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문제 의식
2. 개화기 시조의 양식적·주제적 특성
3. 개화기 시조의 전통성과 근대성
4. 결론 : 문학교육에 주는 시사
2. 개화기 시조의 양식적·주제적 특성
3. 개화기 시조의 전통성과 근대성
4. 결론 : 문학교육에 주는 시사
본문내용
문학의 한 계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점 개화기 문학의 문학사적 의의로 크게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개화기 시조, 특히 대한매일신보 소재의 시조는 '노래'라는 전통적 영역은 창가를 비롯한 동시대 다른 장르의 소관으로 넘기면서
) 창가를 비롯한 '부르는 문학'은 주로 '독립신문' 소재 작품들로 나타난다. 윤여탁, 「개화기 시가를 통해 본 전통의 문제」, 미간행 원고, 1997.
'문학'이라는 독서물의 영역을 고수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 우리의 '문학'과 서양의 'literature'는 본디 '쓰기'를 의미한다.
. 여기에서 우리는 서두에서 제기한 문제, 즉 개화기 시조를 독립적인 하나의 장르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개화기 시조는 개화기라는 시대적 특수성에 대응하여 이전의 시조의 존재 조건과 구별되는 새로운 존재 조건 속에서 고유한 시학을 성취하고 있는 점에서 일단 독립적인 장르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 문학교육에 주는 시사
이상에서 본고는 개화기 시조가 현실 비판적 태도를 가진 시문학이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규정 속에는 더 이상 시조가 시가가 아니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개화기 시조는 독서물이었으며 활자화된 인쇄물인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개화기 시조뿐만 아니라 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 소통된 개화기 문학 전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만 애국가나 독립가 등의 창가는 서양식 곡조의 도입으로 부르는 문학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개화기 시조는 '부르기'의 영역을 새롭게 생성된 이러한 장르에 넘기고, '읽기'의 영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이전시켜 간 것이다.
이러한 문학사적 사실은 문학교육의 현장에서 그리 중요하게 취급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고전문학, 특히 조선조 문학을 교육하는 국면에서 그 연상의 관습성과 자동성에 주목한 결과,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폄하하는 예는 흔하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황진이의 시조로 대표되는 참신성과 독창성에 대한 주목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구술문화적 전통에서 황진이의 시조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는 점을 망각하곤 한다. 그 시대에는 작품의 상호텍스트성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구두로 유포되었던 공통어구나 테마를 차용·공유함으로써 다른 텍스트로부터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물론 문학에서 독창성이나 참신성 등의 미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문학적 관습에 대한 평가 절하로 곧바로 이어져서는 곤란한 것이다. 특히 시조의 경우 원본과 파생본의 정체는 모호하고, 작품마다 동일한 어구나 상투어가 빈번히 등장한다. 이러한 점을 들어 시조를 상투적인 관습에 매몰된 몰개성의 장르로 폄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시조가 애초에 관습시로서 존재했다는 점을 망각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국면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점은 바로 시조가 왜 관습시로 존재했던가 하는 질문을 이끌어내고 이에 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시조가 같은 작품이라도 전하는 문헌마다 약간씩 표기를 달리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관점이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시조가 연행된 문학이라는 점, 실재하는 청자에게 들려주거나 적어도 실재 청자를 상정한 문학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당위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현대문학을 교육하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점은 끊임없이 상기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노래와 시가 분리된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는 것은 새삼스럽다. 노래를 잃어버린 시는 청자가 아닌 독자를 상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러한 조건은 직접적인 소통이 아닌 책을 매개로 한 간접적인 소통을 야기했고, 즉각적인 공감의 실현이 아닌 시인과 작품에 대한 신비화를 초래하기 쉬웠던 것이다. 비유컨대 화자와 청자의 관계망 속에서 성립되는 노래가 '레고Lego' 조립 장난감에 가깝다면, 작가와 독자의 관계망 속에 존재하는 시는 '키트kit'와 닮은 것이다. 레고 조립 장난감은 온갖 종류의 형태들을 만들 수 있는 반면에, 키트는 조립상의 어떠한 자유도 주어지지 않고 최소한의 실수도 치명적인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 이 비유는 Umberto Eco의 「글쓰기와 글읽기」(김인환 외 편, 『문학의 새로운 이해』, 문학과지성사, 1996)를 원용했다.
.
