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시
1. 민요, 개화가사, 개화시조
2. 애국가, 창가, 신체시
Ⅲ. 소설
1. 역사전기소설 , 시사토론체소설
2. 한문, 몽유록계 소설
3. 신소설
Ⅳ. 결론
Ⅱ. 시
1. 민요, 개화가사, 개화시조
2. 애국가, 창가, 신체시
Ⅲ. 소설
1. 역사전기소설 , 시사토론체소설
2. 한문, 몽유록계 소설
3. 신소설
Ⅳ. 결론
본문내용
형식을 띠고 있는데, 당시에는 <독립신문>의 독자 측에 국한되어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부르주아 계급이 말하고자 했던 주된 내용은 부국강병이다. 즉, 반봉건, 문명개화, 반외세, 그리고 자주독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봉건사회와 연결된 탯줄을 끊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근대적 자유 민권을 지향하지만 봉건제도나 규범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개화 가사의 내용과 형식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로 개화가사를 다루고 있는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중에서 먼저 독립신문은 4.4.조로 율문형식과 함께 부분적인 형태 변화를 보여줬다. 전체내용은 몇 개의 연으로 구분하고 각 연 말미에 동일한 시구를 반복하는 형태였다. 예를 들어보면 「구약종자」나 「월하청요」를 보면 각 연의 마지막 구절에서 동일 어구를 반복하는 형태를 볼 수 있고, 특히 10연으로 구성된 「구약종자」는 문명개화를 가로막는 다양한 사회세력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보여 지는 장과 연의 구분은 내용의 조직적 전개와 주제의 통일성 확립, 주제 내용을 강조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부터 1909년 사이에 ‘사회등’란을 만들어 가사를 실었는데, 서사적 요소와 비판적 견해를 내세우거나 주관적인 감회를 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통감부 정치가 실시되던 시기에 발표되어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을 위주로 하는 시사 단평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국권의 회복이나 일본, 그리고 친일파세력을 비판, 풍자하는 소재와 각 사회단체나 학회의 집단이기주의적인 행태에 대한 비판 등을 주소재로 삼았다. 예를 들어 <권고현 내각>이나 <권고각학회>는 제목에서 보이듯 각 학회나 내각을 비판하는 한편 그들이 본래의 사명을 자각하고 충군애국에 힘쓰기를 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화가사는 현실의 제반 모순은 비판하는 한편 문명개화를 막는 주체적인 요인들에 대해서도 냉정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 창가의 추상적인 낙관주의에 비해 더 구체적인 현실 반영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화가사의 내용은 대부분 개신유학적인 문명개화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방책 역시도 부국강병책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비판의 수준역시 현상적인 사실의 나열과 교훈적 진술을 덧붙이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 특히 ‘동도서기론’의 세계관적인 한계를 보여주는데, 동도서기론 자체가 온전한 세계관이라기보다는 절충적 성격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전망의 부재상태로 빠지게 만들었다. 위와 같은 한계로 인해 개화가사는 한일합방을 고비로 하여 소멸되어버린다. 더 이상의 형식의 발전이나 새로운 전망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급격히 도태되어 간 것이다. 김재용 외 3명, op.cit., p141
3) 개화시조
다음은 개화 시조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개화시조는 종장의 종결어미 ‘이노라’, ‘하노라’를 생략한 것과 초장 또는 초,중장을 고시조에서 따온 후 나머지를 바꿔 부르는 식의 고시조를 패러디했다는 형식이자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개화시조의 등장은 주로 신문이나 잡지에 수록 되면서 시작 되었는데, 1908년의 대한매일신보의 ‘사조’란을 통해 발표된 250편이 대표적이다. 그 이외에도 1906년의 <국민신보>와 <대한민보> 그리고 잡지 <청춘>과 <소년>에도 일부 시조가 등장했다. 시조를 쓴 작가는 주로 보수적인 유학자였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제목은 있지만 단형시조 형식을 갖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일부 작가표시가 된 시조는 ‘개세자’, ‘지아생’, ‘선봉청년’ 등의 익명을 사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앞에서 오래 설명했듯이 시조는 창곡과 분리되었다는 중요한 변화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조창은 여전히 존속되어있었기 때문에 개화기 시조는 읽혀지면서 시로서 새로운 시의 장르를 재창조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개화시조에는 제목이 붙여졌다는 것이 주목할 부분이다. 