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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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II. 본론
1. 독일의 문화적 정체성
2. 독일의 교육
3. 독일의 통일
4. 독일과 문화도시 프로젝트
III. 결론
IV. 참고문헌
I. 서론
II. 본론
1. 독일의 문화적 정체성
2. 독일의 교육
3. 독일의 통일
4. 독일과 문화도시 프로젝트
III. 결론
IV.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독 상주대표부, 폴란드, 헝가리, 체코 주재 서독 대사관에 동독주민들이 몰려들어 서독으로 가는 비자를 요구하였다. 서독 정부는 소련과 동독 당국과 협의를 거쳤고, 체코와 폴란드에 머물던 동독 주민 2만 여명을 열차를 통해 서독으로 수송하였다. 동독주민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이를 접하게 되자, 주민들의 탈출은 점차 늘어났고 결국 매일 2,000여명이 서독으로 탈출하기에 이르렀다. 와중에 10월 7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늦게 오는 자는 인생의 벌을 받게 된다”는 소련 속담을 인용하여 동독의 개혁을 촉구하였는데, 이로 인해 동독 주민들의 시위가 가열되었고, 시위의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시위의 빠른 규모 확산과 소련의 유혈진압 반대로 인해 동독 지도부는 결국 무력 진압을 포기하게 되었고, 개혁 성향으로 잘 알려진 에곤 크렌츠가 10월 서기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에곤 크렌츠는 국민들에게 과감한 개혁을 약속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시위는 더욱 거세졌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공보담당 정치국원 샤보프스키의 실수로 동독과 서독을 나누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샤보프스키는 11월 9일 여행 자유화 계획에 대해 설명하던 중에 “누구나 지금부터 서독으로 여행을 갈 수 있다”라고 발표하였는데, 이에 동서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가 국경개방을 요구한 것이다. 국경 경비병들은 겁에 질려 국경을 개방하였고, 베를린 장벽은 이로써 무너지게 되었다. 공산지도부는 사태를 되돌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결국 국경 개방을 기정사실화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동독 총독으로 취임한 모드로우 총리는 인구 소멸로 인한 경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서독 총리인 콜 총리와의 회담에서 120억 마르크의 경제지원을 요청했으나, 콜 총리가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지원을 거부했다. 동독 경제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모드로우 총리는 콜 총리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콜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화폐동맹 창설 원칙에 동의하며 동독 공산정권이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동독 기민당과 사민당은 동독 민주의회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하였고, 서독정부와 통일 협의를 개시하였다. 이로써 독일의 통일작업은 급속히 진전하기 시작하였는데, 1990년 5월 18일 동서독 재무장관이 ‘화폐, 경제, 사회 통합조약’을 체결하면서 동서독은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 8월 31일 동서독 내무장관 간에 통일조약이 체결되었고, 9월 20일 동서독 의회가 통일조약을 비준하였으며 10월 3일 독일정부가 최종적으로 통일을 선포하면서 독일은 결국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동독과 서독이 쉽게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에는 동독과 서독의 경제 수준에 있어서의 차이가 도드라지게 나타났던 것 역시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점이 통일 이후의 독일에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였다. 때문에, 통일 독일 정부에서는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수준을 균등하게 맞추고자 노력하였고, 이는 상당 수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문제가 되는 것은 2000년대에 접어들며 동서독의 경제수렴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는 점이다. 향후 동독과 서독의 연방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동독 지역의 혁신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동독의 대학 및 연구기관을 확대하고, 해외 인재를 유치하며, 동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4. 독일과 문화도시 프로젝트
독일의 행정구역은 크게 우리나라의 광역권으로도 볼 수 있는 16개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독일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주는 한
시위의 빠른 규모 확산과 소련의 유혈진압 반대로 인해 동독 지도부는 결국 무력 진압을 포기하게 되었고, 개혁 성향으로 잘 알려진 에곤 크렌츠가 10월 서기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에곤 크렌츠는 국민들에게 과감한 개혁을 약속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시위는 더욱 거세졌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공보담당 정치국원 샤보프스키의 실수로 동독과 서독을 나누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샤보프스키는 11월 9일 여행 자유화 계획에 대해 설명하던 중에 “누구나 지금부터 서독으로 여행을 갈 수 있다”라고 발표하였는데, 이에 동서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가 국경개방을 요구한 것이다. 국경 경비병들은 겁에 질려 국경을 개방하였고, 베를린 장벽은 이로써 무너지게 되었다. 공산지도부는 사태를 되돌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결국 국경 개방을 기정사실화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동독 총독으로 취임한 모드로우 총리는 인구 소멸로 인한 경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서독 총리인 콜 총리와의 회담에서 120억 마르크의 경제지원을 요청했으나, 콜 총리가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지원을 거부했다. 동독 경제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모드로우 총리는 콜 총리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콜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화폐동맹 창설 원칙에 동의하며 동독 공산정권이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동독 기민당과 사민당은 동독 민주의회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하였고, 서독정부와 통일 협의를 개시하였다. 이로써 독일의 통일작업은 급속히 진전하기 시작하였는데, 1990년 5월 18일 동서독 재무장관이 ‘화폐, 경제, 사회 통합조약’을 체결하면서 동서독은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 8월 31일 동서독 내무장관 간에 통일조약이 체결되었고, 9월 20일 동서독 의회가 통일조약을 비준하였으며 10월 3일 독일정부가 최종적으로 통일을 선포하면서 독일은 결국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동독과 서독이 쉽게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에는 동독과 서독의 경제 수준에 있어서의 차이가 도드라지게 나타났던 것 역시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점이 통일 이후의 독일에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였다. 때문에, 통일 독일 정부에서는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수준을 균등하게 맞추고자 노력하였고, 이는 상당 수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문제가 되는 것은 2000년대에 접어들며 동서독의 경제수렴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는 점이다. 향후 동독과 서독의 연방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동독 지역의 혁신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동독의 대학 및 연구기관을 확대하고, 해외 인재를 유치하며, 동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4. 독일과 문화도시 프로젝트
독일의 행정구역은 크게 우리나라의 광역권으로도 볼 수 있는 16개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독일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주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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