검사는 자신의 동료인 검사의 비리를 조사하고 판사는 자신의 동료인 판사의 비리를 처벌한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친인척을 감싸려 한다.
이러한 우리의 절차적 정의를 가로막고 있는 지역주의와 연고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우리 편이라서가 아니라 옳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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