작품의 주제 내용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시켜 암시하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흔치 않았다. 창곡을 불렀던 당시에는 곡조의 명칭에 따라 분류했기 때문인데, 개화기의 시조는 가창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시조의 연작 실험에 대해 살펴보겠다. 앞선 설명처럼 형식적 변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에 대한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최남선의 창작적 실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최남선은 3장 분장의 형태적인 정형성을 지키면서 단형시조의 특성보다 연시조를 널리 창작했다. 이것은 시적 주제의 압축, 긴장보다 시적의미를 확대하고자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데, 이는 반복적인 시적 율격에도 용이했다. 시조의 단형적인 형태가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고 시적 의미를 확대할 수 있는 장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연작성은 현대시조의 형식적인 특성으로 자리 잡은 가장 중요한 형태적인 요소이지만, 다음과 같은 개화시조의 연작 실험은 시조의 기품과 특유의 균제미를 이완시킬 우려도 없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1』, 민음사, 2002, pp173~176
2. 애국가 창가 신체시
1)애국가
“애국가”란 창가, 개화가사, 신체시와 함께 개화기 시가의 엄밀한 분석에 의한 유형들 중 한가지로서, 이 유형은 신체시의 전단계로 창가나 개화 가사 중 어느 하나에다 통칭하기도 하며 개화시 또는 개화가라는 새 장르를 형성한다.
개항 이래 밀려드는 서구 문학의 유입과 함께 빚어진 신·구(新·舊)의 갈등적 상황에서 신시가 문학이 형성되었는데, 이때 ‘신시가 문학’이란 용어가 아닌 ‘개화기의 시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시가 문학은 개화사상이나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했거나, 아니면 구세력 내지 외세에 교묘히 편승하여 매국하려는 아첨배들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을 구가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이때 애국가란 신시가 문학에 속하는 한 유형으로 ‘독립신문’에 실린 <애국가>, <독립가> 등을 위시해 <동심가>, <애민가>, <셩졀숑축가>, <셩
이처럼 부르주아 계급이 말하고자 했던 주된 내용은 부국강병이다. 즉, 반봉건, 문명개화, 반외세, 그리고 자주독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봉건사회와 연결된 탯줄을 끊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근대적 자유 민권을 지향하지만 봉건제도나 규범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개화 가사의 내용과 형식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로 개화가사를 다루고 있는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중에서 먼저 독립신문은 4.4.조로 율문형식과 함께 부분적인 형태 변화를 보여줬다. 전체내용은 몇 개의 연으로 구분하고 각 연 말미에 동일한 시구를 반복하는 형태였다. 예를 들어보면 「구약종자」나 「월하청요」를 보면 각 연의 마지막 구절에서 동일 어구를 반복하는 형태를 볼 수 있고, 특히 10연으로 구성된 「구약종자」는 문명개화를 가로막는 다양한 사회세력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보여 지는 장과 연의 구분은 내용의 조직적 전개와 주제의 통일성 확립, 주제 내용을 강조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부터 1909년 사이에 ‘사회등’란을 만들어 가사를 실었는데, 서사적 요소와 비판적 견해를 내세우거나 주관적인 감회를 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통감부 정치가 실시되던 시기에 발표되어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을 위주로 하는 시사 단평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국권의 회복이나 일본, 그리고 친일파세력을 비판, 풍자하는 소재와 각 사회단체나 학회의 집단이기주의적인 행태에 대한 비판 등을 주소재로 삼았다. 