또한 문학의 독창성과 개성이라는 개념이 존재 조건상의 근대적 특수성에 기인한다는 점은 특히 강조되어야 하며, 그것이 근대적 개아(個我)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도 각인되어야 할 것이다. 월터 옹의 지적대로 현대에 들어와서 상호텍스트성을 말하는 여러 이론들이 낭만적인 인쇄문화의 고립주의적 미학을 공격했을 때, 그것이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참고 문헌>
『歌曲源流』 跋
『花源樂譜』 序
磨嶽老樵, 『靑丘永言』 後跋
李世輔, 『風雅』
김대행, 『시조 유형론』, 이대출판부, 1986
김대행, 「말하기와 노래하기」, 『詩歌 詩學 硏究』, 이대출판부, 1991
김영철, 「開化期의 詩歌 硏究」, 서울대 대학원, 1975
김영철 외, 『韓國詩歌의 再照明』, 형설출판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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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개화기 시조, 특히 대한매일신보 소재의 시조는 '노래'라는 전통적 영역은 창가를 비롯한 동시대 다른 장르의 소관으로 넘기면서
) 창가를 비롯한 '부르는 문학'은 주로 '독립신문' 소재 작품들로 나타난다. 윤여탁, 「개화기 시가를 통해 본 전통의 문제」, 미간행 원고, 1997.
'문학'이라는 독서물의 영역을 고수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 우리의 '문학'과 서양의 'literature'는 본디 '쓰기'를 의미한다.
. 여기에서 우리는 서두에서 제기한 문제, 즉 개화기 시조를 독립적인 하나의 장르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개화기 시조는 개화기라는 시대적 특수성에 대응하여 이전의 시조의 존재 조건과 구별되는 새로운 존재 조건 속에서 고유한 시학을 성취하고 있는 점에서 일단 독립적인 장르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 문학교육에 주는 시사
이상에서 본고는 개화기 시조가 현실 비판적 태도를 가진 시문학이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규정 속에는 더 이상 시조가 시가가 아니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개화기 시조는 독서물이었으며 활자화된 인쇄물인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개화기 시조뿐만 아니라 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 소통된 개화기 문학 전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만 애국가나 독립가 등의 창가는 서양식 곡조의 도입으로 부르는 문학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개화기 시조는 '부르기'의 영역을 새롭게 생성된 이러한 장르에 넘기고, '읽기'의 영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이전시켜 간 것이다.
이러한 문학사적 사실은 문학교육의 현장에서 그리 중요하게 취급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고전문학, 특히 조선조 문학을 교육하는 국면에서 그 연상의 관습성과 자동성에 주목한 결과,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폄하하는 예는 흔하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황진이의 시조로 대표되는 참신성과 독창성에 대한 주목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구술문화적 전통에서 황진이의 시조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는 점을 망각하곤 한다. 그 시대에는 작품의 상호텍스트성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구두로 유포되었던 공통어구나 테마를 차용·공유함으로써 다른 텍스트로부터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물론 문학에서 독창성이나 참신성 등의 미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문학적 관습에 대한 평가 절하로 곧바로 이어져서는 곤란한 것이다. 특히 시조의 경우 원본과 파생본의 정체는 모호하고, 작품마다 동일한 어구나 상투어가 빈번히 등장한다. 이러한 점을 들어 시조를 상투적인 관습에 매몰된 몰개성의 장르로 폄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시조가 애초에 관습시로서 존재했다는 점을 망각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국면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점은 바로 시조가 왜 관습시로 존재했던가 하는 질문을 이끌어내고 이에 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시조가 같은 작품이라도 전하는 문헌마다 약간씩 표기를 달리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관점이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시조가 연행된 문학이라는 점, 실재하는 청자에게 들려주거나 적어도 실재 청자를 상정한 문학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당위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현대문학을 교육하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점은 끊임없이 상기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노래와 시가 분리된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는 것은 새삼스럽다. 노래를 잃어버린 시는 청자가 아닌 독자를 상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러한 조건은 직접적인 소통이 아닌 책을 매개로 한 간접적인 소통을 야기했고, 즉각적인 공감의 실현이 아닌 시인과 작품에 대한 신비화를 초래하기 쉬웠던 것이다. 비유컨대 화자와 청자의 관계망 속에서 성립되는 노래가 '레고Lego' 조립 장난감에 가깝다면, 작가와 독자의 관계망 속에 존재하는 시는 '키트kit'와 닮은 것이다. 레고 조립 장난감은 온갖 종류의 형태들을 만들 수 있는 반면에, 키트는 조립상의 어떠한 자유도 주어지지 않고 최소한의 실수도 치명적인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 이 비유는 Umberto Eco의 「글쓰기와 글읽기」(김인환 외 편, 『문학의 새로운 이해』, 문학과지성사, 1996)를 원용했다.
.
또한 문학의 독창성과 개성이라는 개념이 존재 조건상의 근대적 특수성에 기인한다는 점은 특히 강조되어야 하며, 그것이 근대적 개아(個我)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도 각인되어야 할 것이다. 월터 옹의 지적대로 현대에 들어와서 상호텍스트성을 말하는 여러 이론들이 낭만적인 인쇄문화의 고립주의적 미학을 공격했을 때, 그것이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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