예를 들어 <권고현 내각>이나 <권고각학회>는 제목에서 보이듯 각 학회나 내각을 비판하는 한편 그들이 본래의 사명을 자각하고 충군애국에 힘쓰기를 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화가사는 현실의 제반 모순은 비판하는 한편 문명개화를 막는 주체적인 요인들에 대해서도 냉정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 창가의 추상적인 낙관주의에 비해 더 구체적인 현실 반영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화가사의 내용은 대부분 개신유학적인 문명개화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방책 역시도 부국강병책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비판의 수준역시 현상적인 사실의 나열과 교훈적 진술을 덧붙이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 특히 ‘동도서기론’의 세계관적인 한계를 보여주는데, 동도서기론 자체가 온전한 세계관이라기보다는 절충적 성격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전망의 부재상태로 빠지게 만들었다. 위와 같은 한계로 인해 개화가사는 한일합방을 고비로 하여 소멸되어버린다. 더 이상의 형식의 발전이나 새로운 전망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급격히 도태되어 간 것이다. 김재용 외 3명, op.cit., p141
3) 개화시조
다음은 개화 시조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개화시조는 종장의 종결어미 ‘이노라’, ‘하노라’를 생략한 것과 초장 또는 초,중장을 고시조에서 따온 후 나머지를 바꿔 부르는 식의 고시조를 패러디했다는 형식이자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개화시조의 등장은 주로 신문이나 잡지에 수록 되면서 시작 되었는데, 1908년의 대한매일신보의 ‘사조’란을 통해 발표된 250편이 대표적이다. 그 이외에도 1906년의 <국민신보>와 <대한민보> 그리고 잡지 <청춘>과 <소년>에도 일부 시조가 등장했다. 시조를 쓴 작가는 주로 보수적인 유학자였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제목은 있지만 단형시조 형식을 갖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일부 작가표시가 된 시조는 ‘개세자’, ‘지아생’, ‘선봉청년’ 등의 익명을 사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앞에서 오래 설명했듯이 시조는 창곡과 분리되었다는 중요한 변화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조창은 여전히 존속되어있었기 때문에 개화기 시조는 읽혀지면서 시로서 새로운 시의 장르를 재창조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개화시조에는 제목이 붙여졌다는 것이 주목할 부분이다. 작품의 주제 내용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시켜 암시하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흔치 않았다. 창곡을 불렀던 당시에는 곡조의 명칭에 따라 분류했기 때문인데, 개화기의 시조는 가창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시조의 연작 실험에 대해 살펴보겠다. 앞선 설명처럼 형식적 변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에 대한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최남선의 창작적 실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최남선은 3장 분장의 형태적인 정형성을 지키면서 단형시조의 특성보다 연시조를 널리 창작했다. 이것은 시적 주제의 압축, 긴장보다 시적의미를 확대하고자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데, 이는 반복적인 시적 율격에도 용이했다. 시조의 단형적인 형태가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고 시적 의미를 확대할 수 있는 장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연작성은 현대시조의 형식적인 특성으로 자리 잡은 가장 중요한 형태적인 요소이지만, 다음과 같은 개화시조의 연작 실험은 시조의 기품과 특유의 균제미를 이완시킬 우려도 없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1』, 민음사, 2002, pp173~176
2. 애국가 창가 신체시
1)애국가
“애국가”란 창가, 개화가사, 신체시와 함께 개화기 시가의 엄밀한 분석에 의한 유형들 중 한가지로서, 이 유형은 신체시의 전단계로 창가나 개화 가사 중 어느 하나에다 통칭하기도 하며 개화시 또는 개화가라는 새 장르를 형성한다.
개항 이래 밀려드는 서구 문학의 유입과 함께 빚어진 신·구(新·舊)의 갈등적 상황에서 신시가 문학이 형성되었는데, 이때 ‘신시가 문학’이란 용어가 아닌 ‘개화기의 시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시가 문학은 개화사상이나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했거나, 아니면 구세력 내지 외세에 교묘히 편승하여 매국하려는 아첨배들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을 구가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이때 애국가란 신시가 문학에 속하는 한 유형으로 ‘독립신문’에 실린 <애국가>, <독립가> 등을 위시해 <동심가>, <애민가>, <셩졀숑축가>, <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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